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무렵에 풍산에서 열린 하기강습회(글/김희곤)농민이나 노동자가 큰 부담 없이 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들어서 가능했다. 서원이나 서당, 혹은 향교라는 전통적인 기관은 신분사회에 운영된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교육이 가능한 시기는 결국 근대사회가 이루어지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대중교육은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되는 역사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중을 계몽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교육정책을 넘어서서 민족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어야 하는 부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교육이 시작된 시기는 1890년대 중반이지만, 구국계몽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 가능했다. 그것이 안동을 중심으로 삼은 경북북부지역에 파급된 발단은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 들어선 중등과정의 협동(協東)학교였다. 그리고 협동학교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 신식교육을 추구하는 많은 교육기관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으로 이 지역에 근대적 교과목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들어섰다. 이렇게 길러진 인물들이 3·1운동에서 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제가 3·1운동 직후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식민지교육정책을 심화시켜 나가자, 1920년대에 시작된 청년운동은 대중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국의 대다수 청년운동단체들이 농민야학(夜學)과 노동야학, 그리고 강연회를 열어 대중을 계몽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강습회도 이러한 차원에서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계몽하고, 그러면서 민족의식을 심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강습회는 대개 야학의 형태로 운영되거나, 아니면 바쁜 농사일을 잠시 쉬는 여름철이나 농한기인 겨울을 이용하였다. 말하기는 쉽지만,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한번도 대중들이 아무런 제약조건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서의 교육기관은 철저하게 지배계급만이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신분이나 남녀와 같은 전통적인 제약이 없이 한 곳에 앉아 모여 교육받을 수 있 는 장이 열린 그 사실만으로도 안동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맞이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풍산하기강습회'는 바로 1920년대 초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대중계몽교육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남아 있어서 소개하려 한다.
*** 풍산하기강습회 청강생 명부***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권오설(權五卨)이 1923년 무렵에 개최한 것으로 보이는 풍산하기강습회의 청강생 명부, 즉 수강생 명부이고, 다른 하나는 강습회를 운영하면서 구입한 품목과 금액을 기록한 지출장(支出帳)이다.
청강생명부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권오설이 1923년 11월에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하였는데, 바 로 앞서 그 해 여름에 강습회를 열었던 사실과, 여기에 참석한 인물을 알려주고 있다. 용지는 가로가 긴 것으로, 양면에 각각 세로 열 칸씩 그어져 있고, 이등인행(伊藤印行)이라는 인쇄소 이름이 찍혀 있다.
'청강생명부'라고 적힌 표지를 넘기면, 맨 먼저 '주학부(晝學部)'라고 기재되어 있다. 낮반이라는 말이니, 이로 보아 '야학부' 명단이 별도로 있은 것 같다. '지출장'에 램프나 석유값을 적으면서 '야학설비'나 '야학용(夜學用)'이라고 기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야학부의 존재가 확인되지만, 그 명단은 보이지 않는다.
명부는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뉘어 있다. 전체 인원이 142명인데, 남자부에 129명이, 그리고 여자부에 1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명단을 살펴보면 풍산들을 둘러싼 마을, 즉 가곡(가일)·소산·상리·하리 등 4개 마을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여기에 안교·갈전·현애·노동 등 그 주변마을 출신이 소수 참여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풍산하기강습회에 참여한 수강생들은 풍산들을 둘러싸고 자리잡은 마을출신 청년과 여성이었고. 특히 권오설의 마을인 가곡과 바로 이웃 소산, 그리고 동쪽으로 건너편의 상리(우롱골)와 하리가 중심이었다는 말이다.
