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새해 처음 떠오르는 해에 이벤트 행사를 가미한 해맞이 관광행사가 축제의 도를 넘어 지역별로 경쟁적으로 치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온 나라가 교통 지옥의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틈새를 이용한 상혼(商魂) 등으로 떠들썩하고 짜증스러운 모양새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해맞이에 그렇게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던가. 이것은 분명 민족정서의 변화요, 새로운 세시풍속도라 아니할 수 없다. 오히려 필자와 같은 기성세대들의 마음과 뇌리에는 해보다 달에 대한 정서로 꽉 차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월 대보름, 팔월 한가위 등 24절기는 달의 태음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양사상 또한 둥근달을 묘사해 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가.
달(月).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바라만 보아도 마음과 혼이 온통 달속에 빠져들어 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러하기에 달은 수많은 시와 노래, 그리고 전설과 사연을 담고 변함없이 떠있는 것이 아닌가.
어릴적 소꼽놀이하며 즐겨부르던 "달 달 무슨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하는 동요나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는 둘만 모여도 어김없이 부르던 동심어린 노래다. 또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로 시작해 세시를 노래화한 것부터 한여름 밤하늘 아래 마당에 멍석깔고 보채는 아기를 재우기 위해 어머니가 자장가 삼아 불러주던 노래에도 달은 등장한다. 심지어 "저 달보고 물어본다. 님 계신 곳을…"의 트로트도 있다.
이러한 노래가사는 물론이고 남녀의 사랑도 달 밝은 물레방아간 밑이나 오솔길 돌담 밑에서 이루어지고, 대청마루에서 달을 벗삼아 밤 새워 마시던 막걸리는 지나온 우리네 인생살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는 선대 때부터 우리 민족이 달과 더불어 웃고 즐기고, 마시고 탄식하며, 호흡하고 살아온 달의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달을 숭상하고 그리워하기에 자연스럽게 새해 첫 둥근달을 맞이하는 풍성한 세시풍속이 갖가지로 행해졌던 것 같다. 내 어릴적에는 정월대보름 달맞이를 위해 며칠 전부터 가슴 설레며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달을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보기 위해 앞다퉈 산등성이와 산 정상에 기어오르던 일. 시집 장가 갈 나이 찬 처녀 총각들은 처음 달을 보는 사람이 시집 장가 먼저 간다는 말 때문에도 다투어 산을 기어오르곤 했다. 특히 혼기가 찬 처녀들은 더욱 앙탈하는 모습들이었다.
초저녁부터 산 정상에 마른나무를 모아놓고 그 위에 푸른 솔가지를 덮어두고 기다리다 달이 떠오르면 불을 지펴 태우면서 뿌연 연기와 찬연한 불꽃과 함께 거푸지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달집태우기'가 시작된다. 이때가 되면 환호성을 지르고 각자 소원을 빌며 한해의 액운을 허공속에 날리는 축제의 한마당이 된다.
달이 중천에 이르면 3∼4일전부터 준비해 둔 깡통에 불을 담아 원형 또는 8자로 돌리는 깡통놀이나 두루마리 횃불놀이로 세를 과시하면서 이웃마을 아이들에게 전의(戰意)를 돋구었다. 청년들과 합세하여 밀고 쫓기는 횃불전쟁놀이가 밤 새워 이어지다 힘이 모자라면 때에 따라 이웃마을 주민들에게 원군을 청하여 도움을 받는 협동운동도 하였다.
밤을 새워 놀이 아닌 전쟁을 치루면서 달맞이와 더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적의 침공에 대비한 예비훈련(?)을 하던 것이 내 어릴적 대보름 풍습이었다.
이를 즐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사이 세월이 흘러 풍속도마저 바뀌고 이젠 황혼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세월이 무상이라 서글픔에 목이 메인다.
해가 양(陽)이라면 달은 음(陰)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조들은 달과 여인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믿어왔다.
외부 출입을 삼가했던 여인들도 대보름달이 뜨는 밤만큼은 다리밟기를 했다. '직성풀이'라 하여 밖으로 내쫓아 달의 정기를 흡인케 했다. 처녀들에게 산에 올라 첫 둥근달을 맞이하도록 하던 세시풍속은 어쩌면 여자의 생체리듬이 달의 주기와 같이하는 것도 창조주의 조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날 달과 연관지어 지지 않으면 시도 노래도 사랑도 탄식도 할 수 없었던 생활의 친우가 우리 곁에서 떠나가고 있는 서글픔을 맞이하고 있다.
첨단과학의 발달로 풍요로움을 더해가는 우리의 생활상, 나라별로 달리하는 정치적, 경제적 힘과 부(富)는 민족의 정서와 풍속, 그리고 습관·사고마저도 바꿔놓는 마력을 지녔다. 노도같이 밀려오는 외세의 현실 때문에 모든 가치의 기준 또한 서구화되어 가는 듯 하다.
키는 장대같이 커야 하고, 코도 우뚝 솟아야 하며, 머리카락은 노랗게 물들이고, 눈은 푸르러야 하듯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의식주의 행태에서부터 생각과 미(美)의 기준마저 우리의 모든 것이 서구일변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이쯤되고 보니 달을 그리워하고 달을 노래하며 달과 같이 풍요로와지고 한가롭던 우리 마음, 소박하던 민족정서가 이제 태양을 노래하고 태양을 맞이하는 행사로 바뀌고 있으니 달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왠지 씁쓸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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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달맞이(글/김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