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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있어 화사한 가족, 김봉한씨네(글/이광수)

잠시 옮겨와 살고 있는 그의 집은 네식구가 차지하는 공간보다 악기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더 풍요롭다. 아버지는 바순, 어머니는 비올라, 큰아들은 첼로, 작은 아들은 클라리넷을 전공이나 취미로 다루고 있다.
김봉한씨 가족은 음악이라는 공통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아우르며 살고 있다.

수년전 극장에서 "홀렌드 오퍼스"라는 영화를 보면서 접했던 알싸한 감동의 기억이 떠올랐다.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깊은 이해와 사랑을 담은 영화로 기억된다. 아련한 당시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번 이웃이야기의 주인공 태화동 나팔집(이웃에서 이르길 속칭)을 찾았을 때는 끝물의 가을을 무색하게 하는 따스한 햇살로 인해 봄이 온 양 착각이 일었다.
음악가족이라는 무딘 표현보다 오히려 나팔집이라는 친근한 단어가 어울릴 듯한 작은 전셋집에는 네식구가 차지하는 것보다 악기가 누리고 있는 공간이 더

풍요롭다. 집에 들어서면 우선 악기는 차치하고라도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담은 액자가 한번쯤 시선을 멎게 한다. 5년마다 한번씩 찍는다고 하는 가족사진이 처음 찾은 사람이라도 가족 구성원과의 대면을 친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안방에는 김봉한·엄화숙 부부의 여행기를 옮겨놓은 듯한 사진들이 걸려있다. 집을 새로 짓던 중 IMF가 시작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 작은 전세집을 얻어 살고 있는데, 이런 집안 분위기 덕인지 어설픈 적막감이나 배부른 호사로움이 엄접할 수 없는 화사함이 스며있다.
40년이 넘도록 음악을 해오면서 한번도 악기를 놓아본 적이 없다는 김봉한(54)씨는 아내 엄화숙(47)씨와 큰아들 태훈(27), 쌍둥이 딸 윤정(21)과 기정(21), 막내아들 정훈(18) 다섯 식구를 아우르며 살고 있는 가장이다. 여섯 식구 모두 하나 이상씩의 악기를 솜씨좋게 다룰 줄 아는 것이 사실이지만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대단히 이상적인 가족을 연상해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어렵다. 어느 가족 어떤 구성원 누구에게나 한가지 취미와 능력이 있듯이 이들 가족에게는 음악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있을 따름이다. 특별하다는 것이 범접하기 힘들다라고 하는 것과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늦깍이 음대 졸업생 부부
김봉한씨의 부모님은 해방 전까지 북한 회령에서 살았다. 아버지 삼형제 모두 음악을 했고, 바이올린이나 클라리넷 등 웬만한 악기는 다 있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약주 한 잔 하고 들어오실때면 의례히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는 것을 들으며 잠을 청하던 때의 기억이 참 좋았다고 한다. 북에서 시계점을 하시던 김봉한씨 아버지는, 남한에 가면 좋은 악기가 흔해빠졌고 오히려 쇠가 없어 밥을 못해먹는다는 말을 듣고 무게도 엔간한 솥 두 개만을 달랑 짊어지고 안동까지 내려왔단다.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하고 엿장수에게 팔아버린 솥과 함께 시작된 가난은 김봉한씨가 자수성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난은 배움의 기회도 앗아갔다. 간신히 철도직원용 패스를 얻어 대구교대 시험장으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열차는 연착을 했고 도착해서는 학교까지 타고 갈 버스비가 없었다. 반시간여 달려갔지만 시험 시작종은 이미 울린 뒤였단다. 당시 눈밭에서 한시간이 넘도록 울었다는 그는 마흔 한 살, 불혹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한 늦깎이 졸업생이다.
아내 엄화숙씨도 음악과의 인연이 있었던지 자연스레 피아노를 쳤었고, 결국은 음악대학을 가기에 이른다.

