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닥불이 되는 따뜻한 꿈(글/권진희)
소설 몇권으로 쓸 수 있을 한많은 사연, 군더더기 없이 참으로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안상학 시인의 신작 시집(『안동소주』(실천문학사))이 오랜만에 나왔다. 첫 시집 『그대 무사한가』(한길사)가 나온 지 만 8년만이니 시를 업(業)으로 사는 시인으로서는 오랜 기간이라면 오랜 기간이 걸린 셈이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을 꼽자면 첫 시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없이 사람들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이별」, 「씨동무 박일환」, 「납뜰 고모」등의 시편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그 중에서도 「납뜰 고모」는 안상학 시의 특징이 잘 드러난 경우다.
시집갈 때 보자기 하나 달랑 안고
가구서 납뜰까지 걸어서 갔더란다. 오십 리 길
열여덟 새색시 설움 반 설레임 반
가마도 없이 연지 곤지 족두리도 없이
두 살 아래 조카 하나 길잡이 세워
그 춥던 동짓달 다리도 없는 반변천
맨발로 물 건너 시집살이 갔더란다.
물 건너다 얼어붙은 조카,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고, 못내 마음 아파
그 길로 물 되건너 바래주다 결국
동창이 박혀 생고생한 미련퉁이였더란다. 첫날밤
합환주 한 잔 없이 옷고름을 풀었더란다.
몇 달이 가도 말이 없어 그렇거니 하던 신랑
말 못하는 벙어린 줄 나중에야 알고
고향 하늘 바라보며 그리 섧게 울었더란다.
찢어지게 가난한 고향집
아귀 같은 입 하나 줄이는 게 그래도 나아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앞 못 보는 봉사처럼
그렇게 억척같이 살았더란다.
배는 남산만해지고 이내 맏아들 낳아
줄줄이 생기는 대로 낳아 구 남매를 두었더란다
-[납뜰 고모] 전문-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가서 '몇 달이 가도 말이 없어' 비로소 맹인인 줄 안 것이나, 그래도 '아귀 같은 입 하나 줄이는 게' 나아서 봉사처럼 구 남매 낳아 기르며 억척같이 살아온 '납뜰 고모'는 극도의 궁핍을 강요당한 채 전통적 봉건윤리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온 우리네 민중적 삶의 한 전형일 터이다. 흔히 힘든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말하듯이 "소설로 쓰면 몇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이같은 한 많은 사연을 시인은 한 줄의 군더더기도 없이 참으로 간결하고도 어느 하나 빠뜨림 없이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히 이 땅의 하고 많은 시인 가운데서도 안상학 시인만이 지니고 있는 시적 특징이라고 할 만 하다.
어릴 적 한때의 기억에 머물는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굴절된 과거속에서 온전히 재구성되고 있다
이번 신작 시집에서는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 자신을 키워주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안동을 중심으로 자신의 유년에 대한 언급이나 생활 주변의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점도 뚜렷한 특징의 하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안 시인은 "지금까지도 안동에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이 지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지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이 시편들은 아마도 그러한 애착의 결과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모래골 이야기'를 비롯해서 역시 같은 부제가 붙어 있는 일련의 시편들에서는 자신이 자라온 유년의 기억에 대한 따뜻한 반추가 눈길을 끈다.
마을 첫머리 집에는 일환이가 살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동갑내기 내 동무
이듬해 우리는 나란히 초등학생이 되었다. 모두들
가슴에 손수건을 단 우리를 깔학년이라고 불렀다.
동무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를 부르며
고샅과 학교 길을 무던히도 밟고 다녔다.
여름이면 냇물로 나가 물놀이를 했다.
소꿉 밥을 짓는 마당 깊은 집 계집애가 보거나 말거나
엉덩이를 까놓고 물장구치며 놀았다.
오디를 먹었는지 입술이 파래지도록 뛰놀다
그 계집애가 지은 흙밥을 털어넣고 냇물을 마셨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에 다닐 때 만성 충수염을 앓았다.
밤이면 더러 형을 따라 일환이네 집으로 갔다.
갓 중학생이 된 형은 고등학생인 일환이 형에게
밤늦도록 영어를 배웠고 우리들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며 졸기도 했다.
어쩌다 잠이 깊이 든 날이면 형에게 업혀 온 듯
눈을 뜨면 집인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숙제를 하지 못해
학교에서 손바닥을 맞기도 했다.
