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생님은 참으로 예를 아시는 양반이라(글/임재해)선산 김씨네가 저 읍내 부용리에 사는데, 이전(예전)에 성이 황가인 사람이 그 집에 비복(婢僕)으로 살았다 그래. 근데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해 가지고서 진사과에 합격해설랑 진사를 했어. 그래서 "황진사, 황진사" 그러는데, 그 황진사가 예서(禮書)에 아주 밝아. 예의에 밝은 양반으로 아주 소문이 났어. 그러니 젊은 선비들이 찾아와 다투어 글을 배우고자 할게 아닌가. 그래 제자들을 모아놓고 후학을 갈치는데(가르치는데), 하루는 가실(가을)인데 그 날 저녁에 황진사 집에 지사(제사)가 든다고 그런단 말이지. 그래서 제자들이 모여가주고
"우리 선생님은 비록 참 미천한 집 출신이지만 진사를 하시고 또 예학에 밝기 때문에 그 지사도 잘 지낼 것이니께, 우리 밤에 가서 선생님 지사 지내는 걸 구경하자구."
제자들이 짜구설랑 밤에 지사 지내는데 구경을 갔드라는겨(갔더라는 것이여), 몰래. 그 친기(親忌)가 있는데, 밤에 몰래 가서 이제 문구녁(문구멍)을 뚫고설랑 참 제사지내는 걸 보니께, 아 진설(陳設)이고 뭐고 유구(鍮具)도 없이 저 함박(함지박)에다 밥을 수북하니 갖다놓고 잔이고 뭐고 큰 그릇에다 저- 웃목에다 잔뜩 차려 놨드라네. [청중: 웃음] 숫깔을 한군데다 수북하니 꽂아놓고, 그러고 절을 수없이 햐(혀, 해). 뭐 초헌(初獻) 아헌(亞獻) 삼헌(三獻)도 없구 절이나 햐. 모듬밥을 해 놓고.
제자들이 그걸 보구설랑 이상할 것 아닌가배. 그래 이튿날 선생님한테, 황진사한테 질문을 했어.
"아, 참! 선생님한테 여쭙기는 죄송합니다만, 선생님은 진살(진사를) 하시고 예학에 밝으시기 때문에 선생님 간밤에 참 친기
가 계신다고 해서, 어떻게 예로서 제사를 잘 지내는가 싶어서
저희들이 참 구경을 갔었는데, 전부 함박 모름이로 밥을 놓구설
랑 모듬밥을 놓구설랑 그라니 어디 예문에 그런 게 있는 겁니까?"
그렇게 물었드랴. 그러니까 황진사 말씀이,
"너 그렇게 의심이 날걸세. 그런데 나는 글자이나 해서 진사
자리에 합격해서 예서를 알고 예문을 알지마는 우리 부모들은 김진사댁 노비로 있었는데, 아 그때 방에서 밥 먹든가 어디? 한데서(바깥에서) 모듬밥으로 이렇게 먹고 그랬는데, 여기서 내가 예를 차려서 제사를 지내면 불안해서 우리 조상이 흠향을 안햐. [청중: 웃음] 그래 내가 그렀네(그랬네)."
그래더라는겨. 그래서 제자들이,
"참 왈(曰) 우리 선생님은 참으로 예를 아시는 양반이라구!"
그 참 훌륭한 얘기라구. 그 참 진설해서 초헌 아헌 예를 갖춰야 조상들이 모르지! 그걸 봤어? [청중: 웃음] 조상이 흠향을 안 햐. 그렇게 참 훌륭한 진사가 있었다고 어른들이 말씀을 하시데.