간호고등학교를 수료했지만 졸업증서가 주어지지 않던 학교였기에 방송통신고등학교를 3년 마치고서야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는 이미 결혼한 이후라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고 밤에는 방송을 들으며 공부를 했다. 남편은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만났다. 당시 안동교대 음악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워볼 욕심으로 연락을 했다가 마침 부재중인 탓에 거리를 뜻없이 걷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김봉한씨의 악기점을 발견한 것이다. 현대음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피아노를 들여놓고 시작한 이 악기점은 당시 안동 유일의 악기점이었다. 엄화숙씨는 교수님을 만나 뵐 때까지 얼마 동안만 이곳에서 연습하겠노라고 부탁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삶을 여유있게 취미로 하는 음악
김봉한·엄화숙씨 부부는 자식들에게 음악하기를 한번도 강요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앞서 범상치 않은 가족이라 지레짐작하고 시작하면 이 음악가족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전제를 내달았던가. 김봉한씨는 자식들에 대한 음악적 신조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음악을 전공해서 음악과 함께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취미로써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렵던 시절에는 예전의 음악가들처럼 어딜 가서 이걸 연주를 해야지, 그걸로 몇 푼이라도 받아야지 그랬어요. 하지만 무대 앞에서 연주할 때는 좋을지 몰라도 돌아서면 힘든 것이거든요. 그런 생활이 싫어요. 어느 정도 경제적인 받침이 되어 살면서 가족이 모이면 여유롭게 음악 하기를 원해요."
김봉한씨 가족 누구도 음악에 목매달며 살기를 원치 않는다. 큰아들을 제외하곤 음악을 전공으로 삼은 가족이 없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의 음악은 자기만족이나 우리의 자랑거리!와도 거리가 멀다. 김봉한씨는 안동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아들은 피아노 반주를 맡는다. 수 년전 교회에서 가족음악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온 가족이 다 출동했었단다. 중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길주중학교 교장으로 계신 김봉한씨 형님과 안동여중 음악교사를 하고 있는 동생을 비롯하여 조카들까지 악기를 하나씩 집어들었다고 한다. 여든을 넘기신 어머니마저 짝짝이를 들고 함께 했다고 하니 남들의 부러움을 일순에 받지 않았을까 싶다. 온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기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행복한 일일진대, 그것이 그저 듣기만 해도 반가운 음악이라는 것이 그 값어치를 더하고 있지 않았을까.

엄화숙씨는 방송고를 졸업할 즈음 음악대를 가기 위해 비올라를 시작했다. 마흔을 넘긴 나이로 아들보다 두학번 아래인 94학번으로 당당히 입학을 했고, 지난 98년 안동대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 같은 학번의 동기의 언니로, 아줌마로, 엄마로, 불리면서 대학생활을 한 그는 맏아들과의 협연을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꼽는다. 아들이 앞에 나가 협연을 하고 엄마는 뒤에서 오케스트

라 멤버로 반주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고
한다.
음악과를 졸업했지만 그는 현재 안동과학대 관광일어과를 다니는 대학생이다. 올해 졸업반인 그녀는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 욕심이 많은 아내를 두고 남편이, "음악과 공부하던 때부터 계속 일등만 하면서 다녀요. 전에 음대 다닐 때도 장학금 받으며 다녔어요. 그 정도로 보통이 넘어요."라고 거드는 품이 아내의 지금의 모습을 꽤나 자랑스럽고 뿌듯해하는 듯 하다.
"사람이 너무 차이가 나면 안되잖아요. 그쪽에 대해 너무 모르면 이해가 안 되요. 내가 배우기를 멈추지 않으면 남편과 대화하는데도 덜 빠질거고 가족이 어울리는데도 나을 것이고, 그러고 나중에 며느리를 봐도 며느리가 날 무시 덜할 테고(웃음)…"
그녀가 공부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를 식히지 않는 이유다.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도 남편의 음악회 때 아내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보다 한사람의 음악회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녀는 관광일어를 공부해서 일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야학식의 강습소를 차려 가르치고도 싶단다. 지난 영국 여왕의 안동방문 때 일본인 가이드가 하회를 소개하고 리포트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가 일본어 공부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녀 자신이 공부해서 몸소 안동을 홍보하면서 많은 곳을 다니고 싶은 이유에서다. 이런 그녀의 얘기에서 단순히 그녀의 공부에 대한 욕심만이 엿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학생 엄화숙씨, 그녀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는 가족들의 지대한 믿음도 알 수 있었다.