우선 권씨는 대개 가일마을 출신이다. 언뜻 보아도 알만한 인물이 권오설의 두 동생 오기(五箕)·오직(五稷)과 오헌(五憲)·오운(五雲)·오경(五敬)·오섭(五燮)·영목(寧穆) 등이다. 그리고 소산마을 출신으로 김문현(金文顯)·주현(周顯)·국현(國顯)·김병천(金炳千)·김위규(金渭圭) 등이, 또 풍산들 동쪽편에 자리잡은 상리마을 출신으로 이중철(李重轍, 혹은 準轍)·이교구(李敎龜, 혹은 敎龍)·이용인(李用寅)·이준극(李準極)·이두문(李斗文)·이준창(李準昌)·이재홍(李在洪)·이준옥(李準玉)·김호근(金琥根)·김상학(金相鶴) 등, 그리고 하리마을 이상봉(李相鳳)·이종렬(李宗烈), 안교동의 권태성(權泰晟)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명단에 '칠석'이니 '삭불'이니 하는 이름을 보노라면, 이들의 신분이 양반 출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 당시는 노비가 해방된 뒤이므로 굳이 신분문제가 중시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계급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성향을 헤아려본다면, 일단 상하층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만으로도 역사적 발전의 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부
李永祚 金泰鎭 李重(準)轍 李會國 金永出 權午吉 權重聲 權五箕 劉壽岩 李漢一
金永麟 安 珏 李在澈 李相元 權五雲 權五承 權五憲 李相鳳 金文顯 權五稷
金箕鎭 權寧樂 李在文 李城 權泰晟 牟昌極 安永昌 李鷹鎬 李敎鍾 金周顯
金起淵 李信善 權梅鎬 權正宣 張文世 尹泰熙 金春培 金漢培 權寧穆 李禮善
李泰應 李斗應 李用奎 金福基 李容善 金千壽 李克淵 李敎龜(龍) 金錫煥 趙道根
鄭孝鳳 金壽穆 金淳泰 權先伊 李用寅 李準極 李在福 李康稙 李準鳳 李斗文
李光德 金乭岩 金昌東 金壽睦 李元龍 權寧乭 裵永鉉 金炳千 金渭圭 李枋
金鳳顯 權龍漢 張載明 申大均 金命哲 丁正敬 李準昌 李德龍 李用先 李端出
金鉉鼎 李七夕 孟鍾鎬 李準善(旋) 權炳宣 李在洪 權奇百 潘敬先 李用翼 梁梅岩
金貞睦 權仁和 李在英 李敎龜 孟珍鎬 崔奉伊 李準玉 丁萬敬 權尙叔 權泰鎬
權重洛 朱熊龍 崔龍吉 金炳魯 金治柄 金永義 金炳彦 崔相佑 金國顯 金聲鎭
李九鳳 李周封 李泰成 柳錫佑 金仁德 崔忠實 南相民 金在漢 南德先 李宗烈
權五敬 權五燮 朴定祥 李用鶴 閔朔弗 金琥根 金相鶴 金相魯 金亨植 129명
여자부
朴杏伊 孫杏伊 金玉分 牟點禮 崔鳳紀 權桂仙 權杏伊 金明姬 金小杏 權命福
邊錦順 權小姬 方順禮 13명
(※위의 명단에 나오는 이름을 아시는 독자께서는 필자에게 도움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자 수강생들에 대해서는 출신지나 주소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일단 그들이 가곡이나 소산마을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학생 13명 가운데 행이(杏伊)라는 이름이 3명이나 되고 또 '행(杏)'이란 글자가 들어간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실제로 남녀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앉아 학습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안동에서 남녀가 같은 강습회에 참여하고 학습했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청강생 명부의 지출장
두 번째 자료는 풍산하기강습회 지출장이다. 7월 20일부터 8월 17일까지 기록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기강습회가 시작되고 마쳐진 날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개 7월 중순부터 8월 하순까지 진행된 것 같다. 구입한 물품들은 종이·백묵·연필·고무공·꽈리·램프(洋 )·석유·철끈 등 교육에 필요한 물품, 계란과 과자와 같은 식품 등이고, 이외에도 교제비와 여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지출된 내용을 보노라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이 눈에 띈다. 여자 수강생들에게는 남자들과 다르게 대우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공책과 연필을 구입한 난에 "여학생에게 주는 것"이라 적었다. 아마 여자 수강생들을 유치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입학원서용지와 문부(文簿)용지라는 대목에서 학적부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먹을 구입하면서 흑판수선용이라 적은 기록은 먹물로 흑판을 칠하여 수선한 사실을, 또 흑판을 수선한 학생에게 지급할 과자를 별도로 구입한 기록은 흑판수선작업을 학생들에게 맡겼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안교(安郊)노동야학낙성식에 의연금을 보냈다는 8월 2일자 기록은 이 강습회가 진행되고 있던 가운데 풍산장터가 있는 안교동에 노동야학이 세워진 사실을 알려준다.
강습회와 풍산소작인회는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습회를 연 주역은 권오설이고, 그 장소는 아마도 가일마을의 노동서사(魯東書舍)였을 것 같다. 그렇다면 권오설이 이 강습회를 단순하게 계몽적 차원에서 개최했을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이 강습회에 이어서 3개월 뒤에 풍산소작인회가 결성된 사실은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현재 이 수강생 명단과 풍산소작인회를 연결시키는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수강자 출신마을들이 모두 풍산소작인회에 열렬한 활동을 펼친 곳이어서 관련성이 강할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권오설의 동생이나 문중 인물들이 풍산소작인회와 6·10만세운동, 안동지역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신간회 활동에 참가했고, 또 안교동 출신 권태성은 신간회안동지회의 중요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이 명단을 제대로 추적하면 풍산소작인회나 1920년대 안동지역 사회운동과의 관련성을 엮어내는 데 큰 도움을 줄 자료로 보인다.
이들 자료와는 별도로 1923년에 풍산학술강습회의 수입과 결산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기도 하다. 그것은 11개월 동안 열린 강습회이기 대문에, 여기에서 소개하는 하기강습회와는 의미가 다르다. 풍산에는 당시에 사설 교육기관으로 풍산학술강습회라는 것이 장기적으로 열렸고, 여름철에 일시적인 하기강습회가 별도로 존재했다고 정리된다. 여기에 다시 안교동의 노동야학과 같은 교육기관이 만들어졌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