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유업자 이야기(글/김윤한)내 직업은 자유업이다. 언젠가 아이가 유치원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적어오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썼던 적이 있다. 달리 내 직업을 부를만한 적당한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유업, 그런대로 내 직업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한 만큼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세상은 각박한 것,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냉혹한 이 세상의 진리이다.
자유란 이름이 들어가는 건 무조건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의 이름을 보더라도 자유란 이름이 수없이 많이 들어갔고, 또 세계적으로 볼 때도 사람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 자유란 이름을 마음껏 누리며 산다. 뚜렷한 출퇴근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아쉬울 때면 언제나 나가서 벌면 되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얻고 사는 것, 그것만큼 당당한 것은 없다.
내 직업은 별로 밑천이 들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다만 내 직업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사업장벽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장사가 잘 되어도 남들이 금방 따라할 수 있는 사업이면 금새 같은 업종이 수없이 생겨나고 그렇게 되면 내 사업은 망하고 마는 것이다. 어쨌든 내 직업은 사업장벽이 높아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여태껏 큰 불경기를 모르고 지내왔다. IMF다 뭐다 할 때도 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집에서 쉴까 하다가 그래도 처자식을 가진 가장의 입장에서 형편이 좀 낫다고 해서 쉴 수는 없었다. 느지막이 점심밥을 챙겨 먹고는 사업을 위해 대문을 나섰다.
먼저 차 트렁크 속의 공구를 꼼꼼히 점검해야 하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드라이버, 철재 절단기, 쇠톱, 비상 열쇠, 손전등, 간이 사다리 등이 내 작업도구이다. 작업도구를 확인하고는 차에 시동을 넣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매우 좋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벌이도 늘 괜찮은 편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아내가 대문밖까지 전송을 나왔다. 아내는 참 좋은 사람이다. 아내 나이가 벌써 서른 중반에 들었지만 아주
머니로 보는 사람은 드물 정도로 젊게 사는 편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아내는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이라고들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얼굴 형태는 탤런트 김희선을 많이 닮았고 이목구비는 최진실을 많이 닮은 것 같다. 게다가 몸매는 주위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글래머이다.
"오늘 늦을지 몰라. 집 잘 보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아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시내로 향했다. 내 사업은 주로 주택가 쪽과 관련이 많기 때문에 낮에는 주로 그쪽으로 현장조사를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은 강남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시내에는 교통이 엄청나게 막혔다. 강남지역 주택가까지 오는데 꼬박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나는 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다. 결혼 한지가 육년이 지났지만 원래 내 직업이 밤늦도록, 어느 때는 새벽까지 정신과 육체노동을 겸해야 하는 직업인 만큼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곤 했다. 그래서 아내더러 친구도 만나고 나이트도 가라고 권하곤 했다.
현장조사를 위해 골목골목을 차를 타고 지나 다녔다. 강남쪽 사람들은 모두 언제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을까. 집들이 모두 궁전 같다. 대부분 마당에는 정원이 있고 그림같은 정원수들이 심어져 있었다. 나도 얼른 돈을 벌어서 이렇게 좋은 집을 짓고 사는 것이 꿈이다.
아내는 외동딸 지현이가 어느정도 자라 유치원에 들어가자 집안에서 별 할일이 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후 시간이 되면 동네 아줌마들과 자주 어울리곤 한다. 그래, 아내에게 무슨 낙이 있겠냐 싶어 그런 아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보, 나 에어로빅 하까?"
"날씬한데 그건 뭐하러 해. 그냥 놀러나 다녀."
"아니 나 요새 살찌는 거 같애. 여보, 나 석 달만 다니께. 앞집 지혜 엄마도 다니고, 가람이 엄마도 다니는데 뭐."
지혜 엄마라면 동네에서 착하기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딱 석달만이라는 약속을 받고 에어로빅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아내는 요즘 몸이 보기 다르게 날씬해졌고 매우 명랑해졌다. 에어로빅 보내기를 잘했다 싶었다.
오늘 사업지역은 연 사흘째 조사를 했던 지역이어서 오늘 조사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현장조사를 끝낸 나는 서둘러 근처 횟집에 들러 횟밥을 하나 시켜 먹었다. 국물 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사업 도중에 오줌이 마려운 단점이 있다. 그래서 애써 국물있는 음식은 피하는 편이다.
아직 시간은 여섯 시도 채 지나지 않았다. 너무 일찍은 시간이라 차를 주차장에 세워 두고는 근처 호텔 사우나에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는 사우나에 한참을 들어앉았다 나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가운을 입고 수면실로 들어가 누웠다. 이내 잠이 들었다. 나는 시간이 나면 이렇게 종종 사우나에 들러 땀을 빼곤 한다.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수면실 한 쪽에 매달린 전자시계가 깜박깜박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옆자리에 보니 아까 잠들 때는 없었는데 이마가 뒤쪽까지 홀라당 벗겨진 뚱뚱한 대머리 사내가 누워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다. 수면실 안은 참 조용하다.
