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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방에서의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글/김원길)

문화비전 2000추진위원회가 새로운 예술 모색 워크샵을 서울, 부산, 광주, 춘천에 이어 다섯 번째로 전통의 고장 안동에 와서 개최함으로써 이 고장 예술인들에게 첨단 예술 이론을 접하게 해 주고 안목을 넓혀준 데 대해 감사한다.

안동은 대도시에 비해 예술인구가 적고 재정자립도가 낮아서 새로운 예술활동의 기반을 갖추기가 어려운 곳이다. 아무도 안동에서의 예술문화의 획기적 발전을 예감하지는 않을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땅이야말로 한국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는 고장이 될 것이며 새로운 예술태동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안동의 예술문화적 잠재능력

첫째, 안동은 이야기의 보고이다. 안동은 무속, 불교, 유교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며 고려 창업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동안 이 지방 출신 인문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소재와 배경이 되기에 풍부한 곳이다.

둘째, 가장 많은 문인 배출의 고장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한문 문학은 문집의 저자가 400명이 넘는다. 현대의 문인들로는 이육사, 조지훈, 오일도, 김종길, 이오덕, 권정생, 김주영, 유안진, 이문열, 이인화 등에 이르기까지 전국 최다의 유명 문인을 배출했다.

셋째, 한국 최다 민속의 고장이다. 하회탈춤, 줄불놀이,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성주풀이, 농요, 민요 등 민속놀이와 전통생활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넷째, 사진, 회화의 소재가 많다. 명승고적과 전통의례, 풍물 등은 많은 사진가, 화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다섯째, 관광개발에 따른 공연예술, 즉 무용, 음악, 국악, 연극, 연예, 민속놀이 등 필연적으로 진흥된다.

여섯째, 북부지역 유일의 국립대학인 안동대학교의 예술대학이 인적자원을 함유하고 있다.

일곱째, 안동조각공원이 많은 조각작품을 유치한다.

여덟째, 아시아 유일 창작마을인 지례예술촌이 있다.

예술촌의 효능은 그것이 예술인들의 창작, 연수, 휴양, 교류에 이바지하는 바 예술인들이 선호하는 훌륭한 예술촌이 있는 고장은 자연스레 예술인들의 내왕과 이용이 잦아지고 그들간의 교류는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영향의 수수가 가능해져 새롭고 수준 높은 예술창작 효과를 낳을뿐더러 그 고장의 예술문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됨은 당연하다.

실제로 안동의 지례예술촌은 국내외의 저명예술인 그리고 젊은 예술지망생들이 창작, 연수, 세미나 그리고 작품 구상을 위해 혼자서 또는 여럿이 어울려서 드나들고 있으며 이들은 여기서 금방 친숙한 사이가 되어 예술상의 조언자 또는 파트너 또는 후원자가 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예술촌 동호인이자 예술촌 후원회원이 되기도 해서 이 지역의 예술발전을 간접적으로 돕고 있는 갸륵한 세력인 것이다. 만약 문화당국과 지방자치단체가 임하호 수몰지역의 건축문화재 11점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예술촌을 확대 건설했더라면, 빼어난 경관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예술촌이 되어 지금쯤은 이 외딴 시골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예술문화의 메카가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발표무대는 안동이 아니어도 좋다. 그 발표의 장은 이 세상 어디라도 좋지만 안동이 창작의 밀실로서 '새로운 예술의 산실'의 역할과 그 위상은 전국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전통+첨단=새로운 예술

작년 4월 임동창 일행의 임동면 고천리에서의 성주풀이 공연은 피아노와 국악관현악, 사물놀이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판소리와 서예와 목각, 연극, 대중가요, 성악 그리고 전문인과 비전문인이 총동원된 장르 해체의 공연이요, 퓨전아트였는데 그 공연장소도 다 허물어져가는 고건물을 선택한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이러한 새로운 예술공연을 안동에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주 신앙의 발원지가 안동이고 현대판 성주풀이를 가능케하는 소재가 안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로서 4회째 개최하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가능했던 것도 단초는 고려 때 제작된 하회탈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탈춤뿐만 아니라 안동이 생산하고 유치할 수 있는 모든 문화예술이 총망라되는 것이니 안동의 문화예술적 소재의 재고는 다른 어떤 고장보다 풍부하다 하겠다.

