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꼭대기 마을, 느르치(글/윤천근)느르치 가는 길
느르치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는 모양이다. 천주 마을에서 넘어가는 길, 예천에서 들어가는 길, 그리고 풍산 쪽에서 올라가는 길. 풍산 쪽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하였다. 별 뾰족한 이유는 없다. 천주동 길은 이미 가 보았고, 예천 쪽으로 가려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그 이유도 김복영씨의 의식 속에서나 고려된 것일 터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가 그렇게 하자니까 그리 할 따름이다. 그는 인도자이고, 나는 감상자이다. 이 역할분담은 내게 있어서는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나의 게으름이 그의 상상의 한계를 넘어 그가 인도하고자 하여도 나는 언제나 뒤꽁무니를 빼려 애를 쓴다는 것 외에 이 역할분담의 관계를 위협하는 요소는 없다. 풍산 쪽으로 나가다 우각사 입구 표석을 따라 들어가서 느르치로 올라간다. 당연히 그가 선택한 노선이다.
나는 그의 차에 동승하여 조는 듯한 눈으로 밖을 내다본다. 길이 좁아지고, 72번 버스가 앞에서 길을 선점하고 올라간다. 가끔씩 버스의 꽁무니를 빠져나온 매연이 우리가 탄 차를 위협한다. 저 위는 외지인이 기웃거릴 곳이 아니야. 더 이상 따라 올라오면 재미없어. 매연은 마치 그런 위협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조차 한다.
골짜기는 깊다. 길은 2차선, 1차선, 포장길, 비포장길이 뒤섞여 있다. 천주마을 올라갈 때 동행하였던 산골짝 작은 개울은 여기에서도 좌에서 나타났다 우에서 나타났다 하면서 우리를 따른다. 개울은 가을에 보았던 천주동 길에서보다 조금 살진 모습이다. 그동안 살이 붙고 성장한 것인가? 느르치 올라가는 계곡 안의 계절은 겨울의 초입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논과 밭은 훤하게 비어있다. 가끔씩 사과과수원이 보인다. 큰 마을이 있는 곳, 악대마을이다.
분지는 경사진 골짜기 속에 넓게 펼쳐진다. 아래쪽에는 비탈을 따라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제법 큰 규모이다. 위쪽으로는 논들이다. 계곡 전체를 경사면을 이용하여 논으로 밭으로 만들어 쓰고 있다. 돌로 축대를 쌓듯이 만든 높은 논두렁 밭두렁들이 골짜기의 경사면과 씨름을 하고 있다. 이 골짜기 속의 그 위험해 보이는 씨름에서 논두렁 밭두렁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이 골짜기 속에 여전히 큰 마을이 자리 잡게 하고, 72번 버스를 부르릉거리며 올라오게 하는 것이 아닌가.
분지는 가파른 계곡면과 완만한 계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파른 곳에서는 논두렁 밭두렁도 높아지고, 폭이 촘촘하여 진다. 가파른 곳에서는 길도 옆으로 누워서 나아간다. 악대마을 위쪽에서 길은 눕고, 사선으로 동쪽 45도 방향을 요격한다. 그 착탄점에는 관음절이 있다. 72번 안동버스의 종점. 관음절이다. 72번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흩어지고, 우리의 시선은 그 위쪽을 더듬는다. 상당한 경사면 위로 양쪽 산의 능선을 베고 누운 고갯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길은? 거기까지 가는 길은 없는 듯 하다. 우리의 작은 사각형 차는 주저하며 시멘트 포장이 끝나는 어림에 늘어 붙는다.
김복영씨가 다급히 옆을 지나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운다.
“이 길이 산성 올라가니껴?”
잘못 들어섰다는 느낌을 가득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산성 윗마을이 느르치이다.
