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정 이야기(글/윤천근)


오! 물돌이동 하회마을!

물이 휘돌아 나가는 자리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마을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물이 휘돌아 나간다면 마을이 산과 물을 다 갖추고 있으며, 물이 휘돌아 나가는 주변에는 깊은 소를 끼고 있는 절벽바위가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점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과 산, 바위와 절벽, 강과 못을 한꺼번에 끼고 있는 경치 중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찌 있을 것인가? 물론 20세기적 양상 속에서는 이런 마을이라고 해도 꼭 하나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물이 더럽혀져 있는 경우이다.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 물돌이동의 미학은 물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니 물이 썩어 시궁창 냄새를 풍긴다면, 그 미학은 바탕으로부터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조망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다.


물돌이동 하회마을! 하회마을 미학의 비밀도 그 휘돌아 나가는 물에 있다. 하회마을을 감싸안고 흐르는 물은 첫 번째 계곡을 흘러내리는 것 같은 청정수는 아니다. 많이 더럽혀져 있는 물이지만, 아주 더럽혀져 있지는 않다. 따라서 가까이 가서 보더라도 아직 그 물은 물돌이동 마을 미학의 중심을 해체시켜 내지는 않는다. 아직 햇살 아래 배를 깔고 누운 하회의 백사장은 맨발을 묻고 싶은 유혹이 일 정도의 색감을 유지하고 있고, 천천히 휘돌아 흐르는 하회의 물은 아직 모래무지라도 어디 숨어있는가를 살펴볼 생각이 들게 하기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회마을이 아름답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하회마을의 길과 돌과 집은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 선조들이 주변에서 구해 집 짓고 담 쌓는데 이용했던 소재들, 그 자잘하고 평범한 소재들이 어울려서 이루어내는 형상들, 그 형상들을 지배하고 있는 부드러운 색감 -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이야 어디 쉽게 사라져 갈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회마을 미학을 해치는 것은 물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생활이 증발되어 사체처럼 박제가 되어버린 마을, 음식점과 민박집만으로 남아 남루의 자본주의 선전장이 되어버린 마을, 그런 마을 속 삶 자체가 오늘의 하회마을을 아름답지 않게 만들어 놓는다.


사람들의 삶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그 하회마을의 아름다움은 경관 외에서는 찾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경관으로서 하회의 아름다움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곳으로 걸어들어 간다면 하회의 삶이 그 경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회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우리의 시선을 위치시키지 않을 수 없다.


경관으로서 하회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강 가 소나무 숲 끝으로 나아가거나, 강을 건너서 건너편 언덕에 자리잡는 것이 가장 좋다. 하회마을은 물돌이동이고, 물돌이동 마을이 갖추고 있는 최상의 경관은 휘도는 물이 마련하여 주는데, 이 두 지점이야말로 그 휘도는 물의 미학을 감상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 건너편에는 정자가 있다. 마을이 강 동쪽에 있고, 밋밋한 산자락 끝, 휘도는 물이 만들어 낸 퇴적원에 자리잡고 있다면, 정자가 그 건너편, 마을의 삶으로부터 일정하게 차단되고, 물돌이동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척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자란 원래 생활 속에서 걸어나가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고자 하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탓이다. 생활 속에서 걸어나가고자 한다면 생활의 현장인 마을로부터 차단되는 곳이 선택될 수 밖에 없다.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고자 한다면 경관이 좋고 자연이 조용하고 너그럽게 둘러싸 주는 곳이 선택될 수 밖에 없다.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켜 주는 곳은 하회마을에서는 강 건너편이다.