이승복을 알면서 동무동무 씨동무 노래도 뜸해질 무렵
일환이는 다시 서울로 갔다. 그 뒤
나는 처음으로 일등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일환이의 얼굴을 잊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가족도 그 마을을 떠나 읍내로 이사를 났다.
- [씨동무 박일환 - 모래골 이야기 7]전문 -
누군들 자신이 살아온 어린 시절에 대한 따뜻하고 정겨운 기억이 없을까 마는 유독 모랫골 이야기 연작이 눈길을 끄는 것은 인용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의 회상이 그저 어릴 적 한때의 기억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굴절된 과거 속에서 온전히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갓 중학생이 된 형이 밤새도록 일환이 형에게서 영어를 배웠다는 기억이나, '이승복을 알면서 동무동무 씨동무 노래도 뜸해'졌다는 구절은 종전(終戰) 이후 미국의 무상원조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대미의존적 경제과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이승복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봉건적, 획일적 사고방식이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정겹고 살가운 '씨동무'에 대한 노래를 잃어가게 되었다는 시구는 그 시절, 난방도 되지 않은 채 삐걱대기만 하던 '국민학교' 대강당에서나 찬바람 숭숭 불어대는 운동장에 서서 이제나 저제나 끝나기 만을 기다리며 반공웅변대회를 들어야 했던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을 우리 사회의 지난날의 자화상이라고 할 것이다.
큰 연못가에 있었다는 돼지를 치는 아저씨가 '돼지 콧김이 통통방앗간 굴뚝마냥 푹푹대던/ 어느 초겨울 날 고개를 넘어간' 뒤로는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돼지아비 - 모랫골 이야기 6」)는 이야기나, '여름밤 들마루에 누워 별을 헤다'가 '월남치마 어머니 무릎베개에 깜빡잠'을 자던 시인이 '멀리 사격장 총소리에 깨어보면/ 벌겋게 단 총알이 하늘로 올라가다 사라졌다'(「사격장 - 모랫골 이야기 4」)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들어서 본격화된 빈농정책이나 분단 현실을 빌미삼아 도시 근교에서도 함부로 사격장을 만들어 총알을 퍼부어대며 통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반북의식(反北意識)을 조장하던 지난날의 쓸쓸한 한 단면이 이들 시편에서는 생생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신작 시집에는 '뒤란 구석진 곳에 소주고리 엎어놓고/ 장작불로 짜낸 홧홧한 안동소주/ 미추룸한 호리병에 묵 한 사발/ 소반 받쳐들고 나오는 주모가 그립다'는 구절이 인상적인 「안동소주」를 비롯해서, 안동시청 앞 분수대에 세워진 유네스코 국토순례기념비와 관련된 [기념비], [봉정사], [선어대 나루에서 봄을 기다리며], [향수] 등 안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시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시인이 안동에 대해 얼마나한 애착을 갖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역사와 삶에 대한 변치 않는 견결한 진지함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서 새 천년 우리문학이 걸어가야 할 한 좌표를 발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신작시집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삶과 현실에 대한 시인의 치열한 성찰과 모색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아직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지난 80, 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서 치열하게 모색되어왔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접지 않은 것이다. 시인은 아직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부단한 고민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자세에서 안상학 시인은 여느 시인과 다르다. 마치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더이상 우리가 아파하고 고민해야 할 무엇이 남아있지 않기라도 한 듯이, 뿌리도 근원도 찾을 수 없는 동양철학이나 고전으로, 가벼운 아포리즘으로 펜을 돌리는 이때, 역사와 삶에 대한 변치 않는 견결한 진지함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서 새 천년 우리문학이 걸어가야 할 한 좌표를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내가 그 기나긴 겨울
맵찬 바람이 불거나
눈보라 칠 때도 아랑곳 않고
언 땅 속에서 발 동동 구르며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기다린 것은
이런 봄이 아니었네 만화방창
삼삼오오 화사한 상춘객이나 보자고
꽃버들 벚꽃 그늘 아래서
부푼 꽃가슴 눌러가며 기다린 것은 더욱 아니었네
내가 기다린 나의 봄은
꽃으로 피자고 피어 또다시
폴폴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가자고
날아 또 어느 곳에 떨어져
질긴 목숨이나 이어가자고
뿌리 깊은 발돋움하며 기다린 것은
더욱 더 아니었네
내가 기다린 나의 봄은 오직
강동치마 여자애의 작은 노동,
나물 바구니에 뿌리째 담겨
사랑과 그리움의 속내음으로 피어
그리하여
내가 기다린 나의 봄은
꽃도 없이 다시 사는 것이었네.
- [냉이꽃]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