“저기 저 아줌마가 산성 가니더.”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바람처럼 걸어간다. 집에 무슨 바쁜 일이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아주머니의 손가락을 따라 또 다른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아주머니도 멈추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짐이 한 보따리 아주머니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아주머니를 태우고 길잡이로 삼았다.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찻길이 아니라 논두렁길 수준이었다. 그래도 네 바퀴로 구르는 차는 이 길로 너끈히 통행한다는 아주머니의 장담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심하게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가파른 각도를 그리며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붙고 있었다. 김복영씨의 사각형 차가 네 바퀴를 다 이용하면서도 중간에 서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힘을 붙여 올라가야 했던 것은 그 길에서가 처음이었다.
길의 꼭대기에는 고갯마루가 있었고, 둥구나무가 있었다. 둥구나무는 골짜기 전체, 관음절과 악대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또 뒤쪽으로 저 아래 산성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동구나무가 산 위에 서서 양쪽으로 깊은 골짜기 안 마을들을 수호하고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이색적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예천이니더.”
아주머니가 말하였다.
“예천 쪽은 포장이 다 되어 있으요. 안동 쪽은 안 되었지만”
그러니까 포장이 끝나는 곳이 예천과 안동의 경계인 셈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이지만, 이러한 분별법은 느르치와 천주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통용되었다. 길은 예천쪽 느르치마을과 안동쪽 천주마을 사이를 이어주고, 길 가 전봇대에 걸린 전선도 느르치와 천주 사이를 분주히 오고 갔지만, 시멘트 포장 된 길은 느르치마을의 끝까지 나아가 천주마을이 시작되는 입구에서 멈추어 서 있었다.
안동쪽 길은 한쪽은 천주마을에서 끝나 있고, 다른 한쪽은 관음절에서 또 끝나 있다. 예천 쪽 길은 산성마을을 지나 관음절이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나와 있고, 느르치마을을 지나 천주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또 나와 있다. 안동쪽 학가산 마을 사람들은 예천 쪽으로 길을 열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예천쪽 학가산 마을 사람들은 안동 쪽으로 내려갈 필요를 느끼는 탓이리라.
“예천 보문면장이 시멘트까지 다 내주겠다고 하는데도 길을 못 만드니더. 어디 시멘트만 가지고 길이 되니껴.”
장비가 들어가고, 인력이 투입되어야 시멘트를 깔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느르치 마을 사람들은 안동 쪽 길이 비포장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았다. 우리의 길잡이가 된 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상락 김씨. 풍천면 신성동에서 시집을 왔다고 하였다. 산골에서 산골로 왔다며 웃는 아주머니의 볼이 발그레 하였다. 물론 아주머니의 발그레한 볼은 처음 볼 때부터 그러하였다. 원래 살성이 그런 모양이었다. 나이는 59세.
“새댁이시더.”
김복영씨가 너스레를 떤다.
“뭔 새댁이니껴? 늙은이지.”
“동네 가보믄 70노인 쌨지 않니껴. 그르니 50대믄 새댁이지.”
그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네 시골의 실정이다.
아주머니는 사실은 느르치 사람이라 하였다. 우리가 산성 가는 길을 물으니 산성 산다고 했을 뿐이란다. 산성에서 느르치까지는 또 걸어서 올라갈 요량이었는데, 우리 역시 느르치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여간 좋아하지 않는다.
산성마을에서 느르치 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이면 내려오고 40분이면 올라간다고 한다. 물론 거기 사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그러하다는 것이니 우리 걸음으로는 거기다 조금 더 보태야 계산이 맞아떨어질 것이었다.
“산성까정은 예천 버스가 와요.”
그렇지만 김씨 아주머니는 안동장을 더 즐겨 찾는단다.
“안동 장이 물건이 더 좋으니더.”
그러니 산성마을에서 관음절까지 또 걸어서 30분 내려가고 40분 올라가는 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란다.
포장이 되어 있지만 산성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비좁았다. 경운기 두 대가 교행하기도 어려운 넓이, 어쩌다 길 가운데서 차라도 마주치면 하나는 반드시 한참동안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이런 사정은 느르치에 올라갈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예천 쪽과 연결된 넓은 길을 이용하지 못하였던 탓도 있으리라.
