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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한번 가보고 싶다는 안동마을 사람들(글/안병렬)

명년 봄 진달래 필 제 다시 오마 약속하였으므로 우리는 다시 안동마을 찾기로 하였다. 모두들 인상이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벌써 3월초부터 계획을 하였다. 처음엔 4월 16일에 가려고 연락을 하니 그때는 못자리 하느라 너무 바쁠 것 같다고 하여 한 주간을 더 늦추기로 하였다. 이 모든 연락은 의사와 간호과장이신 두 이 선생이 맡아 수고하셨다. 우리가 주선하고 그들을 모시고 가는 게 도리인데 도리어 그들이 더 열심이니 참 고마웠다.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예비 모임이 필요하여 간호과장 이 선생 댁에서 저녁을 준비한다고 하였다. 10여명이 넘게 모이었다. 대개 전번에 갔던 분들이었다. 모두들 반가웠다. 더러 그 동안에도 만나기야 하였지만 같은 목적으로 새로 만나니 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의논을 하였다. 의논은 간단히 끝났다. 이번에도 전번처럼 의료봉사를 위주로 하고 동민들 위로도 겸하며 아이들에게도 선물을 주기로 하였다. 말하자면 하루 동민들 잔치를 해드리자는 것이었다. 경비는 똑같이 회비를 내어 부담하기로 하고 내가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하여 장보기는 부인들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차는 민박사가 교섭하고 23일 오후 3시에 과기대에서 출발하여 3시반에 이 과장댁에 들르기로 하였다. 드디어 23일, 자고 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몸도 무척 피곤하였다. 왜 자꾸 요즘은 피곤한지 짜증이 났다. 푹 자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준비가 어떻게 되는가 하여 이과장에게 확인을 하니 다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더러 못 가는 사람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료팀이 다가니 무슨 걱정이랴? 다만 회비가 좀 더 돌아갈 뿐, 하지만 결코 그럴 리도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의 행사는 풍족하였으니까. 사실 출발하면서 헤아리니 일행은 아이둘을 빼고도 15명이라 회비는 넉넉하였다. 작년에 가셨던 분 가운데서 정형외과 강박사와 병리과의 정선생, 그리고 나의 내자와 과기대의 의사 이선생의 부인 등 넷이 빠진 대신 여섯 분이 더 참가하신 것이다.

처음 예상치 않았던 두 분, 과기대 한국어과의 소교수와 김교수, 그리고 미국서 오신 김선생 내외분 그리고 박선생의 부인과 임선생의 부인이 합세하신 것이다. 민박사는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신다고 웃으셨다.

출발은 예정시간보다 20여분 늦어졌다. 장보기한 짐을 실으러 박선생댁으로 가기로 하였는데 이게 잘못 전달되어 류경호텔 앞에서 기다리느라 좀 늦어진 것이다. l과장 집에서 모두 다 타게 되자, 노블 치과 임선생님의 인도로 기도하고 출발하였다. 차는 전번 것보다 더 좋았다. 넓이는 같으나 더 깨끗하였다. 그런데도 갚은 전번보다 200원이나 쌌다.

다시 만난 고향사람

비는 내릴 듯 말 듯 그야말로 이슬비요 가랑비였따. 그러나 차는 속력을 내지 못하였다. 5시반이 넘어서야 왕청에 도착하였다. 오늘 우리가 가서 자는 집의 주신 하씨를 만났다. 여기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애초에 4시쯤 도착하리라 하였는데 무척 기다렸을 것이다. 가는 도중 행여나 하여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반가워만 할 뿐 기다렸다는 말이 없었다. 기다림에 도가 트인 사람들, 그저 그러려니 할 것이었다.

하씨를 반갑게 만나 출발하려는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발생하였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느닷없이 기사가 연길 본사에서 전화가 왔으니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차는 연길에 본사가 있고 왕청에는 지사가 있어 지금 차가 머문 곳이 지사 앞이었다.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로 들어가니 길이 너무 멀므로 700원에는 못 간다고 연길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계약을 한 민박사가 전화를 받아 이런법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내니 왕청에서 조금 가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멀므로 안 된다고 하였다. 또 계약도 직접 한 게 아니라 다른 교수에게 부탁을 한 터이라 더 이상 어떻게 따질 수도 없었다. 당장 내리라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민박사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를 않았다. 결국 천워능ㄹ 주되 기사의 팁은 안 주기로 하고 결말을 지었다. 이러느라고 6시가 되어서야 왕청 그 사무실 앞에서 출발하였다. 길은 무척이나 험하였다. 도로 정비를 하느라 여기 저기 파헤친 데다 비가 온 탓인지 어떤 곳은 거의 차가 못 갈 형편이었다.

