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고 만든 이벤트 ′망발례′(글/김원길)망발이란, 망언으로써 자기 또는 조상에게 욕이 되게 하는 말을 이른다. 그런데, 이 망발은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경우와 무심코 한 말이 망발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소개한 것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것들이다. 안동사람의 실수담은 주로 숙맥의 바보짓과 보통사람의 망발로 구분된다. 숙맥의 바보짓은 본인이 그것을 인식치 못하지만 정상인의 망발은 말꼬리가 잡혀 금방 짓궂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망발한 것을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망발례(妄發禮)를 올려야 한다. 타 지방에서는 망발풀이 또는 망발턱이라고 하는 이 의식은 다름아닌 술 대접이다. 그러나 망발례를 냈다고 해서 망발한 사실이 없었던 걸로 되는게 아니라 되레 더 크게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해학을 좋아한 우리 선조들이 다 웃자고 만들어 낸 이벤트였다.
① 양반이거든 다 따 가소
하회마을을 비롯한 풍천면 일대는 잠업이 성해서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뽕잎은 누에의 양식인데 자기네 누에에게 먹일 뽕잎이 부족하면 남의 뽕잎이라도 먹여야 한다. 얻어다 먹여도 될 일이건만 평소에 썩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아니면 좀 달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낮으론 남의 뽕밭 고랑 깊숙이 들어가 뽕잎을 따오고 캄캄한 밤이면 남의 집 텃밭이나 바로 담장 밖에서 잎을 따가는 수도 있으리라.
한밤중에 머리맡에서 똑똑, 뽕잎 따는 소리가 들린다. (아, 또 누가 우리 텃밭에 와서 뽕을 따 가는구나) 유첨지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어둠을 향해 벽력같이 소리를 내 질렀다.
"거기 왠 쌍년이 우리 뽕 다 따가노!"
따라서가 붙잡지 못할 바엔 욕이라도 퍼부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리를 질러놓고 가만 생각해 보니 뽕따러 온 사람이 영 남이 아니면 어쩌나? 필시 앞 뒷집에 사는 대소가 사람일 것이다. 종숙모 얼굴도 떠오르고 올봄에 과수가 된 재종 형수도 떠올랐다.
유첨지는 훨씬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양반이거든 다 따 가소."
군소리
망발(妄發): 무심 중에 자기 또는 조상에게 욕이 되게 말함.
② 우리는 왜 내앞댁이 없노
어느날 의성김씨 학봉파의 관자(冠者)들이 버스를 타고 검재(금계동)를 출발하여 안동을 지나 반변천을 따라 가다가 내앞(川前洞)앞을 지나게 되었다. 비리실 앞 경포대와 개호송이 보이고 멀리 백운정, 그리고 넓직한 들판과 방풍림을 보며 왼쪽으로 의성김씨 큰 종가와 작은 종가를 비롯한 우렁차고 고색 창연한 기와집들이 즐비한 게 마을이 정말 맘에 들었다. 이때 어느 어정쩡한 어른이
"아, 거, 동네 참 좋다. 여기가 어디로?"
"내앞이시더"
"양반이지러?"
"예, 내앞이라카이께네요"
"내앞이라... 그런데 우리 검재에는 왜 내앞하고 혼인이 없노?"
(이 어른은 내앞과 검재가 형제 집이란 걸 깜박했던 것이다.)
③ 퇴계 아재
퇴계 선생을 할배라고 부르는 진성이씨 자손 중 어떤이가 자기네 항렬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는지를 잘 몰랐단다.
즉, 숙항되는 이에게 하대를 하기도 하고 질항에게 존대를 해버리기도 하여 주위의 핀잔을 샀다. 그가 어느날 조카와 함께 문중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날도 또 실수를 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조카가 묘안을 냈다.
"아재는 제 옆에 계시면서 제가 할배라고 부르는 사람에겐 아재라 하시고 제가 아재라 부르면 동항인줄 아세요."
"히힝, 그거 아주 쉽지러."
그래서 문회 동안 조카 옆에서 호칭을 전에 없이 정확하게 사용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고 본인도 신기했다.
그런데, 조카가 무슨 말 끝에 퇴계 할배 운운하는 걸 들은 바 있어 헤어질 때 좌중에게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럼, 퇴계아재 제삿날 또 보시더."
④ 수습불능
박영감은 안동행 기차 안에서 마주 앉은 중년과 인사를 나누었다. 중년은 고향이 ○○라 했다. 출입(처가)은 △△라 했다.