찬물에 다시 샤워를 하고는 사우나를 나섰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볼을 스친다. 호텔 근처에는 모두가 쌍쌍이다. 젊은 남녀 한쌍이 서로 끌어안다시피 하고는 호텔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몹시 취한 듯이 보였다. 아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마 지현이와 벌써 잠자리에 들어 있을 것이다.
시동을 넣고 사업장소로 향했다. 아차 잊을 뻔했다. 사업장 근처에 있는 갈비집 앞에다 차를 세웠다. 갈비집은 벌써 문닫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갈비 2인분을 시켰다. 갈비집 주인 아주머니는 식당 주인답게 몸집이 매우 뚱뚱했다. 집에 있는 늘씬한 아내를 떠올렸다. 갈비 두어점을 집어먹고는 나머지는 주인더러 봉지에 싸달라고 해서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주차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주택가를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린이 놀이터 뒤쪽 어두운 곳에다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트렁크에서 내 사업도구인 007가방을 꺼내 들고 사업장으로 향했다.
그 집은 오늘도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대궐 같은 크기의 3층 양옥집이었다. 아까 식당에서 싸온 갈비를 꺼내 사전에 파악한 개집 쪽으로 획 던졌다. 세파트는 한참을 컹컹 짖더니 갈비를 뜯어먹느라 이내 조용해졌다. 주인이 없어 저녁밥을 굶은 모양이었다. 불쌍한 것, 연이어 갈비 몇 대를 세파트에게로 던져 주고는 간이 사다리를 꺼냈다.
담장 꼭대기에는 쇠로 삐죽삐죽하게 창살을 꽂아놓았다. 안전을 위해 창살 몇 개를 잘라내고는 담을 넘어 들어갔다. 세파트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현관문을 땄다. 특수 자물쇠라고는 하지만 전문 직업인인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간이 열쇠 몇 개만 사용하면 어느 문이고 간단히 열 수가 있다.
조사한 바대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서재의 문을 열고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예전에는 장롱을 뒤지는 것이 일차적이었지만 요즘은 귀중품이나 돈을 숨기는 장소도 우리 같은 자유직업인의 허를 찌르는 곳에 숨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수법들을 다 알고 있다.
서재 서랍을 완전히 빼내자 그 뒤쪽 공간에는 아니나 다를까 만 원권 지폐가 두 뭉치가 나왔다. 그리고 다른 서랍을 빼내자 역시 만원권 지폐가 한 뭉치가 나왔다. 그런데 아차 큰일이 났다. 벨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한참을 울리던 벨소리는 이내 그쳤다. 아마도 손님인 모양이었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이조 자기가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 손을 넣었으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에는 화장대 앞쪽을 들어 올렸다. 요즘 사람들은 화장대를 들고 그 밑에다 보석을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 거기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며 팔찌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 보석들을 가방에 챙겨넣고는 유유히 집을 나왔다. 오늘 수입은 꽤 괜찮은 편이다.
나흘간의 치밀한 예비조사, 그 노력의 대가로 오늘 수입을 얻게 된 것이다. 고마운 세파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담을 넘어 나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담장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걷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급하다고 달리다보면 괜히 도둑으로 오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딸 지현이와 전자오락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역시 전자오락은 스릴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직업은 생생한 현장감이 있는 스릴을 온 몸으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가치있는 직업인 셈이다.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두 시가 지나서였다.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요즘은 도둑놈이 많아서 자물쇠를 네 종류나 채워 놓은 탓에 문을 다 열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조용조용 거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어, 그런데 거실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서랍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안방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장롱이며 이불들이 역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금고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고 속에 있던 현금과 패물들이, 내 피땀의 결정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없었다. 아내의 옷장을 열었다. 맙소사, 쓸 만한 옷들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급히 지현이의 방으로 가서 딸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전등에 눈이 부신 듯 두 눈을 찌푸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엄마는?"
나는 버럭 소리를 냅다 질렀다. 지현이는 겁먹은 듯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아까 잘려구 하는데, 엄마가 피자를 사왔다.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웬 아저씨하고 엄마하고 안방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 아저씨하고 가방을 쌌거든? 그래서 낼 아침에 올거라고, 아빠한테 말하라고 그러고는 갔어. 잘 자라고 뽀뽀해주고 갔어. 낼 온다 그랬으니까, 낼 올거야. 아빠, 걱정 말고 인제 그만 자."
"이런 도둑 년놈들!"
아이의 책상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아이구 아야, 주먹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몹시 아팠다. 괜히 죄없는 책상만 내리쳤나…<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