어릴때부터 음악감각 타고났던 두아들
현재 김봉한씨 여섯 식구 중 김봉한씨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생이다. 고등학생인 막내아들과 대학생인 아내와 두 딸,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는 큰아들까지. 큰아들은 안동대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건국대 음악교육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큰딸 윤정이는 고려대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둘째딸 기정인 충주교대를 다닌다.
그리고 김봉한씨는 83학번, 엄화숙씨는 94학번, 큰아들은 92학번으로 안동대 음악과 동문만도 셋이다. 특히 두 아들은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감각을 드러낸 바 있는데, 큰아들이 돌을 막 지나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진열장을 잡고 일어나 겨우 걸어가서는 어른도 제대로 소리내기 힘든 트럼펫을 불더란다. 막내아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혼자 흥얼거리더니 피아노로 그대로 옮겨쳐서 놀라게 한 적도 있단다.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악기를 가르쳐준 적도 없었고 보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음악적 감각을 타고 났었나보다. 쌍둥이 두 딸은 아들만큼의 재능은 없어도, 피아노 하나 정도는 보통 이상으로 거뜬히 쳐낸다고 한다.

테잎 두 개에 담아 음악나누기
김봉한씨는, 중학교에서 3년 동안 음악을 배우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에게 배운 노래 하나 불러봐라 라고 시키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라면서 안타까워한다. 그런 이유에선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물 한 살에 교단에 서서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학생들에게 꾸준히 요구하는 것이 있다. 하모니카 하나 정도는 불 줄 알고 졸업을 하라는 것이다. 별다른 기술 없이도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업시간 틈틈이 가르친다. 평소 체벌을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 때만은 매를 든다고 한다.
얼마전 김봉한씨는 학생들이 하교한 학교 음악실에 혼자 남아 녹음기를 틀어놓고 직접 자신의 트럼펫과 섹스폰 연주를 테잎 두 개에 담았다. 40년이 넘도록 해 온 음악인생을 정리할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그 테잎을 들은 사람들의 입소문이 꼬리를 물어 지금까지 수백개 가까이 직접 복사해 이웃과 학교, 교회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정작 안동에 살고 있는 친지들에게는 지척에 살고 있으니 다음에 주지… 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여직 주질 못했다고 미안해한다. 참 흐뭇하다. 자신의 가족에겐 스스로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남들에겐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베푸는 모습들이.
IMF 한파가 사회곳곳을 휘몰아치던 때가 언제였나 싶게, 자리를 잡아가는 이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며칠전 서울역 지하도에서 얼어죽었다는 40대 남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섣부른 판단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버려지는 아이가 20년만에 증가추세로 돌아섰고, 앵벌이, 홈리스라는 용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런 사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뿌리부터 위협하고 있다. 단단하게 쌓아온 성(城)으로만 알았던 가정은 경제 위기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IMF 시대 우리 가정과 삶을 비추는 전부는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를 위협하는 현실 앞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려울수록 가족들을 껴안고, 가족들을 한번 더 생각하는 게 이 시대를 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자세다. 가정을 사회의 기반이자 반영이라고 한다. 가정마저 깨어지면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김봉한씨는 가끔씩 시간을 내어 산을 찾게 되면 반드시 서둘러 정상에 오른다. 그리고는 목까지 차 오른 숨 한 번만 얼른 내뱉고 트럼펫을 입에 문다. 생경하기만 한 트럼펫 소리는 어느새, 정상에 이미 올라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온한 휴식을, 저 아래서 힘겹게 오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덜어주는 소리가 된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되잖아요. 또 어느 곳에서건 음악은 곁에 있고, 이처럼 음악 속에서 사니까 푸근한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부터도 어려울 때 음악을 듣거나 가족들과 화음을 맞춰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면 그 순간의 어려움을 잊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함께 여유를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면 세상 살아가는 것이 다 좋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가정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김봉한·엄화숙씨 부부가 이제는 이웃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한호흡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마냥 가슴 벅차 오르게 만든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