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동네, 법상동 회장님 신순옥씨(글/이미홍)
이번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여름이 더운 거야 당연한 거고, 덥지 않으면 또 무슨 여름이냐고 평소에 나도 생각하는 터이지만 그래도 올 여름은 유난스럽게 더 무더웠던 것 같다. 그냥 더운 게 아니라 습한 공기가 온 몸에 내려앉아 사람을 지레 지치게 만드는, 질척대는 그런 더위라고 나는 여름 내내 짜증을 누르며 그저 그런 소설들을 읽으며 선풍기 앞에서 씨름을 하며 지냈었다. 그 무더위가 8월의 막바지를 돌아가느라 뜨거운 입김을 있는 대로 짜내고 있는 걸 창문 너머로 내다보고 있는데 사랑방에서 전화가 왔다. 법상동에 정말 괜찮은 아주머니가 한 분 있다고. 만나러 가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회장님, 우리 회장님!
성소병원에서 골목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있었던 옛 동사무소 자리는 법상동 노인정이 되어 있었다. 얼핏 들여다보니 할머니 몇 분이 둘러앉아 무언가를 만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소일거리나 부업이라도 하고 계신 모양이다. 노인정을 지나 경안고등학교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돌자 안기동 쪽으로 넘어가는 큰 길 가에 새로 단장한 법상동 동사무소가 산자락 아래 단정하게 앉아 있다. 토요일 오후라 한적할거라고 생각한 동사무소 앞마당은 그러나 장고와 꽹과리를 든 아주머니들의 부산스런 활기로 토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찾아볼 길 없이 길을 향해 열려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오르는 옆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신순옥(65) 아주머니를 만났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동사무소 사무실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품이 자신의 집 안방으로 안내하는 듯 자연스럽다. 신아주머니가 사무실 안쪽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하자 일직을 서는 직원이 "우리 회장님, 오늘 인터뷰 하시는데, 이거라도 드시고 잘 하세요." 하며 음료수를 내다 준다. 사전 정보가 없었던탓에 사실 회장님, 회장님하는 걸 보고서야 대충 감을 잡았다. 공식직함은 법상동 1통 부녀회장이다. 법상동 전체 부녀회의 회장님은 따로 있고, 그녀는 전체 부녀회의 총무 일을 맡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순옥 아주머니는 이 동네에 이사온 바로 그해부터 시작해서 24년간 부녀회장 일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맡아 하고 있는 법상동 부녀회의 산 증인이자 동네 살림꾼이었다. 어째, 남아 있는 직원들도 그렇고 늦게 잠시 들르신 젊은 동장님도 그렇고 우리 회장님, 우리 회장님 한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그리고 부녀회 일이며 사는 일이며 까다롭지 않게 시원시원 이야기하는 모습만 봐도 회장님이 동네 일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실제로 법상1동 부녀회에 대한 신회장님의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는요, 일단 재미가 있어요. 부녀회 일이라는 게 나 하나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부녀회원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모여서 같이 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우리 부녀회는 서로 마음이 잘 맞고 협동이 잘 돼요. 부녀회가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니까 일하는 입장에서 신도 나고 보람도 있고, 무엇보다 서로 모여 사는 재미가 있어요. 특별히 별나게 잘 하는 건 없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니까 그런지 시에서 하는 동 대항 대회에 나가서 우리 부녀회가 상도 받고 그랬어요. 우리 자랑 같지만 윷놀이도 잘하고 풍물도 잘하고, 지금도 가을에 있을 국제탈춤축제와 민속축제 때 우리 부녀회 풍물패도 길놀이를 맡게 되어 지금 그 연습을 하느라 야단이예요."
그러면서 좀전에도 부녀회원들이 모여서 연습하러 가느라 동사무소 마당에 그렇게 있었던 거라고, 북, 장고, 상모 돌리기 같은 것은 대형을 넓게 해서 맞추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 연습하던 동사무소 위층 회의실이 좁아서 다들 경안여중 운동장으로 연습을 하러 간 것이라며 회장님도 취재를 마치면 그리로 가 봐야 한다며 은근히 우리를 재촉한다. 그러면서 대형을 맞추어야 하는 풍물 연습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 되기 때문에 더러 어려운 사정이 있어도 동네 일을 위해서 한 두 달은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예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열 일 제쳐 두고 풍물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벌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큰 희생이라며 믿고 따라주는 회원들에 대해 미안하고 고마운 속내를 털어놓는다.
