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소시민 손경식씨의 작은 반란(글/김현주)만약 당신의 집을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으로 건축 공사현장이 벌어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돌을 깨는 기초공사의 소음이 이른 아침부터 해질 녘까지 계속되고 찌는 듯한 한여름에 모래폭풍 같은 먼지로 창문조차 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잦은 기관지 염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임신한 아내는 친정으로 피신을 간 지 오래, 당신의 불쾌지수는 한계수위에 오른다. 이건 상상만으로도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건물인데 못 짓게 말릴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소시민의 하소연 따위를 누가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랴. 지레 성가시고 귀찮아 당신은 대충 참기로 한다. 불편하고 짜증스런 현실에 '적응하고 말지'하며 체념해본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고약하다. 시민의 생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행정기관과 건설사가 얄밉기만 하다. 당신은 새삼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떠올리고 분연히 일어선다. 먼저 공사현장을 찾는 당신. 소귀에 경을 읽는 게 낫지 싶다.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행정기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환경과와 건축과가 책임을 서로 미루더니만 뒤늦게, 소음이 기준치에 맞다며 우겨댄다. 이제 당신의 혈압은 최고 치에 이르지만, 소시민인 당신으로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
불행하게도 이 모든 건 더 이상 상상이 아니다. 당신의, 아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실제상황이다.
소시민의 자존심
"세대수도 적고 그래서 그랬는지 아주 우습게 본 거죠. 사과문이나 공고문 하나 없이 공사를 시작했으니까요."
지난 4월, 정화동의 석미아파트를 둘러싸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세 건의 공사. 아이들이 다닐 초등학교와 지역민들이 거주할 아파트를 짓는다는 명목이었다. 소음, 먼지와 교통사고의 위협속에서 석미아파트 사람들은 힘들었다. 공사현장을 찾고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었지만 돌아온 건 무시와 냉대뿐이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소한 희생, 그 서슬퍼런 명분 앞에서 석미아파트 344세대가 설 수 있는 자리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처음엔 열 받았지요.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건설회사와의 분쟁에서 석미 아파트 주민 대책위를 이끈 손경식씨. 그는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는 서른 중반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변변찮은 말주변에 성격마저 내성적이라 생전가도 큰소리 한 번 낼 일이 없었던 손경식씨도 이건 아니구나 싶더란다.
아파트의 완공은 2004년. 내후년까지는 손경식씨를 비롯한 석미아파트 사람들 누구에게도 가정이란 더 이상 편안하고 안락한 쉼터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알지 못하는 새 석미아파트, 344세대의 생존권이 자본과 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것이 무시당했을 때, 석미아파트 사람들이 피부로 느낀 건 권리의 박탈 따위의 거창함이 아니다.
그건 쉽게 말해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모멸감에 가까웠다.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한 서러움이자 약자의 한 같은 것. 하루하루 소시민의 일상을 힘겹게 지탱해 주던 마지막 긍지, 자존심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작은 전쟁 선포 "다시 하라면 못해요"
공사가 시작된 지 3개월 째 되던 7월.
손경식씨와 석미아파트 사람들은 주민대책위를 구성, 모두의 이름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목소리를 내기로 한다. 자본과 관을 상대로 작은 전쟁을 선포했다고 해도 좋다. 어쩌면 그들만의 싸움에 그치는 한이 있더라도 딴지는 한 번 걸어보자 싶었다. 손경식씨는 그 앞에 서기를 자처했다. 물론 처음엔 손경식씨 자신의 불편을 어떻게든 해소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고 손경식씨는 목소리를 높인다. 개인의 불편이기 이전에 344세대 석미아파트 주민 전체이자, 어쩌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고, 그런 정당한 불만을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창구조차 하나 없는 현실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불타는 사명감까지는 아니어도 손경식씨는 일종의 책임을 느꼈다. 권리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이다. 빼앗긴 권리는 아무도 누가 대신해서 찾아주지 않는다. 권리를 잃었다면 잃어버린 당사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권리에 대해 무지한 죄, 말이다.
"안동사람들은 너무 체면을 차려서 안돼요, 다른데 보다 특히 심한 것 같습니다. 다들 점잖만 빼면서 저절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니까요."
사실 손경식씨는 학교 다닐 때도 학생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인물이다. 집회니 대책회의니 하는 것들이 낯설고 어색하기는 여느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건설법이니 소송이니 하는 전문적인 지식에 있어서는 백치와 다름없이 무지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만은 꼭 해내야겠다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상처받은 자존심이 있었다. 아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손경식씨는 우선 주택사업관련법령집이라는 제목도 생소한 책을 구입, 임대아파트 법에 관한 것부터 살폈다. 자신의 권리가 어느 선까지이며 침해받는 부분은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규명해보자 싶었다. 주먹구구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정확하게 알아야 정확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나름의 파악이 끝났을 때 그는 정부 각 부처로 전화를 걸어댔다. 분쟁이 어느 부서의 소관인지조차도 모르던 그에게 그나마 작전이 있었다면, 맨땅에 헤딩하기쯤이 아니었을지…. 수소문 끝에 마침내 환경분쟁조정위원회의 도움을 받게 된 손경식씨. 비로소 일의 절차며 수순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자신과 같은 경우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고 또한 그에 맞서 투쟁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존재도 함께 알게 됐다. 그로선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충격이었으리라.
