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쾌청한 희망으로 시작하는 2000학번 신입생 김려경양(글/이광수)
요즘 려경인 대학 초년생이 느끼게 되는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 그 안에서 조금씩 비집고 나오는 갖가지 고민들로 바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인연으로 만난 친구들과 '동기사랑'을 외치기도 하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동아리를 찾으려고 학생회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스스로 '방향치'라고 부르면서 복잡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강의실을 바삐 찾아다니기도 한다.
{안동}지로부터 받은 청탁서의 머릿글에 쓰인 건 "제주에서 봄소식을 날라 온 신입생"이었다.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주인공이 되든 '제주의 봄소식'처럼 작위적인 의미 부여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만나보고 싶을 따름인 졸자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건 그 신입생과의 첫 대면 직후부터였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려경(20, 안동대학교 국학부 1학년)이라는 신입생에게서 화창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던 그간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남이 끝나갈 즈음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 얘기를 시작하려한다. 곤혹스러움으로부터 쾌청한 희망으로 바꾸어 놓은 이 신입생의 이야기를.
섬에서 섬으로 옮겨다니던 시절
어르신들이 들으신다면 혀를 끌끌 차실 얘기겠지만 려경이 살아낸 20년은 결코 만만찮은 시간이었다. 려경은 1981년 3월 김덕홍씨(45)와 김근자씨(43)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출산 예정보다 한달이나 빨리 태어난 그는 체구도 작고 몸도 약했다. 려경의 어머니는 출산 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틀림없는 아들이라는 얘기를 셀 수 없이 들었고, 첫째도 딸이었던지라 려경이가 막상 태어나자 부모님의 실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허약하던 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런지 걱정스런 마음이 더 컸고, 그 걱정은 큰 어려움 없이 첫돌을 넘기는데 힘이 되었다.
해녀이신 어머니께서 두 딸을 키우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언니만 데리고 거제도에 살았고, 3살 되는 해까지 려경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때문인지 이 때는 어머니를 봐도 울고 피하려고만 하는 딸을 보면서 많이 섭섭해하셨다고 한다. 딱히 돌봐 줄 사람이 없어 할머니는 늘 업고 밭일을 하셨는데 그 때문에 손과 발에 심한 동상을 앓게 되었다. 절단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던 병원을 뒤로하고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말똥을 발라보기도 하고 마늘을 써 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에 가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계신 고모할머니께 보낼 계획도 있었지만 고모할머니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고 도망을 가는 려경이를 결국 보낼 수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겨울만 되면 찾아오던 려경의 동상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절로 낳았다. 당시는 힘들더라도 직접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부모님과 처음으로 네 식구가 함께 살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길지 못했다. 친구들과 친해질 만 하면 이사를 해야했고 섬에서 섬으로 옮겨다녔다. 욕지도에서 8살까지 살다가 전학을 해서 4학년까지 노대도로, 다시 욕지도로 옮겼으나 일년이 못 되어 통영시로 나가게 되었다.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을 요량으로 아파트를 장만해서 정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지 20일만에 죽었고, 많이 힘겨워하시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시 제주도로 가야만했다.
어린 나이라 당연히 적응은 쉽지 않았다. 친구들도 제법 사귀었고 바라던 중학교에도 입학하게 되어 들떠있던 려경이에겐 전학한 중학교의 교복마저도 미워 보인 건 당연했을 것이다. 제주 방언이 낯설어 처음 수개월동안은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다. 전학 후 첫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주위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소극적이었던 당시 성격으론 친구들에게 선뜻 먼저 손을 내밀기도 어려웠다. 제법 적응이 된 이듬해까지의 일년은 책과 친해진 계기가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하는 데도, 살아가는데도 많은 도움도 되었다고 한다. 제주에 정을 붙여가면서 부터는 첫 시험 결과로 인한 주위로부터의 부담감은 오히려 공부를 소홀하지 않게 하는 계기로 전환되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자신을 키워준 재수 1년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경제사정은 졸업 때까지 나아짐이 없었다. 모 대학에 합격했지만 언니가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년엔 언니가 졸업하니까 한해만 더 쉬자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에 한 마디의 거스름없이 그러겠노라 당당히 답을 했지만 속내는 편하지 못했다. 3학년 시작하면서 그간의 흔들린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공부의 결과가 그렇게 되고 보니 화도 나고 괜시리 서러운 마음도 일면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수 따윈 포기하자는 생각에 방안에만 틀어박혀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어나 TV 보고, 밥 먹고, 소설책을 읽는 것이 일과였다. "내년에 가지 뭐. 어렵지 않어!" 이렇게 당당히 말했는데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언니도 원망하면서, 스스로에게 "난 참 못났다."를 되뇌었던 때였다.