산성 쪽에서는 느르치 마을이 가파르게 올려다 보인다. 측면에서는 느르치 마을도 산성마을도 가파른 기슭의 아래 위로 벌려 서 있는 것이 보이지만, 마을 안에서는 경사면의 가파름 때문에 서로를 확인하기 어려우리라. 김씨 아주머니의 잰 걸음으로 30분 걸리는 좁은 길의 좌우로는 전답들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대부분이 논이다. 높은 산 깊은 골짜기 속, 가파른 경사면을 빼꼭히 채우며 수전들이 그 8부능선까지 뒤덮고 있는 것은 인간의 힘을, 인간의 악착같음을 절감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느르치 마을
산성에서 느르치 사이는 길을 닦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큰 길은 산성마을과 느르치마을 사이를 거의 직선으로 이어 주고, 그 한쪽에서 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우리가 택한 좁은 옛길은 이리저리 굽어 돌며 느르치를 향해 기어오른다. 그리하여 두 길이 합쳐지는 곳에 이르러 급한 경사면을 타고 오르면, 마을이 눈앞에 썩 들어선다. 거기에서는 상당한 넓이의 평탄면이 펼쳐진다. 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천주보다는 더 넓은 평탄면이고, 마을 앞으로 휘돌아 그 뒤쪽으로 까지 넓게 펼쳐지면서 많은 전답들을 끌어안고 있는 평탄면이다. 천주에서는 마을만 있고, 전답들은 또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반해서, 여기에서는 마을이 전답들과 서로 어울려 있다. 천주에서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평탄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집들이 수직으로 줄지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였는데, 여기서는 집들이 수평으로 퍼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천주보다 경사가 완만한 평탄면, 마을 영역은 거의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면이었다. 마을 안의 집들도 천주보다는 훨씬 많다.
마을보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마을 입구의 연자방아 집이고, 마을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학가산이다. 학가산은 거기에서도 또 우람한 산의 형상으로 마을 뒤쪽에 위압적으로 솟구쳐 있다. 느르치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학가산의 남서쪽 경사면이다. 철탑이 박혀있는 학가산 정상은 그로부터 동쪽으로 더 나아간 지점이고, 그 뒤쪽, 수직의 바위 절벽들로 이루어져 있는 학가산이 마을의 뒷산이다.
남쪽 멀리, 그러니까 안동 쪽에서 볼 때 학가산은 투구 형상을 한다. 투구의 앞쪽 부분은 위가 평평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투구의 뒤쪽부분은 위가 뾰쪽뾰쪽 솟구치며 호를 그리는 능선으로 되어 있다. 평탄한 능선 면을 이용하여 철탑들은 올라서 있다. 그 위쪽, 뾰족뾰족 바위가 솟구쳐 있는 곳은 철탑같은 구조물을 올려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자연상태의 학가산이 느르치 마을의 뒷산이다.
“저게 상서바위고, 저게 국사봉입니다.”
길 위에서 사과를 깎고있는 김씨 아주머니마을 안에서 만난 윤정희씨는 뒷산의 바위절벽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제는 예천에 나가 사는데 일거리가 있어서 왔다는 윤정희씨였다.
“여기서 보기에는 상서바위가 제일 높은 곳 같은데, 사실은 저쪽 국사봉이 더 높아요.”
국사봉은 상상봉이라고도 부른단다. 제일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이리라. 철탑 바로 뒤의 바위 봉우리이고, 마을에서 보아서는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바위절벽이다. 상서바위는 그 서쪽에 있는 것으로, 마을 바로 뒤에 있는데, 바위절벽 부분 학가산의 중앙쯤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 뒷산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그 각 부분마다 옛날 절터가 하나씩 있다고 한다. 그만큼 범상치 않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학가산이라 하겠다.
학가산은 마을 영역에서는 넓이를 지향하고 있다면, 마을 영역의 위로 올라가서는 높이를 추구한다. 단숨에 위로 솟구쳐서 바위의 절벽을 만들어 내고, 높은 산 정상다운 품격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느르치 사람들 1 - 해주 오씨 일문
마을에는 열 두 셋집이 산다고 한다. 빈집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오씨와 윤씨가 반반이예요.”