법상동 살림꾼
그리고 또 한 가지, 동장님을 비롯한 동사무소의 전폭적인 지지(!)에 대해서라면 회장님이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미루어 알 일이다. 부녀회와 동사무소가 서로 믿고 하나가 되지 않고서야 아무리 앞에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열심이어도 밖에 나가서 1, 2등은 고사하고 제 목소리 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야 두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부녀회장 24년 연속의 법상1동의 큰 살림꾼 우리 회장님의 부녀회 살림살이를 이끌어 가는 노하우에 대해서는 한 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회장님의 살림 노하우를 잠깐 엿보자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례회를 회원들에게 따로이 부담을 주지 않고 부녀회장의 집에서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일 때마다 따로 큰 돈 들이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비빔밥 같은 것을 손수 만들어 먹으면서 아낄 수 있는 한 아끼면서 규모있게 살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다고 인정없는 짠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동네 일에 협조를 구하기가 어려운 법, 쓸 데는 써야 한다고. 그런데 쓸 데도 원칙과 도리가 앞서야 하는 법,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제일 먼저 신경을 쓴다. 물론 부녀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서 같이 도울 수 있는 것은 같이 돕고 그렇지 않은 것은 회장님 혼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주민들 전체의 복지에 관계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노인정 공간을 새로이 마련해 드린 일이라든가 추석 명절 같은 때는 물론이고 특별한 때가 아니더라도 어렵고 외로운 노인분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식사 한 끼의 작은 정성과 마음을 나누는 일을 계속적으로 함께 해 나가는 일들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모두가 함께 공감하면서 기꺼이 해 나가는 것. 그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장기집권의 특권을 톡톡히 발휘하는 회장님의 몫이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 모두 한 마음일 수는 없는 게 사람 일이잖아요. 때로는 사소한 일로도 마음이 상하고, 자기하고 뜻이 맞지 않다고 외면하고 하는 일도 더러 있지요. 저는 그렇다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어요. 그러면 또 찾아가서 이해시키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주고 힘든 일은 솔직히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도 청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요. 미운 사람요? 없어요. 다 이뻐요. 형제 같고 딸 같고 며느리 같고. 밉다 그러면 더 미운 짓 하고 뛰쳐나가고 하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사람끼리 다치고 상해가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어디 있나요. 내가 조금 손해 보고 웃으면서 살아야죠."
라는 그녀의 말은 솔직하고도 단순한 정답이지만 쉽지 않은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참여하는 것, 그건 모두가 즐겁고 좋은 일이다. 1동 부녀회에는 그렇게 즐겁게 하는 기꺼운 일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는 작년부터 짓고 있는 고구마 농사도 있다.
"부녀회에서 고구마를 심어 여름에 함께 김을 매고 가을에 캐서 어려운 가정에 나눠주고 있는데, 한 집에 한 상자 밖에 돌아가지 않지만 받는 사람들도, 주는 우리도 마음이 푸근하고 좋아요. 작년에는 60상자 정도 수확을 했는데, 올해는 100상자 정도 수확할 욕심으로 좀 더 많이 심었거든요. 그런데 봄에 가뭄이 들어서 수확이 얼마나 나올는지 모르겠어요."
한다. 보나마나 그 고구마 농사는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 그런 정성들로 지은 농사인데 잘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우리 때보다 더 현명하고 요령있게 해 나갈 거라 믿고 일을 넘겨주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저요? 동네 일에 노소가 있나요, 뭐. 저는 저대로 뒤에서 두레도 봐 주고 품앗이도 해 주고 잘 한다 응원도 해 주고 그러지요."
그네에게서 부녀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런저런 일상들이 뒤얽힌 정말로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법상동의 정경들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잘나가는 부녀회장님 보다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 많고 맘 넓은 푸근한 신엄마인 그네에게 더 많이 끌리고 있었다.
