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所志) : 억울하면 소송을 하라(글/정진영)

세상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원통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럴 때 관청에 원통함을 호소하는 문서를 일반적으로 소지라고 한다. 소지란 말 그대로 뜻한 바를 진술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송문서인 소지는 고문서를 소장한 가문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소송이 그만큼 제도화되고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랬다. 조선시대엔 소송제도가 잘 제도화되어 있었고, 또 일반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흔히 조선시대엔 그냥 ‘네 죄를 알렸다’는 식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한 것인 양 이해한다. 그래서 서양의 법과 제도에 대해 우리 것은 하찮은 것쯤으로 치부해 왔다. 이것은 도적을 잡아서 문초할 때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 민사소송에 있어서는 가당찮은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지 못하면 남의 것이 그렇듯 해 보이고 내 자신이 초라해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지의 다양한 쓰임새, 소송·청원·진정

소지를 소송문서라 하였지만, 사실은 소송만이 아니라 백성들이 관청에 제출하는 모든 문서를 총칭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소송뿐만 아니라 효자와 열녀를 표창해 줄 것을 건의하는 청원서, 원통함을 호소하는 진정서이기도 하였다. 그 이름 또한 발괄(白活)이라고도 하였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제출하는 등장(等狀), 사대부가 친히 올리는 문서인 단자(單子), 감사에게 올리는 의송(議送), 감사나 성주 또는 암행어사 등에게 두루 이용되는 상언(上言).상서(上書) 등도 소지의 일종이다.


소지를 관청에 올리는 사람은 대부분 양반들이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의 소송문서는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옛 문서를 온전히 보관해 오고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양반의 후예이고, 또 그들의 이해관계를 증빙하는 문서이니 오래 동안 잘 보관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었던 하층민의 경우에는 화풀이 삼아 휘둘러 대던 주먹다짐으로 관청에 불려가는 것이 고작이었지 이해관계로 서로 다투어야 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의 문서를 보면 많은 경우 양반이 아니라 그의 노비들 이름으로 제출된 경우도 많다. 땅을 사고 팔 때도 그러하듯이 표창을 건의하거나 단자를 올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반들은 노비들의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진정하고 청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남선면에 살고 있는 김생원댁 노 막동(金生員宅奴莫同)이가 삼가 소지(所志)를 말씀드리는 일은 이 댁 상전(上典)께서 운운 --- 순사또(혹은 성주)께서 처분해 주십시오.”


하는 식이다. 양반들이 노비를 내세운 것은 아마도 인의(仁義)를 따지고 천리(天理)를 궁구해야할 지식인이 이웃과 시비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이 어쩐지 멋쩍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지가 성주나 관찰사 등에게 제출되면 반드시 판결이 있게 된다. 이를 뎨김[題辭 혹은 題音]이라 하였다. 판결은 별도의 종이에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제출된 소지의 좌측 하단 부분에 큰 글씨로 휘갈겨지는데, 소지의 청원 대상이 되는 수령이나 감사가 직접 쓴다.


이러한 소지는 제출한 본인에게 되돌려 주어 판결에 대한 증거자료로 삼게 하였다. 뎨김의 내용은 직접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에 대한 직접적인 판결도 있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확인을 해야 하고 절차를 밟아야 할 문제도 있게 된다. 확인과 절차가 필요한 경우에는 담당 향리 등에게 지시하는 글귀로 뎨김이 쓰여 지기도 한다.


소송의 경우에는 단순한 호소와 청원과는 달리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패소자(敗訴者)는 관의 판결에 승복한다는 의미에서 다짐[考音]이나 불망기(不忘記) 등을 작성하여 승소자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소송 사건, 산송

조선후기 가장 많았던 소송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산송(山訟)이라고 답할 수 있다. 산송이란 산을 둘러싼 소송사건이나 그 핵심은 다름 아닌 조상의 묘지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조선후기라고 한 것은 조선전기에는 그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조선전기엔 조상의 분묘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었다. 불교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아들딸들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셨으니 책임감도 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손봉사 또한 흔한 일이었고, 자식이 없음에도 양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조선후기에나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혀를 찰만도 한 일이지만 그 땐 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윤리와 도덕, 가치관이란 세월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그랬다.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교로 내세운 지 2백년이나 지난 16세기쯤 되어서야 윤리와 도덕도 상당 부분 유교적으로 바뀌어졌다. 천지가 하늘과 땅 차이로 존재하듯이 아들과 딸들도 그렇게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세상의 중심은 단연코 아들이었고, 딸은 점차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되고 있었다. 아들은 아들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아버지, 그 아버지로도 이어졌다. 그래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고 그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봉심(奉審)하는 일이 중요해 지게 되었다. 부계친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상신을 인정하는 유교에서 조상의 신체를 안장한 분묘란 아주 중요하였다. 더구나 죽은 조상이 산 후손들에게 감응하여 음덕을 베푼다는 생각은 풍수지리설과 결합하여 명당과 길지에 대한 욕구를 더욱 강렬하게 하였다. 이것은 효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권장되기 까지 하였다. 이제 양반들은 조상을 명당에 안장하기 위해 수 십리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이산저산에 터를 잡아 직계 친손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독점해 갔다. 외손이나 친손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저 먼 옛날의 일이었다.


분묘는 일정한 영역을 가진다. 이를 국내(局內)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이 애초에는 몇 걸음으로 표시되다가 17세기 후반에는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로 확대되었다. 말하자면 산자락을 경계로 하게 된 것이다. 국내는 법적으로 보장되는 배타적인 영역이었으니 타인의 묘소가 들어 설 수 없었다. 여기에 18, 19세기 양반 인구의 급증과 하층민의 유교적 조상숭배가 일반화 되면서 분묘 조성을 둘러싼 다툼은 상하에 관계없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갔다. 