우리가 관음절에서 길잡이 삼았던 김씨 아주머니가 말하였다. 아주머니는 마을 안에서 벌집을 주인처럼 모신 집에 산다. 사람집인지 벌집인지 모를 정도로 대문께에서 안마당의 뜨락 위까지 토종벌통이 둘러서 있다.
얼핏 보아서도 10개 이상은 됨직하다. 아주머니가 차를 태워 준 우리에게 고맙다며 사과를 한 접시 깎아 내와 우리는 마을 안 시멘트 길 위에 앉아 그 사과조각을 하나씩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햇빛이 밝게 비추고 있었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12월 초 답지 않은 따사로움이 학가산 위 느르치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랫집의 뒤울에 또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고, 김씨 아주머니는 그 아주머니를 불러냈다. 그 아주머니는 돌무지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쪽으로 올라왔다.
“우리하고 일가니더.”
김씨 아주머니가 말하였다.
“시댁 쪽으로 일가니껴?”
김복영씨가 물었다.
“시댁으로도 일가고, 친정으로도 일가니더.”
11대째 이어진 파평윤씨 느르치 종가집과 윤춘식 할아버지두 아주머니가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친정 쪽으로 일간 거는 얼마 전에 알았니더.”
두 아주머니는 똑같이 상락 김씨이고, 똑같이 해주 오씨 집에 시집을 온 것이었다. 친정 쪽으로는 14촌이고, 시댁 쪽으로는 6촌이란다. 우리와 같이 차를 타고 올라온 김씨 아주머니는 이름이 문식이고, 울타리를 넘어서 올라온 아주머니는 이름이 갑순이라 하였다.
김갑순 아주머니는 머리가 검어서 아주머니인줄 알았는데 연세가 71세라 한다. 와! 나는 금방 할머니로 호칭을 바꾸며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흰머리 하나 없다고 혀를 내두르니 김갑순 할머니는 염색했노라고 계면쩍어 한다. 그래도 얼굴은 김문식 아주머니와 똑같은 정도의 나이를 먹은 듯하다. 하긴 김문식 아주머니도 흰머리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보이지, 얼굴은 젊은이나 진배없다.
“이 동네 논이 1마지기에 300만원 하니더.”
산마을치고는 들이 넓다는 내 말에 김갑순 할머니가 말한다. 200평 한마지기로 친다면 평당 만오천원씩 되는 셈이다.
느르치 마을의 해주 오씨는 천주동에서 갈라져 나왔다.
“천주동하구 한 파니더. 우리 큰 집도 천주동 있고, 저 아래 산성마을은 순흥안씨이고.”
김갑순 할머니가 말하였다.
“할머니는 친정이 어디니껴?”
김복영씨가 물었다.
“회곡서 왔니더. 낙동강 건너 회곡. 옛날에 어디 서로 오고 가며 확인하니껴? 중매쟁이 말만 듣지. 예천이라캐서 읍낸줄 알았더만, 어디 여기 산골짝 속인 줄 알았던가요?”
미상불 억울하다는 말이었지만, 말만 그렇지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하긴 여러 십 년을 살아온 뒤에 어디 지아비나 삶터에 대한 억울함이 남아있을 것인가?
마을의 역사에 대해 소상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어른이 누군가 물어 보았다. 위쪽에 사는 윤씨 노인이 마을 일에 소상하다고 하였다.
