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분신술(글/김윤한)
도대체 몇 시나 되었을까? 아직 사방은 깜깜한데 누군가 급하게 밀창문을 두드렸다. 오른쪽에는 신혼의 아내가 곤히 자고 있었고 왼쪽에는 장 시인이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불을 켤까 하다가 괜히 곤히 잠든 사람들을 깨울까 싶어서 대충 운동복을 꿰어 입고는 문 앞에 잠든 장 시인을 타 넘어 밀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인집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라 하지만 젊어서 청상이 된 채 홀로 산 지가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고 벌써 나이도 오십 다섯이나 되는 초로의 아낙이었다. 희미한 달빛에 시계를 비추어 보았다. 새벽 세 시에 세 들어 사는 젊은 남자를 깨운 건 도대체 무슨 연유에설까? 푸르고 희미한 달빛에도 아주머니의 주름살이 선명하게 보였다.
"파출소서 전화 왔심더"
더욱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970년대 말, 우리는 시골 어느 마을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아직 모든 것이 어려울 때인지라 마을에는 전화 있는 집이 몇 집 되지 않았고,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은 전화가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네로 자주 전화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심조심 주인집 부엌을 통해 안방에 놓여진 전화를 받곤 했다. 그때마다 괜히 죄인처럼 목 뒷덜미가 쭈뼛했다.
"무슨 일인데요"
"모르겠심더 무슨 일인지, 급한 일이겠지요. 이 새벽에 전화하는 거 보면..."
내 자신이 전화를 한 건 아니지만 내게 온 전화 때문에 아주머니의 새벽잠을 깨운 데 대해 괜스레 미안하기가 그지 없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 바꿨슴다. 무슨 일인껴?"
"무슨 일이고 뭐고 빨리 일루 와 보이소. 급합니더."
파출소 순경은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도 없이 걸걸하고 큰 목소리로 '빨리 와 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날씨가 제법 춥기는 했지만 급하다는 말에 대충 걸쳐 입은 운동복 그대로 파출소로 향했다.
파출소로 가면서도 궁금증은 더욱 더 깊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쁜 짓이라고는 모르고 산 내게, 그것도 새벽 세 시에 호출이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룻이었다. 혹시 내가 도둑이나 아니면 다른 나쁜 누명을 쓰게 된 것은 아닐까? 국민학교 앞 담장을 따라 급한 걸음으로 파출소로 향했다. 사방은 아직 칠흑같은 어둠에 싸여 있고 멀리서 때 이른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달이 머리 위에서 묵묵히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장길동 시인이 내게 찾아온 것은 어제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서였다. 워낙 오래간만에 찾아온 지라 앞 뒤 가릴 것 없이 우선 반갑기만 했고 둘은 시골 장터 근처 대포집으로 향했다.
마침 예비군 훈련 날인지 옆자리 주탁에는 터벅머리를 한 예비군 서넛이서 엠원 소총을 벽에 기대어 둔 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장길동 시인은 나와는 참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스무 살 적인가 내가 시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였다.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 장 시인은 당시에도 지방 문단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졌던 터라 내가 쓴 시를 보고 조언도 많이 해 주었고 결국에는 그가 주축 맴버이기도 한 '시마당' 동인으로 나를 가입시켜 주기도 했었다.
둘은 그 동안 못다한 문학 이야기며 문단 주변 이야기들을 쉴새없이 나눴다. 아니 나눴다기 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듣는 쪽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는 쉴 새 없이 부어라 마셔라를 되풀이했다.
"인제 그만 하이소. 나도 잠좀 자야지예."
대폿집 아주머니의 몇 번에 걸친 성화에도 끄덕없이 소주를 마셔댔던 두 사람은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인 바암 지새애우고……"
두 사람은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당시 운동권에서 부르던 노래라고 금지곡으로 분류했던 '아침이슬' 노래를 합창하며 비틀비틀 내 신혼 셋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어디 여인숙 하나 없었던 시골 면소재지라 장 시인을 딴 데 재울 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으로 데려 왔지만 신혼집이라 방 하나 부엌 하나가 고작인 터라 데려 오기는 했지만 우선 당장에 잠자리가 문제였다.
