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주도할 정신문화, 왜 유교인가(글/류선경)
교실이 무너졌다?
교실이 무너졌다고 난리들이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교사를 우습게 알고, 교사들은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선생은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학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교단의 권위가 없어졌다는 얘길게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우리 기성세대의 눈으로 본다면 학생들은 교사 알기를 우습게 알고, 버릇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대체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이상한 아이들이다.
상황은 더 복잡하고 확대재생산된다. 교사들은 교권이 사라진 이상 교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교사를 하지 않겠다고, 이제 교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그래서 정부가 잃어버린 교권을 되찾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도 교실붕괴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교사들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골몰하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도대체 이렇게 버릇없고 앞뒤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피땀 흘려 이룩한 근대화된 조국을 물려줄 수 없다고, 이런 무지한 아이들이 감당하게 될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라고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해결할 해법도 나온다. 충효교실을 열어서 아이들에게 충과 효와 예를 가르쳐야 한다며 너도 나도 충효교실을 열고 있다. 학교에서도 이같은 교육을 해야한다며 교실붕괴의 원인을 학교교육에서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노인문제 심각하다?
어느 때부턴가 노인문제가 제법 큰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경로우대시책이 등장하고 노인복지라는 듣기 좋은 정책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독거(獨居)노인(처음에는 홀로 도닦는 노인인줄 알았다)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노인들도 생겨났다.
정부가 큰 틀의 노인복지정책을 마련하고, 자치단체들도 앞다퉈 노인복지시책을 펴고 있다. "독거노인 생신상 차려드리기"가 아이디어로 등장하고, 독거노인의 위급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호출기도 설치했다.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풍토가 마련됐으니 흡족할 법도 한데 느낌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홀로 사는 그야말로 독거노인들도 있지만, 농촌의 소위 독거노인들은 대개 자녀가 있다. 서울로 떠난 뒤 소식없는 불효막심한 자녀도 있고, 개중에는 명절때만 찾아오는 명절형 자녀도 있다.
산업사회의 결과
버르장머리없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그리고 농촌에 홀로남은 그 많은 독거노인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흔히 우리는 이같은 문제를 산업사회의 필연적인 귀결로 인식한다. 산업사회가 개인주의를 초래했고, 그 개인주의가 바로 교실붕괴와 노인방치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얘기다. 틀림이 없는 말이다.
우리가 추구해온 산업사회와 우리가 신념처럼 신봉해온 자유민주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일 뿐인, 바로 그 교실붕괴와 노인문제를 우리는 왜 지금 새삼스럽게 문제삼고 있는 것일까?
해방이후 50여년동안 우리는 오로지 조국근대화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가지 목표를 향해 쉼없이 달려왔고, 그 결과로써 이제는 선진국의 대열에 더러 거명되고, 그렇게 소망하던 민주적인 정권교체도 이루어냈다. 목표를 달성했고, 앞으로 더욱 발전된 산업을 추구하고 더 세련된 민주주의를 실행하면 되는데, 교실 붕괴와 노인문제 따위가 뭐 그리 대수일까? 더구나 그것은 이미 고도의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경험한 선진제국에서도 노출된 문제이며, 산업사회로 가는 필연적인 통과의례라 하지 않았던가?
의식과 제도간의 불협화음
모든 것이 별문제 없고, 모든 것이 잘돼 나가고 있는데 왜 짜증이 날까? 정말로 짜증나는 정치권 때문일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변덕탓일까? 짜증의 이유는 바로 내면의 의식과 사회제도간의 불협화음이다. 3,40대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바로 이같은 불협화음의 연속이라는 점이 좀 더 선명해진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민주주의보다는 조국 근대화에 더 많은 가치와 무게를 두고 살았다. 내 자식들만은 배고픔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과, 내 자식만은 대학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집념으로 살아온 분들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들 아닌가? 그러면서도 우리 아버지들은 그들이 배웠던 가정교육의 방식 그대로 소위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
"무릇 장유유서라 하거늘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는 먼저 수저를 들지 말 것이며, 출필곡 반필면할 것이요, 가정의 중심은 바로 남편이라 할 것인 바, 그래서 삼강이요 오륜이라 하느니라."
정도와 방법과 언어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배웠던 그 밥상머리 교육은 바로 유가적 전통의 편린이라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들은 그래서 비록 반제, 반봉건의 기치아래 민주주의를 도입하긴 했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을 지닌 마지막 세대라 한다. 우리 3,40대 나아가 50대들은 바로 이런 전통의 편린을 배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것도 서구적 합리성과 절대개인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를 배웠고, 그 이데올로기가 20세기의 절대적 승리자임을 목도했다. 지난 7,80년대, 누구나 느꼈던 자유를 향한 갈망과 그 목마름, 그리고 끝내 거리로 뛰쳐나와 터질 듯 외친 자유와 민주, 시퍼렇게 날선 희망과 좌절과 분노와 용기를,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쟁취했다고 말한다.