느르치 사람들 2 - 파평 윤씨 일문
느르치 마을은 두 구획으로 나누어진다. 마을의 아래쪽은 해주오씨들이 사는 곳이다. 마을의 위쪽은 파평윤씨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파평윤씨들이 어울려 사는 삶터에 천주로부터 해주오씨들이 건너와 그 발치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파평윤씨는 오래 여기서 세거해 내려왔고 해주오씨는 이 마을로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느르치를 사랑하는 젊은이 윤희정씨 마을 위쪽, 윤춘식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집은 작지만 아담하다. 행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늘어서 있고,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또 앞뒤로 끼워져 있으며, 바깥마당의 서쪽 끝으로는 헛간이 세워져 있다. 안마당도 바깥마당도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집은 벽을 백토로 칠하였고, 지붕의 기왓장에는 푸른 페인트칠을 하였다. 새로 꾸미고 색칠한 모습이 역력하였으며, 색감이며 모습이 영 부자연스럽기만 하였다. 이 집이 느르치 마을 파평윤씨의 종가란다. 고대광실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실망이 앞섰다. 안마당의 서쪽 담을 집가리를 쌓아 마무리하였고, 그 집가리에 세월이 내려앉아 회색빛 풍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외에는 오래된 집다운 느낌이 거의 없었다.
“죽을 기운도 없니더.”
안마당에서 만난 윤춘식 할아버지는 힘없는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역력하였다. 영 소화가 안되고 먹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질문에 대꾸할 여력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안마당에서 질문을 던졌으나 아무 답도 들을 수 없었고, 바깥마당 쪽 행랑채 앞 툇마루에 앉아 괴로운 자세로 늘어지듯 앉아 계시는 곳으로 쫒아 갔으나 질문을 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겨우 병환 이야기에 섞어 몇 마디를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 11대가 살았니더.”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손자가 11대 째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9대인 셈이었다.
“우리가 오씨들 보다 먼저 여기 들어왔어요. 오씨가 여기 들어온 게 한 130년? 우리는 300년이 넘었어요.”
임진왜란 때 이리로 피난을 왔다가 눌러앉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경기도 고양에서 이리로 피난 왔지.”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전투가 격렬한 곳일 수밖에 없는 경상도로 피난을 내려오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임진왜란 때라면 400년이 넘는 세월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혹 임진란이 아니라 병자란은 아닐 것인가?
병자년의 일이라면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오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음 속 생각의 움직임일 뿐이었고, 아파서 죽겠다는 노인의 말을 막고 나서 따져볼 일은 아니었다.
“혹 가첩 같은 거 갖고 내려온 거 없니껴?”
김복영씨가 물었다.
“난리 통인디 가첩, 족보 그런 거 갖고 나왔겠나?”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다 보니 짜증이 저절로 생겨나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그 아픈 몸으로도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것은 보일러 기름차를 불러 놓았기 때문이었다. 방을 덥힐 기름도 똑 떨어진 탓이리라. 덕분에 우리는 그 몇 마디라도 얻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는 노인을 괴롭힐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보다가 윤정희씨를 만났다. 시골마을에서 드물게 보는 청년인지라 우리는 반색을 하였고, 윤정희씨를 눌러 앉혀 놓고 질문공세를 퍼부어 댔다. 윤춘식 할아버지의 집에서 동쪽으로 좀 나와 학서정 아랫쪽 너럭바위 위에서였다.
천주마을처럼 여기 느르치도 바위 위에 마을이 올라앉아 있다. 바위의 크기도 모양도 천주 보다는 느르치의 것이 더 크고 넓다. 특히 학서정 위, 아래, 옆은 바위 밭이다. 그냥 바위가 아니라 너럭바위, 한꺼번에 십여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넓이의 위가 평평한 바위이다. 그런 바위가 느르치의 집 수보다도, 아니 느르치 전 인구보다도 더 많다. 뒤쪽 산의 바위절벽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마을은 바위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바위 하나는 무말랭이로 뒤덮여 있다. 거의 마른 모양이다. 우리는 그 무말랭이로 뒤덮인 바위 위쪽, 그 보다 더 크고 단정한 반석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정희씨는 나이가 45세. 파평윤씨 소정공 자손 35대 손이라고 하였다.
“전에는 한 20호 되었어요.”
윤정희씨가 말하였다.
“여기서 나간 파평윤씨들이 전국에 한 180여 호가 되지요.”