강 건너편에서는 하회마을 주변이 다 한 눈에 들어온다. 병산을 지나서 휘돌아오는 물이 남산 발치로부터 크게 굽어드는 것이 보이고, 마을 앞 소나무 밭 끝을 타고 횡으로 길게 펼쳐진 백사장의 눈이 부시도록 희디흰 색깔과 그 너머 소나무 밭의 청자빛 푸르름이 어울려 빚어내는 뇌살적인 색감, 투명한 물이 일렁거리며 만들어내는 무수한 물비늘들이 햇살을 받아 번들거리는 모습, 저 아래 물살 아래 모래들이 쓸리며 만들어내는 무수한 황금빛 빗살무늬들 …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강 건너 이쪽, 북담과 입암이 있는 쪽이다. 이 쪽에서는 하회는 여전히 하회이다. 그냥 하회가 아니라 오! 하회!이다. 물돌이동 마을의 미학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하회를 볼 수 있는 곳은 하회 속이 아니라 강 건너 이쪽인 것이다.


겸암정 가는 길

옛날에 하회 사람들은 강 건너 이쪽을 출입할 때 어떻게 하였을까? 작은 배 한 척을 띄우고 뱃놀이 삼아 강 이쪽으로 넘어왔을까? 아니면 마을을 걸어나와 멀리 돌아서 강 건너편에 이르렀을까? 지금처럼 다리가 없는 바에야 어차피 어디에서든 물을 건너야 하였을 것이니, 배를 이용하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솔직히 나는 호기심이 유별난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부지런한 사람도 못된다. 그러므로 하회마을에 두어 번 들른 적은 있어도 강 이쪽까지 나의 발걸음이 미친 적은 없었다. 강 이쪽은 하회마을에서 건너다 보았을 뿐이니, 내게 있어서는 물 가 한쪽에 병풍처럼 솟아있는 절벽바위, 강 건너 편에 우뚝 서 있는 산자락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 정자가 있다는 정보야 익히 듣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 삼아 그곳을 찾아나설만큼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보면 《안동》지야 말로 나를 부지런하게 하고, 또 얼마쯤은 유식하게 하는 채찍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안동》지에 글 쓸 일이 아니라면 게을러빠진 내가 여기 저기 안동지역의 문화유적을 찾아 싸돌아 다니는 극성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해놓고 글을 쓴다는 것이 귀찮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나는 늘 이 점에 대해서 《안동》지에 감사한다.


광덕에서 일직 나가는 쪽으로 돌아들면, 길은 하회의 서 남쪽 물길 한쪽을 치고 산 위로 구불거리며 오른다. 그 길, 광덕 쪽에서 나오는 길이 막 하회의 물길 한끝을 내려다 보는 지점에 이르면 겸암정으로 가는 좁직한 시멘트 길이 옆구리에 열린다.


네걸음 쯤 되는 좁은 시멘트 길. 길의 초입에는 새로 세운 겸암정 표석이 있고, 길의 남쪽에는 낮은 소나무가 자라는 숲이 있다. 길의 북쪽은 논이다.
세상에! 하회 쪽에서 보았을 때, 나는 그곳이 높게 솟은 산인줄 알았었다. 미상불 높이 솟았다는 것은 맞는 평가이다. 그곳이 산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은 또한 높이 솟은 곳도 아니고 산도 아닌 곳이었다. 그곳은 물과 상당한 격차를 이루며 높이 달라붙어 있는 땅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높이 달아붙은 채로 광덕까지 거의 평탄한 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러니 높이 솟았다는 것은 하회마을 쪽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광덕 쪽에서는 맞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광덕 쪽에서는 하회마을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길 위에는 평화가 내리고 있었다. 인적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쪽은 소나무 숲에 의해 차단되어 그 아래 물길과, 물길 너머 하회마을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북쪽은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너른 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고, 광덕 마을은 아주 멀리 시야의 한 끝으로 밀려나 있어서 굳이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입부분에서는 북쪽도 낮은 구릉에 의해 막혀 있고, 얼마 안 가서는 구릉이 사라지지만 이번에는 시멘트 수로가 나타나 길을 따라가며 점점 높은 다리모양으로 시야를 차단한다.


