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신문화의 재정립-유교문화 국제학술대회(글/류선경)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 중도수용론이 여러 갈래로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아시아권은 물론 서구에서도 21세기의 새로운 가치를 유교적 덕목에서 찾으려 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외 석학들이 유교문화의 본향인 안동에서 유교적 덕목을 요체로 하는 유교문화와 제도를 논의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13일부터 17일까지 안동과 영주에서는 유교문화를 주제로 한 의미있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안동문화방송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비교문화센터. 계간 전통과 현대측이 공동 주최한 이 대회에는 국내외 석학 26명이 참석해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특히 최근 본격화된 경북북부지방 유교문화권 개발과 맞물려 개최됐다는 점에서 지역은 물론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유교문화권개발이 문화를 관광자원화하자는 점에 그 축을 두고 있다면, 이번 학술대회는 전통적인 유교적 덕목을 현대화해서 새로운 정신문화를 정립하자는데 그 중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술대회의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학술대회의 취지
21세기를 맞은 요즘 서구에서는 신자유주의와 보편주의가 제기되면서 지구촌을 자본이라는 가치로 일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같은 시점에서 국내외 일단의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 다시 말해서 자유가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방종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같은 방종은 20세기 최대의 가치였던 자유민주주의를 몰락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20세기 아시아의 경제부흥을 가져온 아시아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엄격한 가정교육과 윤리관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유교적 덕목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모델이 바로 유교적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는 서구중심의 가치에 유교적 덕목 중심의 아시아적 가치를 접목시키면서 새로운 발전모델을 모색하고자 마련됐다.
학술대회의 발표 논문들
안동과 영주에서 열린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모두 15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들 논문은 모두 유교적 덕목과 유교적 관점의 사회제도 등을 다뤘다.
유교문화 국제학술회의는 3월 14일, 안동대에서 월리엄 테어도어 드베르(컬럼비아대)교수의 "아시아적 가치론에 대한 건설적 접근방법"에 관한 강연으로 시작됐다.
'3월 15일 안동 군자리'
1. 데이빗 홀(텍사스대)&로저 에임스(하와이대)교수의 "유교와 서구민주주의;조화를 꾀할 수 있는 모델"
…유교와 서구민주주의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델이다. 지구촌의 각 지역은 문화적 획일주의를 통한 보편주의가 아닌 다양한 문화의 주체성을 인정해야 글로벌라이즘, 즉 세계화를 이룩할 수 있다.
2. 가이르 헬게센(코펜하겐대)교수의 "세계화시대의 정치문화와 민주주의"
…유교를 빼놓고는 한국의 정치문화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유교는 한국의 정치는 물론 여러 문화에 각인돼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문화는 유교적 덕목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3. 모정린(연세대)교수의 "조선조 간관제도의 민주성"
…조선시대의 대간제도에서 민주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왕정시대에도 사헌부, 사간원에 대간제도를 둬 상호 호혜적인 책임성을 부여했다. 절대왕권이 있던 시대에서 군주의 독재를 막기 위한 장치가 바로 대간제도였으며, 이 대간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접목이 필요하다.
4. 알버트 첸(홍콩대)교수의 "소송, 중재 그리고 정의: 현대 자유사회에서의 유교적 사색"
…유교의 중재개념을 강조, 현대사회는 모든 일이 법적인 잣대로만 처리되고 있다. 이같은 분쟁해결의 한 방법으로 유교적 중재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분쟁의 당사자들이 그들의 행동과 서로의 입장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법적 소송에 앞서 타협이라는 해결방안을 썼던 유교문화를 재활용해야 한다.
'3월 16일: 안동 군자리'
1. 루지나 호(홍콩대)교수의 "전통유교와 서양 법률적 구조: 상속법"
…중국사회의 상속법을 전제로 서양법제와 유교적인 가치관이 혼합되는 제도의 필요성 강조, 일례로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상속수혜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등 서구적인 법률구조와 유가적 이념을 혼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찬신예(버몬트대)교수의 "유교와 남녀평등"
…우리나라의 유교사회에서 가장 불평등한 구조로 알려진 남녀간의 문제점이 전통유교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맹자도 '여자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을 만큼 유가의 이념은 남녀평등을 전제하고 있었다.