300년 이상 되는 세월이니 그 정도로 퍼져 나갔다고 하여도 많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가 이래봬도 살기가 좋아요. 여름엔 모기도 없고, 여름에 한번 와보세요.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저기 주차장 만들어 놓았잖아요? 여름엔 차들이 꽉 들어차요.”
정자 아래쪽에 시멘트로 발라놓은 사각형의 공간이 주차장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과 달라서 이런 곳을 좋아하잖아요? 여기서 나간 사람들도 다시 들어온다는 경우도 있어요. 내년에 부산서 와 가지고 저기 황토집 짓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어요.”
윤정희씨는 정자 동편 바위 밭 속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게 누구 정자니껴?”
김복영씨가 기회다 싶었는지 정자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새로 지은 겁니다.”
윤정희씨가 말하였다.
“다른 가문들에는 정자가 있고 하니까, 문중 어른들이 안동 권씨나 뭐 그런 사람들 모임에 갔다오면 정자가 있는 게 좀 부러우셨던 모양이예요. 우리도 정자 하나 있어야 좋겠다 해서 출향 인사들까지 갹출을 해서 지었지요. 단청에 1천, 짓는데 1억, 약 7년 걸렸지요. 문중이 다 힘을 합쳤어요.”
“입향조는 누구세요.”
“어른들한테 듣기론 웃대 어른 세분이 처음 들어오셨다고 해요. 저기 보이지요? 종가 위쪽으로 마당 한쪽에 향나무가 있잖아요? 거기 샘이 있어요. 세 분이 처음 들어오셔서 샘을 파고 향나무를 심고 하셨다지요.”
나중에 살펴본 향나무는 작고 아담하였으며, 아직은 수세가 좋았다. 사람 키 두 배가 조금 넘는 크기였으며, 바닥으로부터 두 가닥으로 나누어져 둥치를 용트림하듯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향나무 아래에는 넓은 너럭바위가 윗집 담벼락으로 이용되고 있는 산의 경사면 아래로 삐죽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고, 샘은 그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샘은 노관을 묻고 스티로폴을 덮어놓았으며, 관을 뽑아 바깥에서 꼭지를 틀면 모타가 돌아가며 물이 나오게 시설이 되어 있었다.
물은 맑았다. 전에는 이 물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먹었지만, 수량이 모자라서 어떤 때는 산성마을에서까지 물을 져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골짜기 위쪽 샘을 수원지로 삼아 상수도를 놓아서 마을의 식수문제를 해결하였다. 채 2년 밖에 안 된 일이다.
“고양에서 나와 단산, 영월 거쳐서 이리로 들어오셨다고 해요.”
윤정희씨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학교는 어디에 있니껴?”
내가 물었다.
“산성마을에 있어요. 우리 다닐 땐 한 2키로 걸어서 학교에 갔지요. 그 위 선배들은 보문으로 다녔는데 한 12키로 되지요. 그 윗대 어른들은 광흥사에서 한문공부 했다고 하고, 한 40-50년 전까지는 서당이 있었대요. 주차장 만든 곳이 서당자리지요.”
느르치 마을의 빛과 그림자
윤정희씨와 헤어져 정자를 좀 살펴보고 있자니 웬 살집 좋은 아주머니가 천천히 걸어와서 우리를 곁눈질한다.
“거기 어예 들어갔니껴?”
아주머니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담 너머 길 한쪽에 서서 물어왔다. 대문을 잠궈 놓았는데 왜 들어갔느냐는 힐문이었다. 나는 윤정희씨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조금 더 정자에 머물렀다.
정자가 높이 올라앉아 있으므로, 정자에서 보는 주변 풍경은 마치 평지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앞의 산도 실제로는 높이가 꽤 되는 것이었지만 정자에서는 그저 야산처럼 나지막할 따름이었다. 앞산은 토성의 산세를 갖추고 평탄하고 밋밋하게 동남쪽으로부터 서남쪽을 향하여 흘러내리고, 서쪽 방향은 길게 터진 골짜기를 형성하며 열려 있었다.
