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코러스(글/글. 김윤한 그림. 김병수)
"어이 누구 화끈하게 깃발 잡을 사람 없나?"
검은 뿔테 안경의 김대리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사무실 남자직원들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금요일이었다. 직원들이 그리 자주 술자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일은 토요일이라는 해방감 때문에 금요일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자칭 주도 8단이라는 김 대리가 먼저 술 수작을 걸곤 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직원들의 반응은 그리 시원치가 않았다. 아마도 오늘 술자리는 제대로 성사될 것 같지가 않았다.
사무실 구석에 걸린 벽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까지 편집을 마쳐야 하는데 오늘 오후 5시까지 꼭 보내 주기로 했던 원고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마무리를 하지 못해 내심 조바심이 나서 한 번 더 독촉전화를 하리라 생각하고 혹시나 해서 이 메일을 열었다. 원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읽지 않은 편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무슨 내용일까? '순자씨 시간 좀'이라고 올려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천천히 옮겨 클릭을 했다.
"시간 좀 내주십쇼. 오늘 저녁7시 커피숍 코러스. 기다리겠습니다."
보낸 사람은 장동근씨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입사한 지는 열마 되지 않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인기 최고의 총각이었다. 일 미터 팔십이 넘는 훤칠한 키에다 뽀얀 피부, 평소 말수가 적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수 많은 김대리와 비교하면 그리 흠이 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외모상으로는 동근씨와 이름이 비슷한 탤런트 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질 것 없는 매력남이었다.
그런데 동근씨는 입사한 지 육개월이 지났지만 나에게는 업무적인 이야기 외에 우스갯호리 한 번 건네지 않았다. 하기사 나 자신의 외모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터라 장동근이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머님 왜 날 낳으셨나요"라는 오래된 노래의 가사처럼 나는 외모에 대해 부모님을 무지 원망도 했었다. 사춘기가 들면서 거울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내가 거울을 보아도 촌스럽게 검은 피부, 쭉 찢어진 눈꼬리, 게다가 짤달막한 키에 뚱뚱한 몸집, 외모나 신체에 대해서는 어디에 내놓을 것 없는 처지인 나에게 장동근이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처럼 다른 여직원들이 모여 입가에 침을 흘리며 장동근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한 번도 장동근을 좋아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추호도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장동근은 올라갈 수 없는 나무였다.
"시간 좀 내주십쇼. 오늘 저녁7시 커피숍 코러스, 기다리겠습니다."
이 메일에 올라온 장동근의 글을 외워버릴 정도로 행간까지 꼼꼼히 읽고 또 읽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말수가 적은 탓에 행여 내게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외모에 대해 워낙 자신이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공부뿐이었다. 못생긴 내 외모 덕분(?)에 공부라면 항상 전교에서 1,2등을 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땐가 억세게도 못생긴 국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도 내 생활의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사람은 외모보다도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아마 장동근은 옆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읽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동근은 진짜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하기사 요즘 여자 애들이란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으면서 머리에 노랗고 빨간 물이나 들이고 얼굴이 화운데이션으로 도배를 하는 겉멋만 잔뜩 든 풍선과도 같은 존재에 다름없었다.
그런 반면 나 자신은 아름답게 살려고 항상 노력해왔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의 세계로 깊이 잠겨들 수 있었다. 공부는 물론이고 이름 있는 문학서적은 모조리 구해 읽었다. 한 때는 클래식 음악에 마약처럼 중독된 적도 있었다. 기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오래한 탓에 벌써 오년짼가 실내악단 소속으로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컴퓨터 스위치를 끄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원고를 챙겨 캐비넷에 넣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은 편 창가에 있는 장동근의 자리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도 태연한 척 창문 바깥쪽을 바라보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계가 여섯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 좀 내주십쇼. 오늘 저녁7시 커피숍 코러스. 기다리겠습니다."