산송은 이러한 사정에서 조선후기 가장 흔한 소송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산송문제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투장(偸葬)이었고, 투장 가운데서도 역장(逆葬)이 가장 격렬한 싸움이 되었다. 투장이란 남의 묘역에 몰래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고, 역장이란 기존 묘지 위쪽 즉 머리부분에 쓰는 것을 말한다.


투장자(偸葬者)와 정소자(呈訴者)

산송을 제기한 사람은 누구이고, 그 대상자는 누구인가? 신분제 사회에서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곧 신분의 이야기가 된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呈訴者]는 대부분 양반층이었다. 그 상대가 된 것은 양반과 하층민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묘를 통해 산을 배타적으로 독점해 간 것이 양반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결국 양반과 양반과의 산송은 묘역(墓域)의 경계에 대한 문제이거나 산의 소유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같은 산송은 한두 번의 송사로 끝날 리 없다. 심한 경우에는 몇 대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일도 흔한 일이다. 경기도 파주 분수원(汾水院)의 윤관(尹瓘)과 심지원(沈之源)의 분묘를 둘러싼 두 집안의 산송은 조선 영조 대에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양반의 묘역에 불법적인 투장을 시도한 것은 대체로 중인 이하의 하층민이었다. 산을 가지지 못한 하층민들이 그들의 조상을 안장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하층민이라고 조상을 명당이나 길지에 안장하여 발복(發福)하고 싶은 욕망이 없을 리 없다. 하층민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투장하는 일 외에 달리 묘책이 없었다.


양반들은 투장을 감시하고 산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먼 곳에는 산직(山直)이(산지기)를 두어 관리하고 있었다. 하층민들은 한 밤중에 몰래 암장(暗葬)하거나,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을 함으로써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각되면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동절기라거나 농번기라는 핑계로 이장을 미루거나, 종적을 감추어 버리는 정도였다. 투장하여 이미 분묘가 조성된 것은 분묘의 주인이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지만,양반들은 불법적인 사굴(私掘)도 마다하지 않았다. 양반들은 하층민의 투장에 대해 범분(犯分)이라는 반상(班常)의 이데올로기로 대응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결국 하층민은 이데올로기와 관권, 그리고 법을 동원한 양반의 힘을 견디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산주(山主)인 양반과 하층민 사이에 전개된 산송은 비단 투장문제만이 아니었다. 조상의 분묘를 매개하여 마을 인근의 산을 사유화한 양반들은 하층민의 분묘조성만이 아니라 양산(養山)을 명분으로 하여 아예 출입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땔감이나 가옥의 건축 자재를 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으로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하층민들은 양반들의 분산(墳山)에 땔감을 채취하거나 서까래 하나 함부로 베어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금방 불려가 곤욕을 치르거나 송추(松楸) 투작(偸斫)이라는 죄목으로 소송당하기 일쑤였다. 산송의 상당 부분은 이 같은 문제에서 야기되고 있었다.


굴총하지 말라!

하층민의 양반에 대한 원망은 모든 지주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재지지주가 대부분인 경상도의 경우에는 지주가 소작료를 징수하거나 소작농민을 사역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혹은 계급적인 관계로만 대할 수는 없었다. 함께 생활하면서 농민의 곤궁한 삶을 일상으로 마주하고 있었으니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흉년에 소작료를 감하는 것도 모자라 도리어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구휼하기 위한 곡식이라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물론 지주라고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는 악덕지주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농민의 저주와 원망의 대상이었다.


하층민들이 저주하고 원망하였던 것은 이런 악덕 지주만이 아니었다. 농민의 또 다른 삶의 터전인 산에 조상의 분묘를 조성하고는 이를 기화로 주위의 산을 독점한 양반들도 저주와 원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동일인이거나 그렇게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조상을 명당에 모셨으니 그 음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농민들의 원성쯤이야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산과 토지를 독점한 양반들에 대한 농민의 분노는 결국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농민군은 악덕 지주를 징치하는 한편, 이제까지 양반들이 주도하였던 산송의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굴총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굴총이란 무덤을 파버리는 것이니, 말하자면 초법적이고 혁명적인 해결 방법인 셈이다. 농민군은 악덕 지주에 대한 직접적인 징치와 굴총을 통해 한편에서는 양반들을 위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농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아무튼 굴총은 조상숭배와 효를 최고의 가치관으로 살아온 양반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위협적인, 그것도 도덕적 윤리적인 폭력이었다. 농민들은 오랜 세월 억눌려왔던 불만을 이렇게 해소하고 있었다.


굴총은 동학농민군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활용된 것만이 아니라 농민군 지배하에서 촌락사회의 농민 일반에게도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이에 따라 사적인 원한이나 이해관계에서 양반들을 토색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마침내는 농민군이 단순한 도적집단으로 내몰리어 그 명분과 혁명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당시 동학군을 지도하고 있던 최시형은 마침내 각지의 동학교단에 굴총하지 말 것을 특별히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굴총하지 말라’는 특별 지시가 필요할 만큼, 굴총은 그렇게 기존의 사회질서를 허물어 버리면서 사적인 원한을 보상하는 분풀이로, 혹은 양반 부호가를 약탈하는 방법으로 폭넓게 행해지고 있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마련이다. 문제는 양반의 산송과 하층민의 굴총, 어느 것이 법이고 폭력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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