한낮의 한적함은 길을 걸으면서도 졸음이 올듯하다. 태양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여전히 시멘트 도로 위에 길 가에 바짝 붙어선 소나무 그림자를 떨구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키 자란 산풀들의 느릿한 움직임, 길 위로 뛰어오른 메뚜기의 톡톡 튀며 나아가는 모습, 어딘가에서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낮은 하늘 위를 서성이는 잠자리들의 자태, 멀찌기 길의 한쪽에 내려앉았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몇걸음 걷고는 제 움직임에 놀라 표르릉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 다리를 이루며 올라가는 수로의 한곳에서 똑똑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그 물방울 세례를 온몸으로 받으며 그 아래서 남들보다 더 키를 키운 들깨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ㄱ 자 형상으로 굽어져서 들판 한가운데로 빠져 나가는 수로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버티고 서서 고개를 ㄷ 자로 굽혀 응시하는 자세로 멀리 어딘가 한 지점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는 황새 한 마리의 모습이 주변 대기 속에 한없이 나른한 분위기를 전파하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누워 마냥 시간을 보내도 아까울 것이 없을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의 발걸음은 터벅터벅,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나른하게 이어진다.


그 길이 끝나는 지점, 남쪽으로는 시선 아래 흙담과 기와지붕이 펼쳐진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곳이 겸암정임을 알 수 있다.
겸암정 뒷담은 흙을 다져 만든 진짜 흙담이다. 그 흙 담의 한쪽으로 불쑥 위성 수신용 안테나가 솟아 올라 있고, 동쪽의 삼각형 마당에는 자동차가 한 대 머물러 서 있으며, 한쪽에 고추 말리는 용도로 쓰인 2층 선반이 비닐을 뒤집어 쓰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정자, 생활을 통해 관리되고 있는 정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겸암정에는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사는 정자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된 정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정자에 사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오래된 정자를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어떤 모습일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정자 속에 담긴 현대적 생활이 어떤 분위기를 드러낼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히 오래된 정자에서 사람의 훈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정자 주변을 알뜰살뜰 돌보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정자 주변에 펼쳐진 삶은 오래된 정자라는 것이 갖는 분위기의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 통일성이 깨트려지면, 오히려 사람이 없는 것이 나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정자의 미학은 자연을 통해서 완성된다. 오래된 정자의 미학은 인공조차도 세월 속에서 자연의 빛깔을 얻고 있으므로 우리를 잔잔한 평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권능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자를 포함한 모든 문화재 가꾸기는 자연미학, 미학적 통일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겸암정 영역에서도 나는 그러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아무 배려 없이 후면을 장악한 수로, 전봇대 등의 콘크리트 구조물들, 흙담 한켠을 딛고 솟구쳐 올라와 있는 위성 수신용 안테나, 잘 관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시의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화초들이 여기저기 심겨져 있는 모습 등은 자연미학적 관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생활이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것을 들여놓을 때에는 최소한으로, 그것도 숨겨서 들여놓는 것, 그러니까 눈에 잘 안 띄게 들여놓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일성을 해치게 되는 방식으로 들여놓는 무신경함은 결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겸암정에 사는 사람은 종가의 가계에 속하기는 하지만 종손은 아니다.


"밖에 나가 살며 조상의 음덕도 많이 입었는데, 무인년에 와 보니 하도 퇴락해서 두고볼 수 없는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들어와 살 생각을 했지요. 살림은 거의 다 아파트에 들여놓고, 여기는 몇 가지만 가지고 들어와서 삽니다. 이중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일이 한정이 없어요. 풀 깎는 것만도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그런 노력을 나무랄 이유는 없다. 버려 두지 않고 들어와 사는 것도 장려할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노력이 빛이 나기 위해서는 통일성, 자연스러움에 대한 연구도 있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겸암정에 사는 사람의 노력이 빛을 얻고 있는 곳은 능허대 영역이다. 경암정의 서쪽, 좁직한 삼각형 형상의 공터 주변을 꾸미고 있는 미학은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이루어 거의 환상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 공터 쪽으로 나가는 문과 흙 담의 꾸밈 조차가 예사롭지 않은 품격을 갖추고 있다. 


