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落書)(글/조필출)시골 곤지암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나는 늘 팔당댐이 있는 길을 택한다.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길을 지나 댐을 건너 왼쪽으로 접어들면 철길 아래로 긴 시멘트 옹벽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순이야! 사랑한다’ 또는 ‘영이=철수’, ‘나를 용서해라’ 하는 많은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다. 정성을 다해서 쓴 예쁜 글씨체에서 마구잡이로 써내려 간 흘림 글씨체까지. 낙서를 한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양이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면 한 두 개의 낙서를 큰소리로 읽기를 좋아한다.
그 날도 댐을 막 지나서, 습관처럼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낙서를 읽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 만치 앞쪽 벽에서 무동 타고 있는 남녀가 보였다. 나는 그들이 무얼 하는지 궁금해서 남편에게 속도를 좀 줄여 달라고 부탁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남녀 한 쌍이 스프레이 통을 들고서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더 높은 곳에 자기들의 마음을 새겨 놓으려는지, 여자가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힘이 드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양손으로 옹벽을 짚고 서 있었다. 여자의 빨간색 상의가 그들의 마음처럼 정열적으로 보였다. 그녀의 긴 머리가 강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낙서를 한다고 혀를 찼지만, 그들에게는 사랑의 맹세가 되었으리라. 그런 모습을 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한 토막이 강바람을 타고 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즈음이었으리라. 우리 집은 좁고 긴 골목 끝에 있었다. 어느 날 골목을 지나 학교에 가려고 나가는데, 누군가가 벽 여기저기에다 내 이름으로 낙서를 해놓았던 것이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이번에는 전봇대에 세로로 길게 쓰여 있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있는 좁고 길다란 굴뚝에는 ‘필출’이란 두 글자가 작으면서도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새까만 그을음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굴뚝에 유난히도 하얗게 보이던 분필 글씨.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학교에 가다말고 집으로 뛰어 왔다. 너무 부끄러워 어머니에게 지워달라고 울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글씨를 잘 몰라 내 이름자를 구별 못하시는 어머니께서는, 내가 얼마나 속상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다니면서 지울 용기는 더구나 없었다.
그때 나는 남학생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는 숫기 없는 여학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느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에 불과했지만, 그 때는 어찌 그리도 싫던지 얼마동안 이름이 쓰여 있는 골목을 피해서 한참이나 돌아서 학교에 다녔다. 다행히도 어느 날 세찬 소나기가 한차례 온 뒤에야 알아 볼 수 없게 지워졌다. 그래도 한동안 희미해진 흔적이 남아 있어 내 마음을 애태웠다.
하지만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누구였을까? 혹시 나를 좋아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을까? 아니면 말썽꾸러기 옆집 고등학생이었을까?
어느새 내 마음은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수줍은 열다섯 살 여학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용기 있게 가서 지우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가슴 조리던 지난 일들이, 고향에 갈 때마다 종종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누구에게 첫사랑의 여인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그만 웃고 말 때도 있다.
정말 누구였을까? 그 낙서의 주인공이.<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