8시가 거의 되어서야 연변의 안동 마을, 태양촌에 도착하였다. 그 훈훈한 마음씨의 고향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반가워 덥썩덥썩 손을 잡았다. 어쩐지 따뜻한 온기가 가슴으로까지 스며왔다. 정성스러이 지은 밥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산채가 별미였다. 특히 소교수는 오랜만에 고향음식을 먹는다며 좋아하였다. 소교수는 원래가 민속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라 음식 하나에서도 다 족보를 찾는 것이었다. 오늘도 몸이 안좋아 못 오신다 하였으나 그 학구욕이 억지를 쓰게 하여 참여하신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서는 모두 피곤하다며 자고자 하였다. 작년에는 그래도 윷을 몇 판 놀고 잤는데 봄이 되어서 그런가 모두 피곤하다 하였다. 나 역시 피곤하였다. 장장 4시간을 덜커덩거리며 시달렸으니 어이 피곤하지 않으랴? 여자들은 그 집에서 자기로 하고 남자들은 그 옆 몇 집 떨어져 잤다. 널찍한 집에 주인 가족을 다 내보내고 우리들만 잤다. 나는 피로를 좀 푹 풀고자 구들목 가까이에 누웠는데 너무 더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바닥은 크게 뜨겁지 않은데도 자꾸 더 더워왔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옷을 다 벗었다. 그래도 안 되어 얇은 이불을 반쯤은 걷어차고 잤다. 얼마를 잤을까? 닭 울음에 잠이 깼다.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닭 울음은 무한한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아득히 어릴 적 농촌에 살 때 듣던 그 소리요 그 기분이라 꼭 옛날로 되돌아간 듯 아늑하였다.

처음에 이곳에 오니 산밖에 없더라

5시가 채 못 되어 모두들 일어났다. 등산을 가잔다. 동쪽 길을 따라가다 보니 한 집이 비어있는 듯 빗장이 쳐져 있었다. 소교수가 "저런 집은 얼마나 할까?"하였다.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내가 "연길에서 너무 멀어서 곤란하다"하니 소교수는 "그저 여기 사는거야"하였다. 이를 받아 김교수가 "소교수가 여기 살도록 과부를 하나 얻어 드리자"고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언중유골이라 2년 전인가 사모님을 잃으신 소교수의 마음을 찌른 게 아닌가 저어하였다.

동녘 산으로 조금 오르니 넓은 발이 펼쳐져 있었다. 산을 개간한 것이었다. 처음 이민들이 여기 들어오니 산밖에 없더라고 하였으니 이 밭들도 순전히 이 동민들에 의해 개간된 것이리라. 되돌아보니 동네가 자욱히 연기에 잠기고 있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더없이 정겨웠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고 아득한 옛날 어릴 적의 고향으로 우리를 끌어갔다.

이 정겨운 광경을 내려다 보다 소교수가 나를 보고 "안교수, 시 한수가 나와야겠네. 두보 같이 말야."하였다. 이에 어느새 왔는지 의사이신 이선생이 벌써 여러 편 나왔다고 하였다. 소교수는 내 전공이 한문학이라 두보 같이 한시 한 수를 지으라 말하는 것 같은데 이선생은 전번에 내가 읊조린 시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교수는 "그래요?"하고 다그쳤으나 나는 내심 좀 부끄러웠다. 사실 이런 때는 한시가 더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속으로 흥얼거려 보았다.

중국안동촌 중국의 안동 마을
조조가가연 이른 아침 집집마다 연기더라
정경관타방 정겨운 풍경 타국에서 보노라니
유년시역연 이런 시절 또한 그대로더라.

평측이 좀 맞지를 않으나 굳이 신경 써 고치고 싶지도 않아 그대로 두었다. 창(唱)을 하지 못하는 오늘날에 평측을 따져 무엇하랴?

정말 아늑한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옛날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 정겨운 풍경을 담으려 김교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이를 보던 임선생님은 카메라를 가지러 되돌아가시고 우리는 산을 올랐다. 예상외로 길이 넓었다. 아마 나무하러 갈 때 소나 경운기 같은 걸 이용하려고 넓게 닦은 모양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그 산을 다 못 오를 것 같아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왔다. 다시 보아도 동네는 부촌이었다. 초가가 몇 채 안 보였다. 그리고 동네 안 골목길들도 똑바르고 시원하게 뚫여져 있어 골목길에도 버스가 마음대로 드나들게 되어 있었다. 한국의 농촌보다 더 정제되어 있었다.