흙담은 뒤울에서부터 직각을 이루며 뻗어나와 몇 개의 단층을 만들며 키를 낮추고, 끝내는 입암의 끝자락, 물길과 만나는 절벽 위까지 이르러서 멈춘다. 앞은 담을 치지 않고 옆으로만 막아선 것이다. 그 담에 박혀있는 문, 좁직한 능허대 영역으로 들어서는 문은 폭이 좁고 키가 낮다. 그 아래 쪽, 절벽 면 위에 우뚝 서서 멈춘 담의 끝 부분에는 흙 벽에 기와장을 심어 세 개의 중첩된 원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일견 유치한  시도같기는 하지만, 미학적 배려에 대한 무신경함, 그러니까 꾸미지 않은 꾸밈이 자연미학을 불러들이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 흙 담의 문을 나서서 비좁은 삼각형의 공지에 이르면 자연미학은 극치에 이른다. 빈 터의 한가운데에는 참나무 두 그루를 약 25센티 정도의 높이에서 잘라 놓았는데, 미상불 공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을 터이지만, 반듯하게 잘린 그루터기를 그대로 남겨 두 사람이 앉아 쉬는 의자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다리를 잘리운 참나무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루터기를 그대로 의자로 삼은 발상은 신선하기만 하다.


빈터의 남쪽, 절벽과 만나는 끝 부분에는 지붕을 새 기와로 바꿀 때 나온 옛 기와를 그저 줄 맞춰서 20여장씩 쌓아놓았을 뿐인데, 그것이 흡사 낮은 담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고, 층층이 겹쳐져 있는 가만한 곡선들이 횡으로 자잘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정겹기 조차 하다. 이 지역의 북쪽은 나직한 구릉과 소나무에 의해 차단되어 있고, 남쪽은 키 높은 참나무에 의해 막혀있으니, 이 지역은 사방이 적절하게 둘러쌓인 공간의 비의성조차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래저래 멋드러진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겸암정, 겸암정사

겸암정 영역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위쪽으로는 ㄱ 자 모양으로 굽은 살림집이 있다. 살림집은 전에는 초가였고, 뼈대도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근처의 화천서원을 없애야 했을 때, 그 뼈대를 여기 옮겨서 규모를 갖춘 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의 ㄱ 자 형상의 수선이 끝나는 곳에는 누다락 형식의 작은 방이 자리잡고 있다. 방의 끝에는 2미터 평방 정도 되어보이는 사각형 마루가 붙었다. 사각형 마루의 천장은 색다른 형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분명히 지붕의 목재가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닌 듯한데, 종으로 폭 좁고 각진 들보가 놓여지고 그 좌우로 둥그스럼한 형태를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아주 둥글지는 않은 판목이 네 줄 늘어서 있으며, 그 사이는 회벽으로 메꾸어져 있다. 그리하여 아주 약한 기울기의 ㅅ자 형상 연등천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이중으로 지붕을 한 것만 같은 모습인데, 사실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다.


정면에는 뒤쪽으로 방과 연결되는 문이 있고, 양 옆은 벽이다. 앞쪽은 난간이 매어져 있는데, 그 아래 쪽은 키 높이쯤 되는 허당이다.


처마 아래에는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색감의 현판이 매달려 있다. 현판의 아래쪽에는 횡으로 겸암정 중수계라는 글씨가 씌여 있고, 그 위쪽으로는 종으로 강도수덕(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 강신수의(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 강척수의(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라는 글씨가 씌여 있다.


ㄱ 자 형상의 서쪽 끝으로는 동쪽의 수선과 평행으로 허름한 초가의 헛간이 있다. 겸암정은 그 ㄱ 자 형상의 아래쪽에 위쪽 횡선과 평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겸암정은 입암 위 밋밋한 경사면에 위치한다. 산의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집을 앉힌 것이다. 그러므로 정면은 2층의 누대이고 후면은 단층의 집이 되었다. 겸암정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그 누대의 아래 쪽이다.