이제 그 질풍노도와도 같던 20세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 혼재한 이중적인 잣대와 이중적인 사고에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불협화음의 연원은 바로 가정과 사회에서 비롯된 엄청난 괴리와 뒤틀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괴리와 뒤틀림을 갖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신념처럼 여기고 따랐던 자유민주주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과 권리 등의 개념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조선조 5백년을 지탱했던 유가의 이념은 관계와 미덕, 의무, 가족 등에 기초하고 있고, 이같은 개념을 토대로 충과 효와 예라는 골간을 갖는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어릴때부터 개인의 절대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집단에서의 화합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유가적 전통의 편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제도는 그렇지 않았다. 개인의 절대자유에서 출발한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제도로 자리잡았고 학교의 이론교육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배웠지만, 그것이 체득되고 내재된 사고의 틀로서 자리잡지는 못했던 것이다.
시비끝에 항상 나오는 말이 "너 몇살이야" 또는 "너 몇학번이야"다. 게다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선후배의식, 동창회와 동기회 등의 혈연과 지연, 학연이 얽히고 섥혀 있는 우리 사회를 과연 개인의 절대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적 환경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필요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유가적인 이념을 혼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실붕괴와 노인문제는 바로 이같은 혼란의 시작이요, 우리 기성세대가 우리 사회에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교사에게 덤벼드는(학생들은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의사표현이라고 한다) 학생은 군사부일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고, 그래서 기성세대는 그런 학생에게 버릇없고 장래가 보이지 않는 망나니라는 낙인을 찍는다.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효와 예를 강조하는 우리는 과연 효와 예를 알고 또 실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전통사회에서 노인문제는 사회문제가 아니었다. 노인은 당연히 가정이 책임졌고, 국가가 걱정하는 것은 노인문제 따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노인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고 이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자녀들이 버린 노인들을 떠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전통사회에서 사회안전망이던 가정이 이제 그 안전망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더 심각한 것은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야 할 가정의 주체는 바로 우리 3,4,50대라는 점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추구했던 잘 사는 나라, 배고픔이 없는 나라의 토대위에서,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추구해왔다. 산업화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절대가치가 추구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교실붕괴와 노인문제라는 새로운 갈등과 부닥치게 됐다.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었던 그 아버지들을 독거노인으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서구적인 합리주의 체질로 변화시킨다는 미명아래, 더러는 무한지애(無限之愛)같은 끝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아이들을 버릇없는 망나니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교가 대안이다
20세기가 동서간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였다면, 다가올 21세기는 화합과 평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으로 세계의 석학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전망은 20세기를 이끈 자유민주주의와 20세기 말엽에 등장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유주의는 개인, 자유, 권리, 사회와 같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며 아울러 이같은 단어들로 특징 지어진다. 우리 사회에서도 해방이후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와 권리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성을 부여받았고, 그 가치는 모든 가치에 우선했다.
개인의 자유를 보편적인 가치로 인식하고 그것에 기초한 사회제도가 바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신념을 갖고 20세기의 끝자락을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 한편에서 일제강점기를 통해 왜곡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전근대적, 봉건적인 관습으로 철저하게 매도됐고 유교를 말하는 사람은 고루하고 세월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유를 말하면서도 전통을 또다시 언급하고 있다. 유교적 전통을 고루한 관습으로 치부하면서도, 때로는 우리 자신도 놀랄만큼 유가적(儒家的)기풍에 젖어 있다. 비록 삶의 방식은 바뀌었다 하더라도 정신세계는 아직도 유가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고 아마도 우리는 이같은 내면적인 모습을 쉽게 탈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유교가 대안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렇게 황폐해진 정신문화를 유가의 이념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제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보편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으며,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같은 동양적인 가치가 더욱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서구에서도 이미 유학이 더 이상 구시대의 유산이 아니라 새로운 세기를 주도할 희망적인 이데올로기임을 예견하고 있고, 이같은 인식은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금융위기의 주범이라는 주장, 그리고 효율적인 국가관리론과 독재정권의 합화론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극과 극을 오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는 지금 21세기에 이 아시아적 가치가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그리고 아시아 각국이 20세기 말엽의 경제부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아시아적 가치의 핵심은 바로 가족주의와 공동체중심주의, 상하간의 엄격한 위계질서, 사회적 도덕성과 책임감등의 유교적 덕목이며, 20세기를 지배한 개인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이같은 유교적 덕목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수용됐으며, 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명확히 살펴봐야 한다.
서세동점의 시대에서 단 한번의 비판도 없이 무작정 서구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던 무모함을 이제 다시 반성해 볼 때가 된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무작정 비판하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조선조 5백년의 실체도 다시 생각할 때가 됐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조선왕조시대로부터 자유민주주의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런 비판과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일제강점이라는 혹독한 세월을 지난 뒤 곧바로 미국에서 이식된 민주주의로 변화했고, 이같은 급작스런 제도의 변화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정신문화를 재조명하고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제는 정말로 조선조 5백년을 지탱한 정신문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우리의 정신문화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때다.
유교문화권개발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산업사회에서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외양과 21세기를 주도할 정신문화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내면의 두축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유교문화권개발은 참으로 중요하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