현대판 성주풀이에서나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나 그 소재는 옛것에서 왔다.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당시의 영향이었고, 비디오 아트의 명수 백남준이 화면을 설치한 곳도 100년전 고물자동차였으며 윤이상의 '심청'도 옛것이었고, 아카데미상을 휩쓴 '세익스피어 인 러브'도 400년전으로부터 왔고, '벤허'의 시대배경은 2천년전 유대땅이다. 서구의 르네상스 그 자체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예를 부흥한 것이고 보면 모든 새로운 것은 옛것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재활용이 더욱 정겨운 새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안동만큼 옛 것이 많고 이야기가 많은 곳이 어디에 있으랴? 안동의 각양의 문화유산을 현대 예술로 변용하고 재활용할 여지는 너무나 많은 것이다. 나는 새로운 예술의 해에 문학작품 하나를 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화기 전후 안동사람들의 익살을 수집해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것이 뭐 새로운 문학이 되겠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정리된 한국의 대표적 골계문학 속에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북부지방의 선비사회의 골계가 빠져있는 것이다. 거의가 봉이 김선달, 정수동, 정만서, 방학중 등 중인, 천민들의 야비한 농지꺼리일 뿐이다. 여기에 비하면 안동 선비의 익살은 차원과 품위가 다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대표적 골계라 할 것이니 일것을 정리하는 것이 어찌 새로운 문학이 아닐 것인가? 가장 지방적이고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새로울 수 있고 세계적이고 클래식 할 수 있는 것이다.

첨단과 전위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요즘처럼 혼돈된 세상에선 '우리것 제대로 하기'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것이다. 아마 세기가 바뀌고 디지털시대의 도래에 때맞추어 예술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한데 지금까지의 예술에 대한 식상,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술에 대한 욕구, 그리고 예술 발전의 가속화를 기대하는 예술계의 조급함 때문이나 아닌지?

진짜 예술인이 원하는 것

작가가 영감을 얻어서 그것을 감동적인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이다. 일상생활의 번거로움과 스트레스를 피해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것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닭이 알을 낳을 때나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깔 때 혼자만의 둥우리를 찾아가듯이 작가도 작품을 배고 낳을 때는 혼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화가 고갱은 혼자가 되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타이티로 갔으며 불후의 명저들이 흔히 유배지나 감옥에서 탄생하는 것은 창작과 사색에 혼자만의 캡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조용한 산사나 정사를 찾아가지 않았던가! 하물며 고시 공부보다 더 정신력이 소모되는 창작을 함에 있어서랴.

미국과 캐나다의 창작 마을이 인기가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속이나 섬에 위치해 있으며 스튜디오에 TV나 전화도 없고 가족의 면회마저 허용되지 않는 그야말로 수도원이나 선방 같은 곳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정기간 사용료를 내고 숙식을 제공받으며 아무런 방해없이 창작에 전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말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침이 바쁘고 시끄러운 나라로 정평이 나 있다. 간신히 예배당 종소리를 잠재워 놓긴 했지만 아직도 마이크 행상이 떠들고 통반장이 방송을 해대고 잡상인이 문을 두드린다. 소음을 통제할 줄 모르는 정부, 욕설이 난무하는 의회가 있는 한 그 나라의 철학과 창작예술은 노이로제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창작마을이었다. 나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예정지에 있던 고건물 1-동을 경상북도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받아 이를 예쑬인들의 창작공간으로 쓰기 위해 깊은 산 속 호숫가에 옮겨 짓고 지금까지 12년째 예술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단체로 와서 세미나 또는 워크숍을 하고 가는 것까지 포함하면 이곳을 찾은 예술인은 1만명도 넘겠지만 그 중에서 혼자서 책 보따리를 싸들고 글을 쓰러오는 창작예술인들은 모두가 진지한 진짜 예술인들이었다.

문화당국이 놓친 것

베스트셀러 작가에게는 출판사가 선도금을 주고 호텔방에서 소설을 쓰인다지만 대중과 상업주의에 영합할 수 없는 순수 문학인들, 예술인들에게 예술촌은 여간 긴요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전시회를 앞둔 화가나 성가, 발표회를 앞둔 작곡가도 이런 조용한 곳을 찾아서 마무리 작업을 하곤 한다.