안내판이 서 있는 마당의 앞쪽 끝에 마련된 층계를 내려서면 아직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기도 전에 아래쪽으로 경사면의 앞을 막고 서서 작은 입을 벌리듯이 자리잡고 있는 누대 아래로 드는 문이 보인다. 난간 아래 쪽을 막아서 일선의 벽을 만들고 문을 낸 것인데, 문은 크기가 아주 작지만 아래로 굽은 문지방까지 만들어 달고 있는 규모를 갖춘 것이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누대의 아래쪽 허당, 그러니까 겸암정의 마루 아래이다.


겸암정 마루 아래쪽은 그대로 빈 터의 형상이지만, 양쪽에 달아붙어 있는 방의 아래 쪽과 뒤쪽은 흙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난간 아래의 허당은 앞이 열린 ㄷ 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앞쪽으로는 절벽에 이르는 좁직한 마당도 있다. 마당의 서쪽과 동쪽은 일선으로 담이 막아섰고, 강 쪽으로만 열려 있다.


겸암정은 나무의 탁하고 검은 색감과 벽면의 흰 회칠이 흑 백으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 색감은 담을 이루고 있는 흙 색깔이나, 절벽 쪽 좌 우로 늘어서 있는 키 높고 늙은 참나무 그루터기의 탁한 색깔과도 잘 어울린다.


겸암정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살림집 안마당으로 들어서야 한다.
겸암정은 중요민속자료 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에 위치한다.


"이 정자는 조선 명종 22년(1567) 문경공 겸암 유운룡 선생이 세운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인동현감을 거쳐 선조 25년(1592) 사복시 첨정이 되고, 이듬해 풍기군수를 거쳐 선조 28년(1595) 원주목사에 이르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건물은 중층 누각식의 팔작집으로 겸암정사 전면의 현판은 퇴계선생이 썼으며, 후면의 현판은 명나라 시인 원진의 글씨라고 한다."


안내판의 기록이다.


겸암정은 정면 4간, 측면 두 간이다. 양 옆으로는 방이 만들어져 있고, 가운데는 마루이다. 뒤쪽 안채의 마당으로부터 두 개의 문을 통해 마루로 올라서게 되어 있다.


그 두 개의 문 중 동쪽 문 위에는 마루 쪽 천장 아래에 겸암정사기 현판이 붙어있다. 이상정이 지은 것이다. 이 글에서 하회의 경치가 영가(안동)에서 제일이고, 또 입암 위에 자리잡은 겸암정의 경치가 옥연, 상봉, 원지 등 하회의 경치 좋은 곳에 비해서 제일이라고 적고 있다.


두 개의 문 중 서쪽 문 위에는 역시 안쪽으로 경암정사라는 글씨가 쓰인 현판이 달려 있다. 정자의 앞쪽 밖으로 처마 밑에 달린 현판은 겸암정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전면에 있는 겸암정이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고, 마루 안쪽에 붙은 겸암정사라는 현판은 명나라 시인 원진의 글씨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여기 살고 있는 분은 그런 시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둘 다 퇴필입니다. 원진의 글씨는 저 뒤에 있는 허수료라는 현판이지요. 안내판이 잘못되었어요."


그의 말은 단호하였다. 허수료라는 현판은 안채의 방쪽 처마 밑에 걸려 있다.
겸암정이라는 글씨와 겸암정사라는 글씨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글씨이긴 하였으나, 같은 사람의 손 끝에서 나온 것인지 여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겸암정이라고 하기도 하고, 겸암정사라고 하기도 한 것일까?


"젊어서는 겸암정이라 쓰셨고, 나이 드신 후에는 겸암정사라고 쓰셨어요. 겸암정 하면 아무래도 노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니까, 공부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해서 겸암정사를 쓰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겸암집》의 <년보>에 의하면 겸암정과 겸암정사는 처음부터 구분 없이 쓰여졌던 것 같다.
"목종황제 융경 원년 정묘년(선생 29세) 봄, 겸암정사가 낙성되었다."
<년보>의 기록이다.