장동근 특유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시내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네온사인이 하나씩 불을 켜고 오고가는 승용차들도 하나씩 라이트를 밝히기 시작했다. 시내는 순식간에 흐르는 강물처럼 불빛들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커피숍 코러스는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일곱시 십 분 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아직 십분 여가 남아 있었다. 여자가 혼자 커피숍에 앉아서 남자를 기다리는 것만큼 처량한 모습은 없었다. 예전에 남자로부터 몇 번 바람을 맞은 뒤로는 그런 점을 절실히 느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코러스 뒤편 골목길을 한 바퀴 거닐었다. 볼썽 사납게 초저녁부터 젊은 남녀가 서로 껴안다시피 하고 앞을 스쳐 지나갔다. 증권회사 옆 가게에서는 개업행사를 하는지 반쯤은 벗은 듯한 치어걸이 쿵쾅거리는 음악에 맞춰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커피숍 코러스는 제과점 맞은 편 지하에 있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천천히 지하 계단을 들어섰다. 발끝에 밟히는 나무계단의 촉감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커피숍 미닫이문을 밀치자 약간은 어둑한 실내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전에 친구들이랑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실내장식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데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장동근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구석자리 물레방아가 있는 곳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떤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실내에서는 모차르트 40번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가슴 한 가운데 거대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 장대함을 느끼곤 했다. 십 여분이 지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내에는 남녀가 다정스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분위기에 맞지 않게 여자 애들 여럿이서 앉아 방정스레 수다를 떨고 있었다. 혼자 쓸쓸히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있는 건 나뿐이었다. 앉아 있는 자리에 못이라도 튀어나온 것처럼 불편했다.
출입문 쪽으로 백 번도 더 눈길을 돌렸고 들어오는 사람을 일일이 살폈지만 장동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종업원이 갖다준 보리차도 이제 바닥이 났다. 나 자신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부질없는 기대였다. 기대가 무너지면서 장동근 또한 그렇고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찰나였다. 출입문쪽에서는 장동근이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접촉사고가..."
평소 그의 어투대로 짤막하게 변명을 하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금방 전의 실망감은 금새 어디로 자취를 감추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동안 커다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장동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목소리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너무도 떨려서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뇌리 속에서만 그의 훤칠한 키, 귀공자처럼 맑은 얼굴이 떠오를 뿐이었다. 커피숍 바닥의 카펫의 무늬만 묵묵히 살펴보고 있었다.
"저∼ 주혜진씨 아시죠."
전혀 뜻밖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혜진은 나와는 여고동창사이였다. 일미터 칠십에 가까운 키에다 학교 다닐 적에는 전교에서도 예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뭇남학생들이 혜진이에게 집적거렸지만 도도한 혜진이는 무수한 남학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잘 아는 학교 선배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었다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친구 혜진이를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꺼냈을 때의 절망감이란… 참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락 좀 해 주시면 안될까요?"
예상했던 불길한 시나리오가 현실에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장동근, 이 남자도 언젠가의 그 선배처럼 혜진이를 소개시켜 달라기 위해 나와 만나자고 한 것이다. 울고 싶었지만 비참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 싫었다. 하는 수 없이 얼굴이 억지 웃음을 띠며 혜진이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고마워요. 혜진이 참 착하죠? 교회서 만났는데 얼굴도 참 예쁘고…"
그의 입에서 혜진이를 칭찬하는 말이 나왔을 때 또다시 한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 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설령 이 남자가 행여 나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보기 좋게 거절하리라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혜진이를 칭찬하는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예. 참 좋은 애죠. 성격도 좋구요."
그를 포기한 이후부터는 부끄럼이나 두려움 같은 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오기 같은게 목구멍 바로 밑에까지 차 올라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오히려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커피맛이 오늘처럼 쓰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다시 침묵만이 벌레들처럼 두 사람 사이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록음악이 귀청을 찌르며 소란스럽게 흘러 나왔다. 다시 십여 분이 자나자 출입문 쪽에 혜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느때처럼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얄밉게도 혜진이는 장동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얘. 요새 뭐 이런 순진남이 다 있는지 몰라. 순자 너 좋아한다고 나보고 얘기 좀 해달래. 여기서 만나기로 해 놓고 깜박해버렸어. 하기사 내가 니들 엑스트라 노릇하러 뭐하러 나오겠니. 자존심 구겨지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