회사에선 신엄마로 통한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찌감치 아침밥을 지어 놓고 제대하고 경찰관이 된 막내 아들의 경찰복을 다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버린 후 시작한 보험설계사 일이 올해로 22년째다. 고참 팀장이자 송현지구 수석지구장을 맡고 있어 일이 만만치가 않다. 하는 일이 보험에 관계되는 일이다 보니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보다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나며 하는 일이 많다. 당연히 다리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네는 힘든 줄 모르고 기꺼이 그 일을 한다. 세월이 많이 바뀌어서 이제는 보험 일도 컴퓨터를 아는 젊은 사람들로 많이 바뀌었고, 그네같이 발로, 안면으로 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그래도 그네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집집마다 찾아가서 갖가지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노라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울고 웃고 하지만, 그것이 또 사람 살아가는 재미라는 걸 그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그네는 신엄마로 통한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고참이기도 하려니와 자기 밖에 모르는 젊은 여직원들을 때로는 눈물이 맺히도록 야단치고 때로는 언니같이, 엄마같이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다 보니 자연스레 붙여진 별칭이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정말 금상첨화로 똑 맞는 별명이다. 내가 보기에 그네는 회사에서만이 아니고 동네에서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신엄마 이다.
수금을 하려고 보험 계약자의 집을 찾아가 보면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마흔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딸 셋, 아들 하나 네 남매를 키우느라고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서일까? 그네는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아파 누운 사람에게는 약 한 봉지, 죽 한 그릇이라도 끓여 먹이고 나와야 마음이 편하고, 끼니를 굶은 사람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야 하는 게 그네의 마음이다.
한 번은 그네가 오랜만에 예전 보험계약자의 집에 가 보니 남편은 중병으로 오늘 내일하며 누워 있고, 젊은 아낙은 어린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살 길이 아득해 보였다. 그네에게 어찌 남의 일처럼만 보였을까. 그네는 누워 있는 애들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험을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대신 보험료를 납입했다. 한 달에 몇 천 원씩 하는 적은 액수였지만 잊지 않고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입했다. 그래서 몇 년 후 실제로 그 남편이 죽었을 때 망연자실해 있는 애 엄마에게 보험료를 수령해서 가져다주며 아이들 데리고 잘 살라고 했을 때, 그 젊은 부인의 눈물어린 얼굴을 그네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얼마 안 되는 그 돈이 그 부인에게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아 주었을 것이라고 그네는 믿고 있다.
"이상하게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질 못해요. 내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잘나지도 않았는데, 보면 그저 조금이라도 내 손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내가 우리 나이치고 는 그래도 한 달 받는 돈이 꽤 되는데, 내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어요. 이상하게도 마음먹고 목돈이라도 모아 놓으면 꼭 누군가 그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애초에 그 돈은 제 돈이 아닌 거죠."
좋은 일은 소리없이 하는 법임을 그네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사람의 진심은 사람들에게 파장을 남기는 법, 학비가 없어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이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알려져 신문사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돌아가신 시모 봉양을 잘 했다고 보화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네는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지키면서 살고자 할 뿐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의 일을 누군가가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법상동 부녀회는 텔레비젼에 이름이 나가는 연말 성금이나 모금에는 이름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내 가까운 이웃에 있는 아프고 힘든 사람부터 도와주는 게 정말 이웃을 돕고 함께 보듬으며 살아가는 도리임을 믿는 그네가 있기 때문이다.
아침 나절이었다. 출근했다가 일 때문에 바쁘게 어디를 가던 중에 오늘같이 햇볕좋은 날, 혼자 우두커니 동네 어귀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매요, 왜 그렇게 기운이 없으시껴?" 하니까,
"내사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늙으면 그저 죽어야지." 하신다. 그래서
"할매요, 이거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맛있는 거 사 드시고 기운 내서 노인정에도 나가고 그러세요." 하면서 2만원을 손에 쥐어 드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니 일자리가 없어 홧김에 술을 먹고 속을 이기지 못해 배를 잡고 있는 아저씨가 또 눈에 띈다. 속이 아프다기에 해장국을 한 그릇 사 안긴다.
그리고는 걸음도 잘 가누지 못하는 그를 택시에 태워서 차비를 주어 보내고, 아는 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엘 들렀다. 가난한 형편에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해야 하는 고달픔이 묻어 있는 환자의 말동무를 해 주고 나오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 다니느라 일을 쉬고 있다는 고객을 또 만났다. 점심도 안 먹었단다. 풍물 연습 때문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취재 약속도 있어 바쁘지만 그냥 내처 올 수는 없어 식당으로 데려가 점심 값을 주고 왔다.
우리와 만나기 전까지의, 삼백 예순 날, 바쁘지 않은 날이 없는 신엄마의 오늘 이야기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