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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양반, 저 양반˝인가?(글/정진영)

신분적 차별을 전제로 하는 봉건체제 하에서 하층민의 부는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관리와 양반들의 주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수탈의 대상에서부터 벗어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반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사회적 천대는 물론이고 그들의 재산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로 많은 상민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이 양반이…"

우리는 길거리에서 시비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 양반이"하고 상대방을 위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대부분의 경우 원래의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시비의 쟁점이 되게 한다. 말하자면 "이 양반이"하는 말은 시비를 격화시키는 굉장한 폭발력을 지닌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말에 왜 그토록 격분하는 것일까?

"이 양반이"라는 말에는 양반만이 있을 뿐이다. 양반이라는 말은 누구를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일반적으로는 상놈이 아니라 지체 높은 사람, 또는 행실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싸움판에서의 "이 양반"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이 가짜야" 혹은 "이 사기꾼아" 하는 말이 된다. "이 양반, 저 양반"도 그러하다. '양반'이라는 말이 왜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누가 양반인가

양반이란 말은 사대부(士大夫)란 말과도 통용되었고, 또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사대부란 독서하는 선비(士)와 전현직 관료(大夫)를 일컫는다. 전현직 관료라 하더라도 선비에서 출발하였고, 또 신분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문을 단위로 결정되는 까닭에 이들을 사족이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선비가 관료가 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과거를 통해서였다. 물론 공신과 고관의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이 주어지기도 하였고, 특별한 부서를 두어 예우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도 모든 양반이 관직이나 품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직이나 품계를 가지지 않은 이들을 통칭해서 유학(幼學)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양반이란 크게는 유학층을 기반으로 하여 전현직 관료와 품계(品階)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농업 등의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체로 16세기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특권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튼 양반은 특권계층이었다. 양반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기반과 특권을 누렸으며,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졌고,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고, 또 서로 혼인함으로써 사회적·정치적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상천민들과는 엄연한 구분이 있었다. 상천민이 양반이 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법은 이러한 신분적 경계를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양반'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보다 직접적으로는 18세기 이후의 조선사회는 이같은 양반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어 나갔다.

선비와 양반

양반의 본분은 벼슬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그들의 경륜을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 인구의 증가는 모든 양반들에게 관직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당쟁이라는 형태의 권력투쟁은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18세기 이후 중앙의 권력이 노론, 또는 서울의 몇몇 가문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지방의 많은 양반들은 관직에서부터 소외되었다.

지방의 양반이 벼슬에 나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골에서 그저 글이나 읽으면서 가난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로 자처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게 비쳐졌다. 선비라는 표현은 양반에 비해 청렴하고 고상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지방의 양반들 모두가 이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명문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앙권력과 실낱같은 끈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었고, 많은 전장과 노비를 소유함으로써 고을의 한 모퉁이를 호령하는 양반으로써 행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무튼 조선후기의 양반사회는 양반과 선비라는 같으면서도 다른 두 부류가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이같은 두 부류의 양반이 등장한다. 하나는 뜻을 고상하게 먹고 언제나 오경이면 일어나 불을 밝히고, 두 발꿈치를 한데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얼음 위에 박 밀 듯 막힘 없이 외우며,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서 입으로 가난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양반이며, 다른 하나는 글이나 역사를 대강 알아 문과나 진사에 합격하여 벼슬하게 되면 배가 나오게 되고, 방에는 아리따운 기생을 두게 되고, 뜰에는 우는 학을 기를 수 있으며, 비록 궁한 시골에 있다 하여도 백성들을 잡아다가 코에 잿물을 붓고 상투를 휘어잡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원망조차 못할 무단행위를 일삼을 수 있는 양반이 그것이다. 전자는 선비적 존재를, 후자는 양반적 존재를 말함이 분명하다.

