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일마을 이야기(글/임세권)
행정적으로는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이지만 가일로 통한다. 안동에서 하회를 가자면 하회 거의 다 가서 길 오른쪽에 가일 못의 제방이 보이고 제방 옆으로는 큰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아래에는 얼마 전에 세운 독립투사 권오설의 기념비가 서 있다. 마을 뒤의 주산인 정산은 산꼭대기에 우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데 산봉에서 곧장 남쪽으로 흘러내린 야트막한 능선이 가곡1리와 2리를 가르고 있다. 하회 못지않게 전통이 많이 남은 마을로 권주 종가를 비롯하여 조선초기부터 이 마을에 자리를 잡은 안동권씨의 오랜 집들이 아직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우리의 아득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 마을 뒷산에는 이렇게 숨은 듯이 나 있는 오솔길들이 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이 좁은 길들은 마치 지금의 인터넷망처럼 이웃간에 정보를 소통시켜주기도 하고 처녀 총각들의 인연을 맺어주기도 했다. 가곡 초등학교 앞에서 병곡선생 묘소 앞을 지나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저녁 햇살이 뛰엄 뛰엄 떨어져 있다.
우리 전통가옥의 문은 그대로 예술작품이다. 동곡재사의 해맑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방안을 환하게 밝히는 흰색 빛살을 배경으로 실루엣으로 걸려있는 격자 문살들은 미술관 벽에 걸린 추상화보다 더 추상적이다. 이 문은 닫혔지만 밖의 빛을 안으로 들여주고 안의 공기를 밖으로 내보낸다. 한국사람들의 본래 성정이 개방적인 것은 이 문과 관련있을 것이다. 왼쪽 벽 위에 낸 광창이 추상화의 격조를 한 차원 더 높였다.
이제 가일의 기와집들도 서서히 퇴락하여 간다. 사람이 없는 빈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손 본지 오래된 기와골들도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래도 현대식 자재들로 새단장된 집보다 사람없는 빈집이지만 여기서 더 사람냄새가 나는 것은 사는 사람과 무관한 찾은 이의 잘못된 감상 때문은 아닌지. 이 집에서도 진짜 사람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으면 좋겠다.
뒷곁 처마끝까지 쌓인 장작더미들은 언제나 보는 이를 푸근하게 한다. 낙엽이 지고 가을이 갈 무렵이면 뒷산에 올라 부지런히 나무를 해와서 뒷마당에 쌓아 놓고는 시나브로 장작을 패서 가지런히 쌓아 놓는다. 건너편 헛간 벽에는 솔가지같은 잔 나뭇가지들을 가져다가 쌓아 말리고 했는데. 이제는 장작도 모양이 달라졌다. 일터에서 쓰고 남은 각목도 있고 지붕고칠 때 빼낸 못쓰는 서까래들도 있다. 하긴 나무한다고 뒷산에 오를 사람도 없고 새벽에 노인 방에 군불 지펴 줄 사람도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