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 세상과의 인연을 줍는 시인, 강인순씨(글/임종교)
시간이 날때마다 가방을 들춰서 감질나게 아껴 읽던 시집 한권쯤은 있을테고 밤새 수없이 많은 종이를 구겨가며 연애편지를 썼던 기억도 누구나 한번씩은 다 있을 것이다. 자판을 두드려서 마우스만 한번 누르면 상대방의 컴퓨터로 휭 날아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컴퓨터 세대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사이버 문학방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좀더 방대한 양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는 하나 난 그것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왠지 부대끼면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정리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술 한잔 걸치고 객기 한번 부릴 수 없으니… 인생의 절절한 얘기또한 별로 묻어나올 것 같지 않다. 순전히 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벤처나 컴퓨터가 앞에 들어가지 않은 직업은 뭐 별볼일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이고 보니 사실은 문학을 얘기하고 문학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감동을 줄지, 아니 관심이라도 끌 수 있을지 글을 시작하면서도 소침해지고 별로 힘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아직 시 한줄에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 영혼이 맑은 사람이 많다고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다.
오늘 소개한 문화예술인은 시인 강인순씨이다. 그리고 그는 시조를 쓰고 있다. 시조 시인들은 그동안 문화예술인을 통해 몇 번 소개한 바 있다. 조영일, 권오신, 권혁모,정광영, 이동백, 박영교씨 등이 시조를 쓰고 있는데 이들은 시조동인 오늘의 회원들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우리 가락 위에다 자신들의 독특한 세계를 얹어놓으며(얹어놓는다는 표현이 쉬운 글쓰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다는 말로 해석해주면 좋겠다) 부단히들 노력하고 있는 모임이다. 그래서인지 시인들마다 자신들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강인순씨의 작품세계의 특징적인 면을 미리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에 모티브를 따와 작품화 한다는 점이다. 그 얘기는 차차 얘기하도록 하자.
국어교사와 시인
그는 학생들에게 국어를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85년 대학원을 하면서 그해 11월 [시조문학]현상 공모에서 당당히 장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문단에까지 말을 들여놓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에게 문학작품을 가르칠 때마다 내가 직접 글쓰는 사람이라면 훨씬 가르치기가 쉽지 않겠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이 등단까지 하게 되었지요. 실제로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교과서에 김종길, 박재삼, 김상옥, 정완영 선생같은 현존하는 시인들의 시가 나오면 시의 해석에 있어서도 직접 여쭤서 생생하게 들은 걸 그대로 전해줄 수 있으니 아이들이 받아들이기도 쉽고, 시인과 관계된 여러 뒷 이야기들을 해주면 시를 이해하는 게 더 폭넓어지는 것 같고요"
교사로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한 것도 이유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내재된 욕구의 분출이라고 봐야 더 정확할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부터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글쓰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안동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문예반 활동도 했었다. 이젠 들어보긴 힘든 그야말로 문학소년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문학과 가까워지는데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신 것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아버님이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초등학교, 중학교때 문학관계 책들을 집에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 덕분에 어릴때부터 책과 친해질 기회도 많았고…"
그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클럽활동을 해도 주로 컴퓨터반이나 축구반으로 몰린다고 한다. 독서량도 얼마 안되고 영상매체에 빠져들어 한곳에 앉아 오랫동안 지긋이 하는 일을 무척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문예반으로 들어오는 학생이 거의 없다고 한다. 경일고등학교 출신으로 현재 참꽃문학회와 글밭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 안상학씨와 김윤한씨가 다니던 80년대 초반이 문예부의 전성기였다고 귀뜸해주신다. 한 이십년 전인데 이렇게 달라졌다.
설화속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뜬금없이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85년 강인순씨가 [시조문학] 현상공모에 장원으로 당선되어 등단한 작품이 바로 이 서동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서동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슬픈역사들을/반추하는 해빙의 들판 /들꽃 씨 눈 틔우며 사랑은 시작되고 /그토록 뜨겁던 노래 /별이 되어 빛난다/ 서동, 떠나간 뒤 모든 것은 몸짓부터 / 내 천한 몸뚱이로/ 애증을 연출한다./우리의 선화공주는 매일처럼 꽃이 되고// 이제 때묻은 길목/ 순정은 방황의 끝/ 무기 짙은 꽃이파리 바람에 떨고 있고/ 이 밤도 우리의 서동/인연 하나 줍고 있다.
당시 심사평에서 백수 정완영 선생은 "역사 의식이 뿌리내린 그 주제부터 눈길을 끌었다. 자칫하면 관념에 갇혀버릴 가능성이 큰 소재를 자기 체험으로 육화시킨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신선도가 높은 당당한 작품으로 첫발을 내딛는 이 시인에게 거는 우리 심사위원의 기대는 크다"며 그에게 거는 기대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서동이후'외에도 초기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들이 여럿된다. 80년대 초부터 90년까지 10여년동안 쓴 작품들을 묶은 첫 시집 {서동이후}에 보면 그러한 경향이 자주 발견된다.