연암은 관직과 권력을 누대로 독점하면서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거나 향읍의 무단토호적인 양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들 양반을 '도독놈'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선비가 고상하게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도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이전의 양반생활 양식에만 연연하고 있던 몰락한 선비들의 생활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족의 생계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읽는 글이란 오직 입으로만 '얼음 위의 박 밀 듯' 외울 뿐, 국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도움이 안되기는 양반이나 선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양반전}에서 비판되고 있는 양반은 안동의 하회탈놀이에서 선비와 양반으로 보다 분명히 제시된다. 탈놀이가 연암의 시대보다 더 진전된 모습이거나 아니면 하층민의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양반과 선비가 구별되기는 하지만 젊은 기생 '부네'와 양기에 좋다는 '소 불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마당에서 선비의 학식도 양반의 지체, 중의 윤리와 함께 모두가 위선임을 폭로하고 있다. 말하자면 탈놀이 장에서 선비와 양반은 존경받거나 권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조롱과 야유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양반전}이 양반 내부에서의 비판이었고 그것도 문자로 언급됨으로써 식자층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하회 탈놀이 장에서의 양반에 대한 풍자와 야유는 보다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대중과 더불어 함께 호흡하면서 전개됨으로써 그것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탈춤은 하층 백성들의 축제이다. 하층민들은 탈놀이 장에서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야유하면서 기존의 엄격한 신분질서에 도전하여 그 경계를 시험해 본다. 물론 이것은 축제의 장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풍자와 야유가 격렬하면 할수록 그 여진은 오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주 반복됨으로써 다만 놀이로서가 아니라 가끔은 일상생활 속에서 재현해 보고 싶은 충동도 점차 강해지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럴만한 사회적 주변적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있었다.

상놈이 양반 되다.

조선후기 상천민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합법 또는 비합법적인 방법들은 다양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당한 재산을 필요로 하였다. 18세기 이후 농경지는 크게 확대되었고, 농업기술 또한 상당히 발전해 있었다. 이에 따라 상업과 수공업도 흥성하여 읍내는 제법 도회적인 분위기로 흥청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층민들의 일부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보다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분적 차별을 전제로 하는 봉건체제 하에서 하층민의 부는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언제라도 관리와 양반들의 주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상놈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셈이었다.
따라서 상놈으로써 재산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수탈의 대상에서부터 벗어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반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사회적 천대는 물론이고 그들의 재산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로 많은 상민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전라도 무안에 사는 농사꾼 조서방은 천여 금에 가까운 돈으로 가짜 홍패와 어사화, 그리고 관대와 창우들의 화복 등을 구입했다. 말하자면 양반을 산 것이다. 그리고는 관대를 착용하고 어사화를 꼽고 창우를 앞세워 온 고을을 돌아다니며 양반이 되었음을 과시했다. 걸맞지 않는 옷매무새며 익숙지 못한 말 탄 모습과 무식함을 뽐내는 거만함은 온 고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 저게 양반이래!"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을 법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인 조서방만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가관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같은 일은 흔한 것이었다.

이 양반 저 양반, 그놈이 그놈

양반은 이제 고매한 학식도 지체 높은 신분만도 아니다. 농사꾼 조서방도 폼나게 양반으로 뻐길 수 있는 세상이었다. 하층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선비의 학식도 양반의 지체도 위선이었고, 따라서 풍자와 야유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었던 새로운 양반인 조서방을 환호한 것도 아니었다.

하층의 백성들이 조서방의 행진에 환호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한 시기와 질투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양반을 풍자하고 야유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양반에 대한 기대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다.누군가는 세상을 이끌어가야만 했다. 고통이 클수록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에 대한 그같은 희망을 완전히 거두어들이기엔 아직은 대안이 없었다. 새로운 세력과 대안이 그들이 고대하던 미륵처럼 땅속에서 불쑥 솟아 나오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조서방과 같은 새양반이 결코 새로운 대안일 수 없었다. 조서방이 새로운 이념을 가진 것도 새로운 대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의 편입에만 집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존의 양반과 기득권을 함께 하기란 양반이 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관권과 결탁하여 수탈층의 말단에 참여할 뿐이었다. 이 양반이든, 저 양반이든, 그놈이 그놈일 뿐이었다.

연암은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그와 같은 실학적인 선비에서 찾고 있었다. 이들은 이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실학의 선비는 그들의 이상을 실현할 현실적인 힘이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개혁은 조선후기 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절실한 문제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바탕하지 않는 개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발붙일 공간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선후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상황은 엄청나게 다르다. 조선의 백성들은 힘을 행사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유권자로서 힘과 그것을 행사할 유용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양반 저 양반 그저 똑같은 놈에 대한 비난과 풍자와 야유만이 조선의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그놈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진정한 대안을 찾아내고 키워야 한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키운 새싹이 바르게 자라는지 감독하고 감시하는 눈길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놈이 과연 진정한 새로운 세력이 되도록 우리가 힘쓸 일이다. 더 이상 그놈들을 탓하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안동>

정 진 영(부산동명정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