이 마을 개척의 역사를 간직한 우물 아주머니는 정자에서 나올 때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예천서 여기 파평 윤문으로 시집을 왔다고 하였다.
“처음 시집 왔을 때 호랑이가 왔다 갔다 하고, 뒷산 바위가 굴러 내릴 것 같기도 해서 여간 겁나지 않았니다.”
진짜 깊은 산 속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인전 아무 걱정 없는데, 장 봐먹는 게 제일 불편해요.”
예천서 택시비가 1만 5천원이란다. 산성에서 버스 타고 예천 나갔다 와도 왕복 6천원. 관음절에서 안동 나가는 버스비는 그 반절 값이란다.
“주로 택시를 많이 타요.”
“아이고, 어예 비싼 택시를 타니껴?”
“넷이 타고 가믄 버스비보다 덜 나오지 않니껴?”
바깥양반은 지난 4월에 죽어 국립묘지로 가셨단다.
“육이오 때 여기는 빠지고, 큰 동네는 폭격을 맞았니더. 큰동네는 하루에 제사가 예닐곱은 되어요.”
아주머니와 헤어져 천주마을 쪽으로 나가 보았다. 천주마을과 느르치 마을을 가르는 것은 당곡. 양쪽으로 사람 키보다 높은 모래 절벽이 있고, 그 위엔 낙락장송이 줄지어 버티고 서 있는 곳이었다.
당곡 입구에서 시멘트 길은 끝나고 비포장의 모래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천주마을을 향해 뻗고 있었다. 천주마을 쪽 입구에 집 한 채가 있고, 개짓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천주 마을과 느르치 마을, 학가산 남쪽 기슭을 동으로 서로 나누어 서로 이웃해 있는 두 마을이지만, 두 마을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사람이 오가고, 천주마을에서 사람들이 넘어가 느르치에도 터전을 마련해서 사는 교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산 속 세상의 일일 뿐, 산 밖 세상과 연결되기에 이르면 금새 예천 쪽 세상에 속하느냐 안동 쪽 세상에 속하느냐 하는 편가름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었다.
개 짓는 소리에 쫒기 듯 다시 느르치 쪽으로 돌아오며 새삼 나는 끝내 자연이 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학가산 꼭대기 느르치 마을에서는 인간이 어디까지 자연으로 살 수 있는가, 인간이 자연이 될 수 있는 한계치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오랜 과정이 오늘도 역사처럼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느르치 마을과 당곡 사이 길가에 커다란 바위들과 함께 누운 죽은 이의 무덤 하나와 느르치 마을 속, 새로 지은 학서정 아래 비어버린 집 하나는 그 한계치 속에 있는 빛과 그림자이다.
빛은 무덤 위에 내리쬐고 있다. 무덤은 사방을 다 바위들에게 내주고 그 가운데 누울 자리 만큼만 봉분을 짓고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바위로 뒤덮인 마을에서 살다가 바위가 되어 바위 사이에 누운 느르치 사람. 그 자연이 되어버린 삶이 거기에 있었다.
그림자는 학서정 아래, 사람이 떠나버린 빈 집 위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뒤 울에서 뻗어올라간 밤나무 가지가 지붕 위에 팔을 걸치고 몸을 기울여 쉬고 있고, 지붕은 드럼통을 펴서 서로 중첩되게 덮은 집이었다. 그 무신경함의 미학이 환상의 어울림으로 살아날 정도로 집 주인은 자연스러움의 멋을 아는 사람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집을 비우고 없다. 그가 집을 떠나고, 집만 혼자 자연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은, 더 이상 자연이 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삶은 무엇인가? 인간의 생활은 이 질문에 답변을 하는 과정이다. 학가산 속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산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삶은 자연을 닮아 가는 것이다 라는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답변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산속 삶을 기웃거리는가? 느르치 마을을 돌아 나올 때, 질문은 엉뚱하게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의 풍경 속으로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는 학가산 아주머니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고된 노동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은 어디 소풍을 나서는 것 모양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웠다. 마치일상은 절대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법이 없소 라는 선언이라도 되는 것처럼.<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