"괜찮심다. 우리 마누라하고 함께 자지 뭐요. 들어가입시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장 시인을 방으로 확 밀어 넣었다. 그런 만용을 부린 데는 시를 쓴답시고 부리는 객기 같은 것도 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잠자리 배치는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아무리 나와 친한 장 시인이라지만 아내의 옆자리에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궁리 끝에 중간에는 내가, 맨 안쪽에는 아내가, 그리고 장 시인은 내 왼쪽 문 앞에 자도록 자리를 정했다. 그리고는 마다하는 장 시인을 끌어 눕히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를 그렇게 정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중간에 자게 된 것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고, 아내를 문 쪽이 아닌 안쪽에 재우게 된 것은 장 시인이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가다가 혹시나 그의 발끝이 아내의 몸에 닿지나 않을까 하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술에 취하긴 했다지만 어제 저녁에 일어난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새벽에 파출소에서 호출이라니, 아무리 독재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술 취한 채 금지곡 '아침이슬'을 불렀대서 파출소에서 나를 부를리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저 멀리서 파출소 앞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지나는 농협 건물 앞에서는 예비군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지키고 서 있었다. 예비군 몇몇이서 손전등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새벽에 시골에서 잠 안자고 돌아다닐 미친놈이 누가 있다고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건지 픽 웃음이 돌았다.
"손들엇."
어렵쇼. 낯선 예비군 하나가 엠원 소총을 내 앞으로 겨눈 채 소리를 냅다 질렀다. 순간 웃음이 싹 가셨다. 나도 모르게 양손이 어깨위로 올려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김병영 씨 아이니껴?"
업무 때문에 나와 안면이 몇 차례 있는 예비군 하나가 산적같은 수염 사이로 흰 앞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어 다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놓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농협 건물에서 파출소까지는 불과 이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예비군들은 이 초소가 파출소에서 워낙 가까운 탓에 게으름을 피우지도 못하고 이렇게 원칙대로 근무를 서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예비군 대간첩작전 훈련에 참가해 봤지만 이 시간이 되면 일부 예비군은 술에 곤드레가 되기가 일쑤였고 가까운 민가 뒷방에 들어가 자거나 총을 잃어버리는 예비군도 허다한 실정이었다. 어쨌든 아는 예비군 땜에 부끄러운 일은 면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파출소 쪽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파출소 앞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몇 발자국 더 나가자 그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와는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가 워낙 특이했다. 흔히 새색시가 걸음을 걷듯이 걸을 때마다 발끝 앞쪽이 안으로 모아지는 그런 걸음걸이였다.
"빨리 안 오고 뭐하능교?"
고향이 대구 어디라고 했던가. 박순경은 말끝마다 '∼능교?'를 넣어 내게 물었다. 어투로 보아 그것은 사실 따지거나 몰아세우는 투에 가까웠다.
"수고하시네요. 무슨 일인데요?"
"말도 마이소. 장길동이란 사람 아능교?"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또 말끝에 '능교?'를 넣어 내게 물었다. 어투로 보아 그것은 사실 따지거나 몰아세우는 투에 가까웠다.
"왜요, 우리 집에서 지금 한창 자고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능교? 그 사람 지금 파출소 있다 아잉교?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는지, 파출소장 볼때기를 안 때리나, 걸상을 안 집어던지나. 말도 마이소. 빨리 갑시다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내 옆자리에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소리도 없이 자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분명히 봤는데 지금 파출소에서 또 소란을 피웠다니, 그럼 장길동 시인이 홍길동처럼 분신술을 했단 말인가?
그러나 파출소 삐걱거리는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거기에는 장길동 시인이 술에 취한 채 인사불성이 된 채로 술 주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또 하나의 장길동 시인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요. 당장 본서로 넘길라다가 특별히 봐 주는 거이까 빨리 데리고 가소마."
파출소 차석이 특유의 큰 눈을 부릅뜨며 호령조로 이야기했다. 파출소장과 순경들에게 머리 숙여 백배 사죄를 하고 장 시인을 부축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도는 길에도 새벽달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내는 그때까지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전등을 켰다. 장 시인이 누웠던 문 앞쪽에는 사람은 어디로 가고 두꺼운 이불만 동그랗게 덮여져 있었다.
파출소에서 들은 이야기와 홍길동, 아니 장길동 시인의 말을 종합하면 사건의 자초지종은 대강 이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 시인이 신혼부부가 자는 틈에 함께 잘 수는 없더라는 것,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가 구멍가게에서 술을 사들고 마시다가 보니 엄청나게 취했고, 그 길로 백 킬로미터도 넘는 자기 집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새벽 두 시경에 A시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다 훈련 중인 예비군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파출소로 넘겨졌고 우리의 장 시인은 그 소란을 피웠던 것, 장하다 장시인이여. 용감하다 우리의 향토예비군이여.<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