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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맥 변호(글/김원길)

안동사람의 사람됨과 처세를 드러내는 일화는 부지기수이겠지만 민간에 퍼져있는 우스개들 중에는 이것이야말로 영락없는 '안동식'이란 생각이 드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1973년 봄날 나는 시인 서정주선생을 안내하여 안동장터 구경을 나섰다. 구장터에서 사장둑 넘어 새 장터로 걸어가다니까 흰 두루막에 갓을 쓴 노인이 길 바닥에 새로 짠 멍석 몇 잎을 깔고 앉아 그걸 팔고 있었다.
"이 덕석 얼마요?"
"천 사백원 전엔 안팝니다."
"천 사백이라구요? 천 오백이든지 이천이지 왜 꼭 천 사백입니까?"
"내가 이걸 짜노라고 꼬박 열나흘 걸렸으니 천 사백 받지요."
서선생은 내게 멍석 한 잎을 나중에 열차편으로 부쳐 달라 하곤 그 노인에게 천원권 한 장과 오백원권 한 장을 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 노인은 거스름돈 백원을 들고 따라오며 내가 분명 천 사백원이라고 했는데 왜 천 오백원을 주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가지시라니까 고맙다고 하는게 아니라 "무슨 경우가 그러냐"며 한사코 그 백원권을 서선생 포켓에 쑤셔넣는 것이었다.
"물건이 하도 좋아서 더 드리는 거니 받으십시오."하고 다시 건네니 그제서야 "물건이야 나무랄 데 없지…"환하게 웃으며 받아 넣었다.
서선생은 이 일을 일기에, 신문칼럼에 그리고 내 첫시집의 서문에까지 써서 안동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일로 기록했고 안동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고장이라고 분명히 썼다.
서정주 같은 대시인의 형안이 안동을 이렇게 높이 보는데 정작 우리 안동사람들은 이 멍석장수 영감님의 행위에 별다른 뜻을 읽어내지 못하는 듯 하다.
이 멍석장수가 글공부를 한 선비였는지 민촌의 농사꾼이였는지 알 수 없으나 '巧言令色鮮矣仁'(교언영색 선의인)이나 '見利思義'(견리사의) 등의 정신주의가 몸에 밴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선비란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知性)을 갖추어야 옳은 선비인 것이다. 다만 이 분이 시대 감각에 뒤떨어져 보이는 것은 '士'가 저자 거리에 나 앉아 '商'을 하니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안동사람들이 장사수단이 모자라는 것과 그래서 늘 상권을 외지인에게 빼앗기는 것도 우리의 선대들로부터 선비정신을 물려받은 덕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960년대 초 이과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어쩌다 가전제품 대리점을 열게 되었다. 손님이 들어와선 이것저것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랑 바둑을 두고 있던 이 청년은 일어서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게 아닌가.
"손님 왔다. 일라그라" 친구가 깨치자
"서서 파나 앉아서 파나 값은 같은데 뭐…"
이 이야기는 흔히들 안동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불친절 사례로 항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우스개이다.
이건 불친절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받고 있지만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무인판매대를 불친절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신용사회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손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무인판매가 가능하듯이 상품과 메이커와 손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으면 굳이 손님에게 교언영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찰제로써 가격표를 붙여 놓았으니 더 받을 이유도 깎아 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다만 불량품이나 장물따위를 속여 팔 때, 그리고 불순한 동기가 있을 때만 손님에게 아첨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고 사막에 제설차를 팔아 먹는 것을 본받으라고 세일즈 교육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제품들을 속고서 샀던가! 우리는 최근들어 너무 이런 식의 상거래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나 아닌지?
마케팅이니 세일즈를 품질과 가격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사기적 수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안동 선비의 후예로서 따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결국 장사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은 '思無邪'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다만 그만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

신작로 가 미루나무 그늘에 두 영감이 마주 쪼그리고 앉아 모종의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입회인도 없이 길가에서 그러고 있는 게 극비 계약인가 보다.
대추빛 얼굴의 덩치 큰 영감이 대추씨 같은 말라깽이 영감에게 말한다.
"자, 이제 됐네. 여기 임자 도장 찍게"
말라깽이는 개화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어 자기 이름 석자 밑에 도장을 찍는다. 그런데, 인육이 없어 글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도장에다 "하"하고 입김을 불어선 다시 찍어 보았지만 그예 마찬가지다.
대추씨는 낭패한 얼굴로 덩치를 쳐다보았다.
"걱정말게"
덩치는 자기 도장을 꺼냈다. 글자에 인육이 좀 남아 있는 걸 보고 씩 웃더니 대추씨 이름 밑에 꽉 눌러 찍었다.
"거긴 내 자린데…"
덩치는 대꾸 않고 그 옆에다 이렇게 썼다.
"汝之印章이 不分明하니 我之印章으로 代하노라"(네 도장이 잘 안 보이니 내 도장으로 대신 찍는다.)
대추빛 얼굴의 이 호호야(好好爺)를 내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민첩한 사건해결 솜씨나 위기 관리 능력이 천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신뢰를 지닌 어짐에 있다. 어떠한 제도도 법률도 이런 순수무구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 순 없는 것이다.
안동사람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배타적이라 한다. 허나 의롭고 아첨할 줄 모르고 어진 점을 왜 볼 줄 모르는가! 하나같이 어리석어서 숙맥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 누가 손해 본 사람 있는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