연변 안동마을 교회

산에서 내려오니 부인들이 아까의 그 빈집 마당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들어가니 그 빈집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었다. 이분들 모두가 기독교인인지라 역시 교회에 관심이 많아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와서들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집사라는 분이 교회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마 전 왕청의 모 장로님이 이 빈집을 아주 헐값에 사서 교회로 쓰라고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국에서 교회비준도 받았다고 하였다. 교회의 비준은 어렵다고 들었던 터이라 어떻게 그리 쉽게 되었는지 그 장로란 분의 능력이 돋보였다.

60대 가까워 보이는 집사님은 이제 비준도 나왔고 부지도 마련되었으니 빨리 새로 집을 짓는 일이 급하다고 하였다. 얼마나 드느냐고 하니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 5만원은 넘어야 된다고 하였다. 한국 돈으로야 650만원 정도의 적은 금액일지 몰라도 이 집을 2천원(한화260만원)에 매입하였음을 감안하면 턱없이 비싼 금액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도와주지도 못할 사람이 공연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집 짓는 일만 남았다고 하는 말속에는 이 일을 좀 도와달라는 뜻이 포함된 듯하여 더욱 말을 아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순진한 분들에게 말을 쉽게 함으로써 어떤 기대감을 불어넣어 이들로 하여금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을 갖게 만들지 않았던가?

나는 묵묵히 물러 나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이분들에게는 건물이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만한 집만 하여도 얼마든 모이련만 왜 굳이 집을 지으려 비굴한 웃음을 보이는지 조금은 딱하였다. 그 비굴함을 가지고야 어찌 올바른 교회를 이룩할 수가 있을까? 남의 장로님으로부터 대지를 얻고 또 한국사람에게 손벌려 집 지으면 도대체 자기들은 무얼 하겠다는 건가? 그저 "우리는 힘이 없어요."하고 엎드려 있으면 언제 그 허리가 펴지랴? 물론 이 집보다야 큰 기와집 번듯하게 짓고 십자가 높이 달면 훨씬 좋겠지. 그러나 거기 사람이 없으면 무얼하며 또 설사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남의 손만 들여다보는 사람으로서야 어찌 교회 구실을 제대로 하겠는가? 예수님은 평생에 예배당 한 채 짓지 않았다. 바울도 그러했다. 남의 집 아무 데나 빌어 썼다. 어찌 건물을 앞세우려 하는가? 이 역시 물신(物神)에게 사로잡힌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러나 이 사고방식이 이들 뿐이랴? 한국 교회가 오히려 더 심하리라.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며 또 조금 얻어들으니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집이 번듯해야 사람이 모이고 또 아직 봉사의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사회 현실에서 그들이 자기 교회 자기가 짓겠다는 의식 갖기를 기다림은 너무 요원하다는 것이다. 우선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불러와서 가르쳐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피동적인 사람이라도 우선은 모아서 주동적이요 적극적인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태양촌은 교인이 얼마 모이지도 않은데다 겨우 일 이년 다닌 초신자라 전혀 봉사를 기대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 또한 일리는 있었다. 어쩌면 내 논리가 너무 이상적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나는 이번 기간 내내 이 문제에 집념하느라 다른 아무런 것에도 흥취를 못 가졌다.

더구나 농장을 하시는 박선생이 식사 자리에서 정식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래도 한국 사람이 이 마을에 들락거린다면 무언가 마을에 도움이 되고 남들이 무언가 눈에 뜨이게 달라진 점을 보여야지 이런 일회용 식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며넛 안교수는 좀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네가 주선하니 네가 책임지고 좀 깊이 성찰하라는 다그침 같아 더욱 괴로웠다.

이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하노라니 단순히 교회 하나에만 머무를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이 봉사라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근본적으로 따져보아야만 될 것 같았다. 의료 봉사만 해도 그랬다. 기껏 일 년에 한 두 번 와서 이렇게 봉사하고 가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 하는 회의가 들었다. 또 동네 잔치도 이렇게 잠깐 하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도움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이 둔한 머리에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랴? 부득이 나는 박선생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그래서인가? 박선생은 자기의 생각을 조금 펼치었다. 농업 전문가가 여기와서 살면서 소득을 올리는 법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예로 인삼 재배를 꼽았다. 우선 물류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이다. 중국 인삼이라 가격이 비록 싸긴해도 그래도 대신 인건비가 싸니까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나는 속으로 내 능력의 범위 밖이라 손을 들었다. 내가 무얼 아는 게 있단 말인가? 나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건 박선생니므이 몫이오."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손을 들었다 하여 내 마음이 어찌 편하랴? 더 답답하였다.