"입암 위에 있다. 산수가 아주 수려한 곳이다. 이로써 겸암으로 스스로 호를 삼았다. 퇴계선생이 편액 글씨를 써서 주고 시 한 수를 적어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듣건데 군이 새 집을 잘 지었다 하니/ 가서 같이 하루밤 보내려 하나 말미를 얻을 수 없네."
역시 <년보>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글이다.




같은 곳에 보이는 다른 시 속에서 퇴계 이황은 재사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이 시를 차운한 권호문의 시 속에는 정사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러니 겸암정은 젊었을 때 붙인 이름이고, 겸암정사는 만년에 쓴 이름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


이 점은 두 현판이 다 퇴계 이황의 글씨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겸암정이 낙성된 것이 유운룡의 나이 29세 되던 봄의 일이고, 퇴계 이황이 병들어 타계하는 때가 유운룡의 나이 32세 되던 겨울의 일이다. 년보의 이 부분 기록에는 겸암정사 낙성시에 편액을 보내왔다는 기록 하나가 있을 뿐이다. 편액을 보냈을 때 둘을 한꺼번에 써 보내지 않았다면 두 기록이 다 퇴필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런데 과연 별 의미의 편차도 없는 겸암정, 겸암정사 둘을 한꺼번에 써 보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겸암정의 동쪽 방에는 마루 쪽을 향하여 강습재(강설하고 익히는 곳)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서쪽 방에는 역시 마루 쪽을 향하여 암수재(조용히 닦는 곳)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동쪽 방의 정면 쪽으로는 퇴계 이황, 송암 권호문, 서애 유성룡의 시가 나란히 새겨진 시판 하나가 붙어있다.


시간은 조용히 흐른다

겸암정은 남쪽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하회의 물굽이가 가장 넓게 펼쳐져 천천히 휘도는 곳을 질러서 남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겸암정의 앞 쪽은 탁 틔어 있다. 거기 있는 웃자란 참나무를 몇 그루 베어낸 탓이다. 나무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과 시야가 확 트인다는 것 사이에는 서로 다른 미학이 있다. 그 중 반드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겸암정에 살고 있는 사람은 시야가 탁 틔여, 하회 마을과 그 뒤쪽의 화산, 그 아래 쪽의 남산, 그리고 그 서쪽의 원지산을 다 돌아볼 수 있고, 휘도는 물과 백사장의 시원함을 다 느낄 수 있는 미학을 선택하였을 따름이다. 덕분에 정자의 마루에 앉아서도 시선은 그 모든 것을 휘돌아 거침없이 치달린다.


오후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러나 도시에서 흐르는 시간과 자연 속, 이를테면 겸암정 같은 곳에서 흐르는 시간은 양상이 다르다.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거나 너무 늦게 흐른다.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경우는 할 일이 많을 때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그래서 너무 빠르게 흐른다거나 너무 늦게 흐른다는 등의 생각을 우리가 할 수 밖에 없을 때,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시끄럽게 소리치고 일어나 우리를 지배하는 탓이다.


도시에서 흐르는 시간과는 달리 겸암정에서 시간은 조용히 흐른다. 마루에 앉아 가만히 먼 데 산과 들을 바라보는 순간에, 산 속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람소리를 희롱하고 있는 순간에, 시간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 듯 저만치 치달려가 있곤 한다.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는 것 외에는 따로 할 일을 갖지 않으므로,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복잡한 일거리로부터의 자유,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관계로 부터의 자유 - 겸암정 주변을 서성이고, 그 마루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고 있는 동안 나의 오후는 그렇게 저 혼자 흘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만큼, 겸암정 주변에 빠트려 놓은 시간 만큼, 내가 등에 질머지고 나아가는 내 인생의 무게는 조금은 더 가벼워졌을 것이리라.<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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