부모님이 계신 통영으로 향한 추석은 려경의 심경이 바뀌는 계기가 된 날이었다. 재수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찾은 어머니는 핼쑥해진 딸의 모습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셨다. 려경은 지금까지도 늘 자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다니시는 어머니의 그칠 줄 모르는 울음을 보면서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시 시작한 공부는 힘들었지만 대학을 가야겠다는 의지로 참아냈다.
재수 시기, 그 1년 동안 스스로 많이 컸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이 많이 변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진주나 부산에 가길 원하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안동행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금부터 보여지는 나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 속에 살고 싶은 욕심이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 보다 강했나보다.
대학 초년생의 설레임과 두려움
참 난감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삶이란 없겠지만, 결코 손쉽지 않았던 20년을 살아낸-살아온이란 표현보다 살아낸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다. 글 도입에서도 사용한 바 있는 살아낸이란 표현에 대해 지금에 와서야 주를 다는 것엔 졸자의 의도가 숨어있다- 려경을 "쾌청한 봄소식을 안고 온 신입생"의 주인공 정도로 만들어버리기엔 마냥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입학 직후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유로 한 번 더 관심의 눈길을 받아야 할 땐 부담도 됐었다니.
그러나 려경인 오히려 지금에 와선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계기가 되어 다행스럽다고 한다. 어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늘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시작했던 려경이의 힘이 안동에서도 여전히 발휘될 것 같단 예감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려경이는 이전과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요즘 려경인 대학 초년생이 느끼게 되는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과, 그 안에서 조금씩 비집고 나오는 갖가지 고민들로 바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인연으로 만난 친구들과 동기사랑을 외치기도 하고, 평소 관심 가졌던 것을 공부할 수 있는 동아리를 찾으려고 학생회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스스로 방향치라고 부르면서 복잡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강의실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수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제법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품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려경은, 아직 결정은 내리지 않았지만 영화비평 동아리에 들고 싶다고 한다. 학생운동이란 것도 해 보고 싶고, 많은 친구들과도 사귀고 싶단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서 자주 하는 건 힘들겠지만 가끔씩 혼자 여행도 다녀보고 싶단다. 연애도 해 보고 싶단 얘기도 물론 빠뜨리지 않는다.
대학 4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물음에, 려경인 선뜻 "공부"라고 답한다. 자신이 선택한 전공 공부를 계속하고 싶고, 대학원도 가고 싶단다. 장래 현실적인 자리매김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좋아서 마냥 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 려경의 자리를 지나온 사람들은 혹, "그맘때는 누구나 그래. 그러다가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라고 가벼이 내뱉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도 그랬듯이 려경이가 지금, 여느 신입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그들처럼 사람에게 치이고, 일에 치이고, 그리고 사람과 일을 사랑하고 그럴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랬듯 그 평범함 속에서 자기만의 특별함을 발견해내면서 세상을 살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따뜻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이 옷 추스리기에 고됨을 주는 건 안동 특유의 봄날이다. 이 날씨가 유난스레 극성을 피울 즈음 려경이를 다시 한번 만났다. 대화가 오가던 중에 려경이는, "저는 저 스스로를 사랑해요."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자신 모두를 말하는 건지, 현재의 자신을 말하는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이웃에게 역시 사랑을 베풀 수 있듯 참 다행스런 일이다. 게다가 려경에겐 아직 사람들을 사랑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안동>
이 광 수(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