좀 어떻게 이 마을을 근본적으로 도와줄 수는 정말 없을까? 농번기 몇 달을 제하고는 전혀 일이 없는 이들, 아무리 농사를 지어야 쌀 한 근에 1월도 못 받아서 애 하나 중학교 보내기도 힘든 이들, 남들은 한국에가서 떼돈을 번다는데 정작 자기들은 이야기만 들을 뿐 갈 엄두도 못내보는 이들, 앞길이 막막한 가운데 술과 담배, 그리고 도박에 찌들어 가는 이들, 이들을 좀 근본적으로 도울 방법은 정말 없을까? 생각할수록 내 아둔한 머리만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죽기전에 고향한번 가봤으면…

이 문제로 인하여 나는 종일 괴로웠다. 의료 봉사하는 데를 가서도, 아이들 놀이하는데를 가서도 즐겁지가 않았다. "이게 무슨 보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늘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내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는 웃으며 노인들과 윷판을 벌였다. 윷은 역시 즐거운 놀이였다. 모두들 70이 넘은 듯한 노인들이 신나게 윷을 던지며 즐기었다. 이때 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였다. 문득 지난번에 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하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죽기 전에 고향 한번 갔으면"

그렇다. 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죽기 전에 고향 구경"을 하는 것이다 이 문제 역시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안동의 여러분에게 부탁하면 더러 선한 손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우선 시장님께 편지를 보내 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충청도 청주 사람이 모여 사는 도문의 정암촌에는 청원 군수까지 다녀가서 선물도 하고 초청도 한다는데 우리 안동이라고 그 인심이야, 더구나 손님 청하는 인심이야 어찌 다른 고을에 뒤지랴? 돌아가면 곧 편지를 쓰며 이 일을 추진하리라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좀 평안하였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노는 모습도 귀엽고 마을 분들의 즐거운 모습도 전해져 왔다. 고마워하는 촌장님의 손을 붙잡고 "우리 다 한 형제가 아니요? 우리가 좀 사는게 나으니 조금 나누어 먹는 것뿐인데 뭐 그리 고마워할 게 있어요?"할만큼 여유도 생겼다.

이윽고 진료도 마치고 아이들 놀이도 끝났다. 작년보다 환자는 적고 아이들은 더 많았다. 환자는 농번기라 아무래도 적은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전교생 26명이 다 왔다고 하며 선생님까지 한 분 오셨다. 참 고마우신 여선생님이셨다. 이 분은 작년에도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모든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온 동민과 다 같이 먹는데 젊은 분들은 미안해서 그런지 아니면 바빠서 그런지 몇 사람 오지 않았다. 그래 신명은 좀 덜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노인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난도 같이 즐겁고 보람을 느끼었다. 그러면서 이분들을 어떻게는 고향 구경을 시켜드려야겠다고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하였다.

점심을 마치니 곧 버스가 왔다. 그런데 또 전 번처럼 이 마을의 쌀을 팔아드리기로 하였다. 신청을 받아 찹쌀 300근, 멥쌀 100근을 구입하였다. 모두들 가족이 몇 사람되지 않으니 쌀을 뭐 많이 먹으랴마는 그래도 좀 팔아 드리려 주문한 것이다. 출발에 앞서 나는 이 돈을 거두느라 또 한참 부산하였다. 그런데 촌장이 오더니 너무 고마운데 대접할 것이 없어 부득이 쌀 100근을 실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정을 그대로 받기로 하였다.

온 마을 분들의 전송을 받으며 오후 1시 출발하였다. 나는 간단히 결산 보고를 하고 협력해 주심을 감사하였다. 예산은 조금 남아 이 다음 또 이런 일에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주시는 이 쌀을 어떻게 처분할까를 물었다. 모두들 피곤한지 말이 없었다. 부득이 내가 "오늘 저녁 식사를 이과장 집에서 준비하셨다는데 그럼 이 쌀을 저녁 갋으로 드리자"고 하니 모두들 웃으며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녁 준비를 한 이과장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나는 쌀 문제가 찝찝하였다. 정말 이과장 댁에 드린다면 정성들여 준비한 이과장의 호의가 무색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해도 또 달리 묘안이 엇었다. 그때 이과장이 이 쌀을 가다가 고아원인 "사랑의 집"에 주자고 하였다.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차은 사랑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 쌀을 낑낑거리며 내려다 주었다. 별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뿌듯하였다.
과기대로 가서 의료장비를 내려다 주고 이과장댁에서 저녁을 먹고 5시가 넘어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노인들의 한국 초청이라는 무거운 짐이 매어져 있어 무거웠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