이 모든 과정은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워나가는 과정처럼 더디기만 했다.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야 하는 인내의 시간들이었다. 손경식씨, 그라고 해서 막막하고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에겐 모르면 배워서라도 가면 되지 않느냐는 다소 뻔뻔함이 있다.
"다시 하라면 못해요. 절대!! 오죽하면 차라리 밤에 몰래 이사를 할까하는 궁리까지 했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주민대책위로 모인 25명의 대부분은 지금껏 관청 출입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주부들. 다들 생계가 급하고 자기 일상이 소중하다보니 시간을 낼 수 있는 이는 주부들밖에 없더란다. 결국 모든 게 오롯이 손경식씨, 그의 몫이 됐다. 전체적인 스케줄 조정부터 자료를 조사하고 협상 안을 짜고 민원서류를 넣고 언론기관에 제보를 하고 소송을 준비했다. 이왕 할거면 전력투구를 하자 싶기도 했지만 또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고는 진척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기어이 오픈 예정이던 사업(결혼정보회사)까지 미루고야 말았다. 덕분에 아내의 잔소리까지 보태 손경식씨의 고충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힘든 건 혼자서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결국은 일 벌린 네가 결자해지 하라는 분위기였죠."
그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째 좀 쓸쓸하다. 지금껏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한 채 혼자서 끙끙 앓아온 게 많은 눈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일인데, 이 핑계 저 핑계로 몸을 사려 막상 소매 걷고 나서는 이는 많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협상에 협상, 조정에 조정을 거쳐야 되는 일인지라 불같던 기세가 점차 수그러들고 지쳐갔다.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고만 했지 바람은 제 각각이라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고 내부의 결속은 무너져 내렸다. 이 각본 없는 드라마에서 손경식씨가 맡은 건 늘 자신만만하고 물러서지 않는 리더역할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싶다.
"그만 두기에는 일이 너무 벌려져서 그럴 수도 없었죠. …누군가에게 떠넘긴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되더라고요."
한참만에 어렵사리 그렇게 덧붙인다.
대범해서도, 통이 커서도 아니다. 다만 작은 것이라도 그가 옳다고 여기는 신념이라면, 마음을 다해 믿는 것이라면 한 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어지간한 고집이다. 싫은 건 죽어도 못하지만 대신 하고 싶은 건 해내고야 마는 그에게선 보헤미안의 냄새가 난다. 그 널따란 허의 공간 속에서 뛰노는 기운 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는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자유와 행복을 꿈꾼다. 그에겐 그런 꿈들이 자신의 작은 권리를 찾는 데서 시작되고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냄새나는 푸근한 아파트로 만들고 싶다
10월, 분쟁은 끝이 났다.
보상이라기보다는 자존심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타협이 됐다. 어차피 소송까지는 원치 않던 일이다. 애초에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소모적인 공방을 벌일 일도 없었으련만…… 그래도 관과 자본에 소시민들의 매운맛을 따끔하게 보여줬으니 승리라면 승리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석미 아파트 전 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손경식씨의 감회는 더 말해 뭐하랴 싶은데, 그는 주민들이 대책위의 해산을 아쉬워하며 아파트자치회 참여에 훨씬 우호적이 됐다는 선에서 되도록 말을 아낀다.
그는 절반을 조금 웃도는 정도의 성공이라고 자평 한다. 비로소 권리를 되찾게 된 건 바람직하지만, 그는 이기적으로 때론 우격다짐으로 아파트의 이익만을 내세우건 아닌가, 공사의 지연으로 인해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건 아닌가, 권리를 내세우기 전에 의무는 다했는가, 그렇게 자신의 방법론이나 시선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다같이 사는 사회를 절감했다. 세상은 각각의 상충하는 가치관들이 조율을 통해 서로 이해하며 어우러지는 것인데, 그런 점에 있어 우리 사회가 너무 닫혀 있는 게 아니냐는 게 손경식씨의 생각이다. 관에서는 시민의 고충을 호소할 만한 창구 하나 마련해 놓지 않고,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할 의지도, 중재 기구도 없다.
이제 손경식씨는 미뤘뒀던 생계일을 시작했다. 결혼정보회사의 오픈을 치르고 영업을 위해 열심히 발 품을 팔고 있다. 그는 웨딩 전반을 총괄하는 전문회사를 목표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석미아파트 자치회를 맡았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 얼굴도 모르던 아파트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도 하고, 마음을 열고 교류하게 된 걸 기뻐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아예 아파트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예전의 동네처럼 푸근한 부침개 냄새가 풍기는 아파트로 가는 첫걸음으로 문화행사를 동반한 주민 축제를 계획중이다. 분쟁을 벌였던 상대 아파트와의 조인도 고려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데서 함께 참여하고 발전하는 공동체 문화의 실마리를 풀고 싶다.
개개인의 작은 행복을 넘어 다 같이 자유롭고 인간다운 세상, 살맛 나는 세상을 향한 평범한 소시민 손경식씨의 작은 반란은 그렇게 작고 낮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