이렇게 그가 역사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설화들 속에서 시의 모티브를 찾게 된 건 85년 대학원에서 삼국유사를 공부하면서부터다.
"삼국유사 공부하면서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신화 같이 옛날 우리 신화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서동이후' 연작시 4편이 나왔고, '처용의 아내' '허균의 붓길' '황진이' '청령포에서' '직위에게' '사금파리를 위하여'라는 시들이 속속 나오게 된 것이다.
그의 첫 시집 {서동이후}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 말고도 그의 또다른 관심을 드러내주는 작품들이 있다. '생수에 관한 명상'에서 보이듯이 환경문제나, 자연물을 통해 비춰지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거나 자신의 삶의 주변의 얘기들을 담은 시들이 그것들이다.
'서동이후'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 그는 바로 이듬해 8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강가에서'라는 작품을 보내게 된다. 최종심까지 올라갔다가 아깝게 떨어진 적이 있다.
강물은 종일토록 낮은 곳을 흘렀다/ 우리들 잠 속으로 야윈 몸 쓰다듬으며/ 차고도 넘치는 잔에 숨을 죽여 흘렀다// 다가서 귀 대이면 숱한 상류의 얘기/ 미움도 눈물마저도/물이끼 잦아질 때/ 물살은 소용돌이져 풀꽃들을 뉘였다.// 바다는 아직 멀고 안개 자욱한 강둑/ 흐름이 그리움처럼 먼 하구를 찾아갈 때/ 갈증에 타는 계절은 시린 강물을 퍼담는다.//
문학단체일에 적극적으로
개학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분위기가 돌 때쯤에 그를 찾았었다. 학교에서는 바로 이 3월이 제일 분주할때다. 올해는 학교에서 연구소장를 맡게 되어 그 주변또한 어수선해보였다. 무엇보다 생활에 바쁘게 되면 그만큼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이 적기 마련이다. 되도록 자기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기 마련일텐데 작품활동 못지 않게 문학단체에서 공헌한 바도 크다.
89년도에 현재 한겨레시읽기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안개시 낭송회'를 만들어 실내악 연주와 함께 시낭송회를 열기도 했다. '안개시 낭송회'는 3년여를 유지하다가 재정적인 문제로 없어졌다. 96년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장을 하면서 각종 문학답사와 육사어린이백일장, 초청문학강연회를 열었고, 근 8년여동안 문학단체 일에 몸담았다.
안동문학에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오늘 시조동인으로 활동하는 외에 한국시조시인협회와 문협 경북지회 사무국장을 맡아 경북 문단의 문학 활성화를 위하여 상당한 공적을 쌓았다."
낮은 소리로 말하기
작품에 대해서도 욕심은 많다. '서동이후'나 '생수에 관한 명상'에 뒤이은 다른 소재의 연작시도 계속 쓰고 싶고,시에 갖는 열정이 식기전에 사설시조도 써보고 싶어했다. 연작시에서 보여지는 끈질김이나 몰입, 사설시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번 제대로 토해내보고 싶기도 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그는 삶과 직결된 현실 참여적인 시조를 쓰겠다고 했다. 조금더 세상에 관심을 갖고 그것과의 인연을 적극적으로 맺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계속적으로 써 나갈 예정이고, IMF나 실직자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들에도 집중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또한 조용한 목소리를 낼 작정인 것 같았다.
"강하게 이슈를 제시하거나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정을 밑바탕에 깔고 서정을 통해 표현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에게 여성성이 강하다고 하는 말도 아마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90년대 초반부터 써온 시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다. 곧 제 2시집을 발간할 예정이지만 올해들어 한편도 쓰지 못했다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바쁜 생활을 다시 한번 토로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다지 조급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취재하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강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불처럼 일어나는 사람이 아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람이었다. 작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 낮지만 높은 소리를 추앙하지 않고 낮은 소리로 똑똑히 말하는 사람, 내가 그에게서 받은 건 그런 것이다. 시는 적어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불끈 일어나는 구호성 언어가 아니라 한번 빙둘러 곱씹을 때마다 다른 맛을 내는 그런 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감질나게 꺼내 읽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강인순씨를 소개하면서, {서동이후}라는 시집을 읽고 바로 세상과의 인연을 줍는 시인이라는 제목을 먼저 달았다. 개인적으로 '서동이후'에 나오는 인연 하나 줍고 있다는 시구가 맘에 들기도 했지만, 그는 삶의 하나하나 것에 인연을 맺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적극적인 인연줍기가 하나하나 시로 건져올려 질 때를 기다려보자. 그리고 이건 그의 제 2시집에 대한 홍보라고 해둬도 좋을 듯 하다.<안동>
임 종 교(편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