국악, 양악, 무용, 연극 등 공연예술인도 단체로 와서 연주 연습과 워크샵을 한다. 공연예술 연습장이 태부족인 우리나랑[선 이러한 전지훈련 장소가 진작부터 있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까지 가서 음악캠프를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용평리조트에 갈 형편이 못되는 실정이다. 멀리 대전의 초등학교 단소반에서부터 서울의 박동진 판소리연구소 학생들, 그리고 대구예술대학 국악과는 90명이 열흘씩 합숙훈련을 한 적도 있는데 올해는 70명이 12일간 사용하겠다 한다.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터에 다니는 아마추어까지 합치면 예술인구는 너무나 많고 그들의 수련공간은 태부족이다. 그러니 예술인 상대의 수련장 입대업 시장은 무한정 넓다하겠다. 그런데 문화당국은 이런 사정을 체감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90년대초 나는 문화부에 지례를 예술촌으로 지정하고 도로, 전기, 상수도시설 등 기본시설을 지원해 달라는 건의를 했더니 전국에 6곳을 동시 지정하면서 정작 건의했던 지례예술촌을 제외해 버렸다. 당시의 언론들이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자 이번에는 '추가로 지정해주되 시효는 1년으로 하고 경제적 세제적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은 지정서를 보내왔다. 그때의 문화부가 지정했던 6개마을(하회마을, 제주도 성읍마을, 승주의 낙안읍성, 온양의 외암마을 등)은 전혀 조용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점폐업이 되었고,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국의 아무런 도움없이 견뎌온 지례예술촌만 예술인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당국이 민간의 간절한 건의를 수렴하지는 못할망정 아이디어를 강탈하고 공로를 새치기 해서야 되겠는가? 역사가의 말을 빌면 관(官)의 이런 작태가 우리 민족사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고질적 병폐라 했다. 이야말로 만족문화의 비전을 망치는 망국적 비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21세기이니 더는 그러지 말기 바란다.

지금 지례예술촌에는 예술인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도시생활의 번거로움과 스트레스를 잊고자, 그리고 도시소음과 기계음과 TV와 PC에서 들리는 모든 인공적인 소리로부터 잠시나마 떠나서 태고의 자연의 모습, 자연의 소리 그리고 고요 속에 잠겨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과 외국에서 살아 온 교포2세들이 한국의 전통적 의식주 생활과 관습을 보고자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한복을 빌려입고 군불 뗀 온돌방이나 대청마루에 앉아서 주변 산의 산색과 호수의 물빛을 바라보며 안동지방의 전통반가의 시골음식을 먹는 모습을 그들은 즐겨 필름에 담아가는 것이다. 왜 문화당국은 지금 우리 국민의 99%가 우리 조상들이 살아 온 품위있는 골기와 집에서의 숙박체험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지 못하는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우리 국민 스스로가 먼저 깨닫도록 해야할 터인데 곳곳에 '∼랜드'니 '∼월드'니 하는 대형 위락시설을 만들 계획만 하고 있으니 당국은 국민들을 청룡열차에 태워 정신을 못차리게 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뉴욕과 파리, 동경과 서울이라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한 새로운 예술'을 논해 볼 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구 18만의 시골, 지금은 벌써 한물 갔다는 비디오 아트마저도 생경한 사람들이 사는 답답한 시골에 와서 디지털 예술의 선교활동은 설득력이 없다. 지금 안동예술계의 현안사항은 시 보조금 연간 8백만원으로 8개 예술단체의 예술행사를 어떻게 치룰까 하는 것이다. 지방예술계의 재정이 이렇게 열악한 줄도 모르고 첨단 전위예술을 운운한다는 것은 양식 떨어진 집에 가서 프랑스 요리를 강의하는 것만큼이나 엉뚱한 처사이리라.

그러나 그렇더라도 '너무 깜깜하다고 촛불을 켜지 않을 수는 없다'는 심경으로 안동은 고명한 여러분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문화비전 2000 추진위원 여러분과 당국자 여러분, 그리고 참석하신 예술계 인사 여러분! 우리 안동은 예술문화의 고장으로 거듭나기를 원하며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약간의 지원만 있다면 머지않아 국제적 예술문화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많은 조언과 성원을 바란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