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빌리기(글/김윤한) "니 마누라 좀 빌려다고."
참으로 황당한 얘기였다. 퇴근하고 한 잔 하자는 친구 황건민의 꾀임에 공짜로 소주 서너 병을 얻어 마시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마신 술이 확 깨버렸다. 건민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말하는 투가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보였다.
"임마, 미쳤나 그기 무슨 소리고?"
말인즉 이러했다. 유달리 술을 좋아하는 이 친구는 나이 서른 다섯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탓에 퇴근 이후에는 어디다 정을 붙일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특기라고는 술 마시는 것밖에 없는 이 친구는 직장의 주당들 몇과 어울려 자주 술집에를 들렀다는 것.
그러다 술집 종업원인 한 아가씨와 알게 되었고 주말이면 함께 동해쪽으로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건민은 별다른 계획없이 그 여자를 만났지만 만난 지 석달여가 지나자 서로 어느 정도 정이 들었다.
그날은 그 여자의 생일이었다. 건민은 그 아가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건민에게는 그날이 바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건민씨, 우리 결혼은 언제 해요?"
건민과 사귀는 그 술집 종업원 아가씨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건민은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사실 그 아가씨와 가깝게 지냈던 건 사실이지만 결혼 상대자로 생각해본 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그래서 엉겁결에 결혼한 몸이라는 거짓말을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강자씨. 사실은 나, 처자식 있는 몸이야. 그라고 강자씨완 가깝게 지냈던 건 사실이지만 그냥 친구 이상으론 생각해 본 적 없어. 미안해."
아가씨의 얼굴이 갑자기 확 굳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건민은
묵묵히 실내포장 천장의 사방연속무
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술집 탁자 사이를 지나다니던 손님들이 심각한 둘의 표정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탁자에 놓인 성냥알을 똑똑 분지르던 그 아가씨가 오랜 침묵 끝에 이윽고 입을 열었다.
"행동을 쭈욱 지켜봤는데 결혼했단 건 거짓말예요. 생계땜에 이렇게 살지만 부모 잘 만나 대학 나오고 겉으로 얌전떨면서 안 보일때는 별짓 다하는 그런 여자들보담 깨끗해요. 두구 보세요. 결혼하면 누구보다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카세트에서는 분위기에 맞지 않게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민은 곰곰 생각했다. 결혼했다는 말이 거짓으로 들통나면 꼼짝없이 발목을 잡히게 될거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고 했지만 결혼했다는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돌 지난 토끼같은 딸도 하나 있어. 내가 왜 거짓말하겠어?"
건민은 그 아가씨를 타이르듯 말했다. 진지한 태도에 수그러들 줄 알았던 그 아가씨의 태도는 전혀 예상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그럼. 나한테 부인 인사시켜줘요."
뜻밖이었다. 흔히 그 정도면 물러설텐데 그 아가씨는 달랐다. 기혼자라는 말에도 끄덕않고 감히 부인을 만나보겠다는 거였다.
"그건 말도 안돼. 마누라가 우리 사일 아는 날이면 난 뼈도 못 추려. 그리고 만나면 강자씨도 무사하지 못할거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무사하지 못할거란 협박조의 이야기도 덧붙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만일 내일 이 시간, 이 자리에 부인을 데리고 나오면 모든 걸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못 데리고 나오면 난 절대루 죽어두 포기 못해요."
아가씨는 또박또박 서울 말투로 '절대루, 죽어두'란 단어에 힘을 주며 건민을 올려다보며 선언을 했다.
거기까지가 현재까지 진행된 사건의 전부였다. 있지도 않은 건민의 부인과 그 아가씨가 만나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 마누라가 독감 때문에 못 나온다. 그래서 내일은 틀림없이 같이 나올거다라고 이야길 했는데 데리고 나갈 마누라가 어디 있냐 그래서 제일 친한 너한테 마누라를 빌려달라고 어렵게 말하는 거니까 제발 꼭 부탁을 들어달라. 내일까지 누구든 마누라랍시고 그 아가씨한테 얼굴을 보여줘야지 안 그러면 자신의 신세가 쫄딱 망한다는 거였다.
"아니, 크게 걱정할 건 없어. 그냥 옆에 앉아서 묵묵히 있기만 하믄 돼. 그담은 내가 알아서 할거니까."
내 마누라를 잠시동안 건민 자신의 마누라로, 야구로 말하자면 '지명대타'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왕 술은 얻어먹었고 또 우리 둘 사이가 그렇게 박절하게 거절할 처지도 못되고 또한 처지가 안됐기도 해서 주책없이 "그러마"고 말해버렸다. 그날 그 이후로는 서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얼토당토않은 남편의 부탁
"뭐락고요?"