"△△가 처가동네라? 히히히... 그 동네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
지루한 기차 여행중에 그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시간 보내기가 나을 것 같아 쉬엄쉬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 사는 내 친구 권 아무개가 환갑을 이틀 앞둔 날 시집간 딸이 와선 울며 하소연 하기를 신랑인 김서방이 속을 썩여 못살겠다는 것이야. 술과 계집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집에도 아니 들어오니 이를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지. 그래 권영감은 "오냐, 그 놈도 인간이라면 내 환갑날엔 오겠지" 내 그날 단단히 나무라고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을테니 그만 울어라."
아니나 다를까 환갑날이 되자 말썽꾸러기 사위가 찾아왔는데 권영감은 잊지 않고 사위를 불러 앉히고 엄숙히 훈계하기를
"에... 계집이 정 보고 싶으먄 내 댁을 보고..."
이때 바질스런 사위가 고개를 숙인 채 킥하고 웃었지. 장인도 얼른 눈치를 채고 곧 바로 정정을 한다는 게
"내 댁이란 즉 니 댁이니라" 했지
킥킥킥 이야기가 돌이킬 수 없이 빗나가 버렸잖는가, 정정을 안 할 수도 없고 하고 보니 그 모양이고 도대체 수습이 불가능한 사태에 빠져 버렸지, 우습잖은가?
"그래, 그 친구도 자네 처족일 텐데 자네와는 어찌되는가?"
"그 분이 바로 제 빙장(聘丈)입니다."
"...?!"
군소리
이 사람은 우스개하기를 좋아하다가 남의 장인과 사위를 한꺼번에 조롱한 험구가(險口家)가 되버렸다. 가만 앉아서 원수를 만든 것이다.
사위란 자가 너그럽지 못했거나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따귀를 때린대도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자충수(自充手)요 자승자박-이런 걸 죽을 맛이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나? 수인사(修人事)단계에 잘못이 있었다. 앞자리의 청년에게 처음부터 친구와의 관계를 물어서 옹서지간(翁壻之間)임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니 바로 인척관계를 체크하지 않은 데에 사단(事端)이 있었던 것이다.
안동 사람들은 이런 류의 실수를 않기 위해 처음 만난 사람에게 흔히 본관을 물어보고 그의 조상과 친인척 관계를 종횡으로 캐묻고 마지막으로 자기를 드러내어 그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해준다. 피차에 불의의 실수를 않도록 하자는 장치인 것이다. 개개인의 정체성(正體性)확인 작업이기도 한 이 수인사 관습에는 당연히 인간존중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누대간(累代間)의 세의(世宜)로 맺어지고 혈연으로 얽힌 유림사회에선 인사 닦음이 유별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회지 사람이나 신세대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드는 이러한 문화 역시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지 단순한 양반자랑이거나 조상 울궈 먹기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동성동본(同姓同本)에 팔촌끼리 사돈하기가 국법으로 허용되는 시대가 왔지만 이 수인사를 철저히 하고 살면 동성남녀의 야합(野合)이나 근친혼도 함부로 불어나진 않을 것으로 내다 보인다.
⑤ 사당에 쇠죽 퍼 넣어라
우리나라 유학의 마지막 유종(儒宗)이라 일컬어지는 김모 선생은 새해 아침이 몹시 바빠질 것 같아 자못 마음이 초조했다. 몰려오는 세객(歲客)을 맞으랴, 불천위(不遷位)를 비롯한 고조위(高祖位)에 까지 차례(茶禮)를 올리려면 사당 청소도 해야 하고... 이렇게 바쁘다 보면 쇠죽은 언제 먹이니? 서두르는 수 밖에 없었다.
"돌쇠야, 오늘은 매우 바쁠따. 너 사당청소 얼른 해 놓고... 쇠죽 퍼 주는 거 잊지 마라."
옆에서 듣고 있던 삼종형(三從兄)이 끼어들었다.
"최존위(最尊位)에는 빼놓고 퍼 주라하게."
군소리
김선생이 망발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걸 망발화 한 것은 삼종형의 전광석화 같은 개그(gag)솜씨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바쁜 하루도 시간이 넉넉해지고 왠종일 웃음이 절로 난다. 백년도 더 지난 지금도 설날만 되면 웃을 수 밖에 없다. 일년의 시작을 웃기부터 해야하니 만사형통은 당연지사.<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