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글/김연숙)자연 빛깔과의 만남, 천연 염색을 하시는 분들의 모임이다. 참 고운 이름의 전시회에 음식을 부탁 받았다. 메모를 꼼꼼히 챙기고 5일마다 서는 장터에 가니, 날씨 탓인지 시장은 썰렁하고 장사꾼만 모여 웅성거린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작년에 야채를 대어 주던 아주머니를 만났다. 반가워하시며 무엇이 필요하냐길래, “호박”하고 보니 별로인 호박이 여남의 덩이가 있다.
“호박이 잘 안 익었네요.”
“싸게 줄 테니 다 가져가.”
“함 둘러보구요.”
“차에 실을테니, 그리 알어.”
잘 익은 호박을 골라서 오는데, 돌돌이에 가득 담긴 호박이 나를 기다린다.
“호박죽 쑤는데 안 익으면 못써요.”
무조건 다 사라며 떼를 쓰시자 곁에 계시던 낯선 아주머니들마저 “우리 것도 가져가요. 한 동네에서 왔는데 누구껀 사고 누구껀 안사니껴?” 하시며 아주머니 서너 분이 호박을 들고 주르르 따라 온다.
“나 돈도 모자라요.”
“나중에 주면 되지, 그냥 가져가요.”
“그래도 이름은 지어야죠.”
“알아서 줘. 많이 달라고 안 할게.”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되도록이면 값을 깎지 않는다. 키우는 수고를 생각하면 늘 고마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언짢을 때가 있다. 연세 드신 할머니들이 거짓말을 하실 때는 말은 안 해도 미운 마음이 든다. 어린 시절 할머니 사랑으로 살아 온 나는 할머니 향수가 내 삶을 지배할 때가 많다.
나에게 할머니란 늘 풍성하고 푸근한 보금자리였다. 손주를 위해서라면 할머니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그런 여유로 내 가슴에 자리매김하고 계신다. 다는 아니겠지만 요즘 할머니들은 이기적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들도 세상 변화에 따라 변해 가시는 걸까?
차에서 호박을 내려놓으니 가게가 그득 하다.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잘 익은 것을 골라서 껍질을 벗기는데 호박은 춥다고 제 옷을 잡고 안간힘을 쓴다. 갓 시집 온 새색시처럼 제 살을 내어주기 싫은 듯 애를 쓰지만, 어느덧 샛노란 속살은 드러나고 잘 여문 호박씨도 미끄러지듯 빠져 나온다. 듬성듬성 잘라서 커다란 솥에 넣고 부글부글 끓여서 물러지면, 도깨비 방망이로 곱게 갈아서 기장쌀과 고구마로 맛을 내고 소금으로 간하면 따끈하고 노란 호박죽이 탄생한다. 어린아이, 노인 누구나 좋아하고 몸에 좋은 호박죽은 어딜 가나 반가워하는 음식이다.
오늘은 전시회 날, 아침부터 분주해지는 몸과 마음으로 어떡하면 추억이 담겨 있고 맛깔스러우며, 보기도 좋은 상을 차랄까 고민하는데 까르르 웃음소리 요란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졸업을 앞두고 일어난 어릴 적 추억이 지나간다.
시골이라 중학교에 입학 하는 아이들이 몇 안 되던 그때, 방학은 다가오고 첫눈이 내리자 허전해진 우리들은 하루 저녁 모여서 놀기로 했다. 나는 할머니의 허락을 얻어 아이들을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저녁을 먹고 나라 이름, 산 이름, 강 이름 찾기 하며 한참 신나게 놀던 우리들은 누군가가 꺼낸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애들아 우리 신내림 놀이 해보자.”
약간은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지만 아무도 안된다고 하지 못하고 한 아이를 가운데 앉혀 놓고 빙 둘러 앉아서 한 아이가 지시하는 데로 우리는 주문을 외웠다. 시간이 지나자 가운데 앉은 아이의 손이 점점 벌어지더니,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방 안 구석구석에 흩어지며 웃목에 쌓아 놓은 호박을 건드렸다. 방 안 가득 흩어지는 호박이 이리 저리 뒹굴자, 무서움과 두려움에 질려서 서로를 바라봤다.
호박에 귀신이라도 붙은 듯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대기 꺼리고 있을 때, “얘들아 새참 먹고 놀아라” 하시며 호박범벅을 시원한 국물김치와 함께 내어 오셨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박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아이들은 먹는데 정신이 팔려 놀이는 잊어버렸다.
간식이 별로 없던 그때 야밤에 여럿이 먹던 그 맛은 바로 꿀맛이다. 지금도 만나면 가끔 그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심심해지자 누군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밤에 국물과 음식을 가득 채운 배도 가만히 있기를 거부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내심 변소에 갈 일이 은근히 걱정이지만 호기심어린 눈으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듣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눈짓을 하면 우르르 마당에 앉아 볼일을 보는데 머리가 쭈볏쭈볏거린다. 서로 먼저 들어간다고 아우성치던 그 웃음소리 귀에 들리는 듯 아련한데, 나는 분주히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른 봄 울타리 밑에 심겨져 쏘옥 고개를 내밀던 싹을 보며 자라기를 바라던 마음이 어느새 커다란 호박잎을 만들면 반찬 없던 시절 상위를 풍성하게 만들고 못난이의 대명사 호박꽃이 피기 시작하면 꽃술을 따고 혀끝으로 꿀을 빨던 달콤함 지금 어느 음식이 그 맛보다 더 혀끝을 자극할 수 있을까?
애호박이 달리면 날마다 들여다보고 있다가 손가락질이라도 할라치면 호박 떨어진다고 기겁을 하시던 할머니, 애호박 따서 전도 부치고 칼국수에 넣어 신나게 먹던 그때가 그립다. 찬바람 불면 덜 익은 놈은 건박으로, 잘 익은 놈은 호박국, 범벅, 호박떡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던 호박. 무엇하나 버릴 것 없고 유용한 호박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건강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다.
샛노란 호박죽을 끓이면서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고, 현재의 삶에서 보람을 찾는다. 내 남은 생도 유용한 호박처럼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노랗고, 유익하게 익기를 바래본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