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성터에 찍힌 어머니의 기도(글/김승철).jpg)
이번 사랑방 잡지 '안동'(1-2월호) 표지 사진을 보는 순간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는 김수영의 "눈"이란 시 몇 구절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툭 던져 놓는 순간, 푸르청청한 댓잎 위에 더 흰빛으로 앉은 눈을 보며 오래 잃었던 물건이 어느 날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이듯, 오래 잊고 살던 기억 한 토막이 난데없이 툭 불거져 나와 머릿속을 헤집듯이, 그 사진 속 장독 위에는 정한수(井華水) 한 사발과 그 앞에 허리 구부러진 엄마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김수영의 시와 정한수, 얼른 줄긋기가 안 되는 이 두 장의 필름이 어떻게 한순간 내 머릿 속에서 만나 한 장의 사진으로 현상되었을까?
<<<장독 위 맑은 정한수 한 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기도>>>
대나무는 올곧은 역사(죽간, 죽림칠현 등)의 상징이고, "눈"이란 시는 눈(雪)과 눈(眼)의 동음이의어의 효과를 살린 시로써 눈(眼)은 비판이므로 눈과 눈을 통한 강렬한 자기 비판 내지는 역사 비판 의식의 표현이라는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어줍잖은 기억의 조합이 빚어낸 것이리라. 혼자 낱말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 생각을 펼쳐 나가보았다.
옛날 마당 한 모퉁이 돌아 뒤란으로 가는 곳에 대나무(시누대-해장죽)가 옹송옹송 있고 장독대가 그 언저리에 있었다.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거나 길일이라는 무슨 무슨 날엔 어김없이 (동짓날만은 팥죽이 얹혀있었다) 엄마는 흰 사발에 찬물 한 그릇 올려놓고 구부정한 허리 더 구부리며 나무 등걸 같은 오그라진 손을 연신 비비며 중얼중얼 하는 모습을 어슴 새벽 뒷간에 갈 때나 웅얼거리는 소리에 부엌 장지문을 열고 보기도 하고 뒷 창문으로 보곤 했다. 어떤 신성한 것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죄짓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우리가 본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우리 아들 셋의 이름을 더 크게 부르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기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뤄지는 내밀한 언어의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은근히 보여주는 기도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걸어 갈 때 뒷사람을 생각하며 처음 발자국 찍는 마음, 보이지 않는 준엄한 싸리 회초리 대신 치성 드리는 사랑의 모습으로 빛을 향하는 넝쿨 식물처럼 곧게 한 방향으로 우리를 곧추 세우려는 훈계요,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옳지 않은 일, 가지 말아야 할 길 앞에서 망설이거나, 혹은 힘들어 우리가 주저앉아 길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나침반이 되고, 힘이 되고, 주술적인 힘으로 와 닿게 하려고 우리가 보이는 그 곳에 정한수 떠놓고 빌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이번 호 표지를 다시 바라보니 분명 거기엔 댓잎과 흰눈을 배경으로 놓인 장독 위에 맑은 정한수 한 그릇 내 안에 댓잎 부딪는 싸아한 찬물 소리로 담기고 있었다.
눈(雪)은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 앉는 자리가 더러운 곳이든지 깨끗한 곳이든 그 스스로가 정화(淨化)의 힘을 지니고 있기에 구정(垢淨)의 구별이 없는 불보살과 같기 때문에 댓잎에, 장독에 쌓인 눈(雪)은 어머니의 '정한수'다. 자식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지켜보는 어머니의 싯퍼렇게 살아있는 눈(眼)이다.
마당에 떨어진 눈(雪)은 역사의 '정한수'다. 못난놈들끼리 몸부비며 뭉툭한 돌부처로 살지만 두 눈 부릅뜨고 위정자들이 큰길 가기 바라며, 또한 이 나라가 잘되도록 합장하고 치성 드리는 민중의 '정한수'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