얼토당토않은 남편의 말에 내가 펄쩍 뛰었다. 새파랗게 대어 들었다. 세상에 빌려줄 게 따로 있지 친구에게 자기 마누라를 빌려주는 그런 얼빠진 사람이 어디 있나 싶어 뭐라고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심한 말을 남편에게 막 쏘아 부쳤다. 그 바람에 딸 순지가 깨어서 심하게 울어댔다. 아침 시간부터 우리 집에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생각해봐. 처지가 딱하잖아. 남 인생도 한 번 생각해봐. 건민인 그 아가씨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거야."
남편은 건민씨와 한 약속도 있고 해서 나를 얼르고 달래고 해서 어쨌든 그 지명대타의 역할을 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듯 매달렸다. 건민씨라면 남편과는 둘도 없는 친구로 나에게도 무척 잘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결혼식때 사회를 보기도 했지만 결혼 부조로 오십만원을 선뜻 내어놓을 정도의 사이였다.
"희선씨, 당신 참 마음고운 여자야. 오늘 저녁 꼭 나갈 걸로 믿어. 일곱시 세무서 앞 이층 '로즈'야. 나 출근한다. 사랑해 희선씨"
남편은 평소에 안하던 애교까지 떨면서 부탁을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출근을 해버렸다. 집안에는 다시 나와 딸 순지만 남았다.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도 황당함때문에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탤런트도 아니고 남의 아내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유치원 때 백설공주 역을 맡아 연극을 해 본 적은 있지만 가정주부에게 이렇게 중요한 연극을 해야 될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사람좋다는 소릴 듣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남편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내가 나가지 않게 되면 건민씨는 봉변을 당할 것은 물론 마음약한 건민씨가 그 아가씨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건민씨의 관계, 아니 우리 가족과 건민씨의 관계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참 건민씨는 딸 순지 첫돌 때도 몇 돈이나 되는 반지를 선물하기도 했었다. 집에 올적마다 우리 순지를 얼마나 귀여워했던가. 그런 건민씨가 어렵게 부탁을 했는데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이 서먹해질 것이 뻔했다.
나갈까 말까 하는 갈등때문에 점심을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가 지나갔다. 멍하니 창밖에 눈을 돌렸다. 내리던 눈발이 차츰 멎고 있었다. 시간이 오후 여섯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때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사랑하는 희선씨. 꼭 나와줘. 나도 거기 나갈거야. 옆자리에서 술 마시고 있을게. 부탁해요."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간이 임박해지자 점점 초조함이 더해왔다. 나도 모르게 친정집 들국화아파트로 향했다. 친정어머니에게 던지듯 급하게 순지를 맡기고는 종종걸음으로 실내포장 '로즈'로 향했다.
안돼! 그건 내 마누라야
주점 '로즈'의 분위기는 흡사 어느 시골마을에 와 있는 것처럼 고즈넉했다. 사람들의 좌석은 원두막처럼 만들어놓았고 그 원두막 지붕은 이엉을 엮어 얹어놓았다. 그리고 좌석 사이사이에는 싸리문을 해서 달아놓았다.
괘종시계가 일곱시를 치고 있었다. 건민과 그 아가씨는 옆 좌석에 이미 와서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고, 십분 여가 되어서야 아내가 청바지 차림에 아이보리색 롱코트를 걸치고 나타났다.
"여기야 여보."
건민이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다. 그리고 건민과 그 아가씨, 내 아내, 아니 건민의 가짜 아내 이렇게 셋이서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서로 간단한 수인사를 주고 받았다.
"제 남편이 실수를 한 거 같은데, 아가씨 이제 정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연속극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내는 제법 능숙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를 포함해서 아내 희선, 그리고 건민 우리 셋은 강자라는 한 사람을 상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셋이서 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 강자라는 그 아가씨가 갑자기 흰 봉투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약간은 취기가 있어 보였다.
"너는 웬 년이야? 건민씨 호적등본도 다 떼어봤는데 네가 마누라라고? 이리나와 이 망할 년"
아가씨는 순간적으로 마시고 있던 동동주 잔을 아내의 머리로 확 끼얹어 버렸다. 동동주 속에 들어있던 찹쌀알들이 흡사 게워놓은 음식처럼 아내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아내의 멱살과 머리끄뎅이를 양손으로 움켜잡고 출입문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안돼, 그건 내 마누라야"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내가 급히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여자의 손에 얻어맞은 아내의 코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구 맙소사.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아내에게 '죽었다'고 복창할 수 밖에 없었고 아내는 그날 당한 수모를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게 꺼내들었다. 그 일로 해서 나는 아내에게 평생 죽어지낼 수 밖에 없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