3. 함재학(하바드대 박사과정)의 "유교적 입헌주의를 위한 정치교육으로서의 관습적 예의"
…유교적 전통을 동아시아의 입헌주의에 접목시켜 정부권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4. 김봉진(키타큐슈대)교수의 "도덕적 제어를 통한 인간해방: 신유교에 있어서의 리(理)와 천리(天理)에 대한 해석"
…도덕의 붕괴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을 옭아매는 상태를 만들고 있다고 전제하고, 理와 天理의 실천을 통해 참된 인간해방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5. 장윤식(브리티시 컬럼비아대)교수의 "상호부조와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사회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했던 상부상조의 정신이 현대사회에서는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본래의 취지를 되살려야 한다.
'3월 16일: 영주 동양대'
1. 유석춘(연세대)교수의 "경제발전에서의 아시아적 가치와 제도"
…혈연과 지연, 학연 등으로 연결된 아시아의 연고주의는 바로 유교적인 가족주의에서 확대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의 가족주의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 연고주의가 지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부패와 배타라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2. 길버트 로즈만(프린스턴대)교수의 "중심과 지역간의 관계: 유교가 분권주의와 지역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는가?"
…유가적 이념에서는 낙향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중앙에서 일정기간 일을 하면 고향으로 돌아와서 후학양성 등의 새로운 일을 하곤 했다. 바로 이 같은 모습이 중앙중심의 현대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한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조셉 찬(홍콩대)교수의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유교적 관점"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는 유교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유가의 이념은 인간이 인간을 돕게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복지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4.. 다니엘.A 벨(홍콩대)교수의 "재산권에 대한 유교적 자제"
…정부의 역할은 국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맹자는 정부가 국민들의 생계보장을 위해 토지 분배를 관장하는 정전제도를 주장했다.
대회를 마치며
지난 1990년 중반부터 제기된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은 바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어떻게 짧은 기간동안 경제적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데이빗 홀과 로저 에임스 교수 등은 이 같은 의문에 해답을 바로 유교적 덕목에 기초한 정신문화에서 찾고자 했고, 그들은 이같은 개념의 집합체로서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아시아적 가치가 서구에서도 주목하는 가치로 부상하면서 아시아적 가치와 관련된 논쟁은 곳곳에서 제기됐다. 아시아적 가치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인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문화는 천명이며,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65년 독립 때부터 90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면서 싱가포르의 경제발전을 이끈 리 전 총리는 또 각각의 나라들은 나름의 통치형태를 찾아야 하며, 개도국에서는 경제성장이 최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두터운 중산층이 없이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리콴유 전 총리는 미국식 시스템이 현재로서는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의 오류에 대해 철저히 책임을 묻고, 부자와 빈자,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엄격히 구분짓는다는 점에서 미국식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 아시아에는 상호간의 의무에 기초해 사회공동체적 삶의 질서를 부여하는 5가지 원칙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한 유교적 가치관은 좋은 가족관계를 만들고, 결국 국가적 차원의 유대로 확대되면서 국가발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한다. 리 전 총리는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기적은 끝나지 않았으며, 다만 빠른 고도의 성장을 이끌어낸 여러 요인들은 이제 새로운 단계를 맞아 재조정할 필요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콴유 전 총리와 같이 아시아적 가치의 옹호론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시아적 가치의 문제점에 관해 지적하는 학자들이다. 그들은 정실주의와 이중규범, 부정부패, 권위주의 등이 아시아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외환위기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또 아시아적 가치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충과 효, 예 등의 그런 관습과 예의는 세계 어디에도 있는 만큼 그것을 독특한 규범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는 이들도 많다.
한편에서는 아시아적 가치 중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순기능도 있는 만큼 이런 순기능은 오히려 본받아야 한다고 중도론을 펴는 학자도 있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 중도수요론이 여러 갈래로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아시아권은 물론 서구에서도 21세기의 새로운 가치를 유교적 덕목에서 찾으려 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신자유주의와 보편주의에 대응하는 새로운 主義를 찾아보려는 국내외 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외 석학들이 유교문화의 본향인 안동에서 유교적 덕목을 요체로 하는 유교문화와 제도를 논의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회에 모인 학자들은 유교문화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특히 유교문화의 대중화를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정신문화를 재정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자는데 동의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낡은 가치관으로 밀려났던 유교문화가 21세기 들어 새로운 정신문화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안동문화방송과 두루넷은 이번 학술대회의 전 내용을 인터넷(www.thrunet.com)을 통해 전세계에 중계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e-메일을 통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 질문들을 올릴 수 있으며 학자들에게 직접 질문할 수도 있다.
유교와 인터넷의 만남은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의의 기폭제가 될 것이며 대내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 이상 천대하지 않는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