예를 무시한 예학자와 이야기꾼 장영진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다. 형식 논리에서 보면 모순되는 말이다. 도는 도이고 도 아닌 것은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현상이나 삶의 진실은 이러한 형식 논리에 얽매어 있지 않다. 오히려 도가 도 아닐 수도 있고 도 아닌 것이 도일 수 있다. '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예가 아니고 예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정한 예일 수 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는 허례이고 마지못해 하는 의식은 허식이다. 허례허식이야말로 예이되 예가 아닌 것이다. '도'든 '예'든 중요한 것은 진실과 내용이지 가식과 겉보기가 아니다. 진정한 예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황진사라는 대단한 예학자의 제사 지내는 방식을 통해서 주목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 묘골에서 장영진 할아버지가 들려준 것이다. 작게는 제사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크게는 예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절묘하게 드러낸 이야기이다. 장영진 할아버지는 양반의 후손으로서 상당한 긍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문을 많이 익혀서 마을에서는 학자로 통했다. 양반의 후예답게 몸가짐이 단정했으며 한문을 많이 익혀서 한자말을 즐겨 쓰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비교적 쉬운 말로 풀어서 들려주었다.
흔히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서 예를 잘 아는 양 행세하는 사람들은 번잡한 예의 절차들을 줄줄 외면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새기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거나 어긋지게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기 일쑤이다. 가끔씩 아무개네 무슨 제사를 들먹이며 예법에 어긋난 사례를 흠잡아 이야기하는가 하면, 제례를 올리는 현장에서도 여러 어른들이 제례 절차에 대하여 다투는 일을 볼 수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절차와 달리 의식이 행해지거나 홀기를 읽게 되면, 나서서 집사나 홀기 읽는 사람에게 항의하기 일쑤이다. 심지어 어느 종가의 매혼(埋魂) 제사에서는 홀기 읽는 사람이 미리 이러한 사태를 염두에 두고, '오늘 제사는 내가 하는 대로 절차를 모두 따라 달라'고 협조를 구한 뒤에 준비된 홀기대로 제사를 진행했지만, 막상 복잡한 제사가 시작되자 한두 사람이 절차가 틀렸다고 나서는 바람에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고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장영진 할아버지는 양반의 후예이자 마을에서 학자로 통할 정도로 예에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외려 제례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이야기를 들고 나와서 예의 본질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좌중에서 함께 듣는 사람들도 흥미롭게 들으며 충분히 공감을 하였다. 이야기 내용으로 볼 때 이야기를 들려준 장영진 할아버지는 이름만 학자가 아니라, 형식의 굴레를 뛰어넘어 진정한 예의 알맹이를 일깨워준 진짜 학자였다. 마치 이야기 속의 황진사와 같은 인물처럼 보인다. 황진사의 기이한 제사 방식을 두고 제자들의 입을 통해 "선생님은 참으로 예를 아시는 양반이라구!" 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꾼 자신의 말로 다시 "그렇게 참 훌륭한 양반이 있었다"고 거듭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말로 이야기를 하면 설득력이 적을 수도 있으므로,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 하여, 옛어른들이 두루 황진사를 훌륭한 양반으로 평가했음을 객관화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승의 미천한 신분과 제자들의 인식
그럼 황진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제례 절차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제사를 지냈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제가 되어 예를 아는 선비나 진짜 훌륭한 양반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까. 이야기꾼은 이 이야기를 아무런 근거없이 재미삼아 하는 한갓 이바구로 여기지 않았다. 구체적인 지명과 가문을 밝히며 황진사의 실제 신분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볼 때 전설로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마지막 진술도 같은 맥락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황진사는 신분이 노비 출신이다. 따라서 그 윗대의 가문이나 출신지가 독자적 계보를 지니며 분명하게 밝혀질 수 없다. 그러한 사정은 이야기의 서두에 자세하게 드러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황진사임에도 불구하고 황진사 자체의 가문보다 선산 김씨 이야기를 서두에 하고 있다. 노복이었던 그들 부모가 종살이하고 있었던 가문이 바로 선산 김씨였기 때문이다. 선산 김씨는 충북 영동읍내 부용리에 살고 있는 양반 가문이었는데, 이 부용리의 선산 김씨 가문에 황진사 부모가 노복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노비의 신분이나 출신지는 그 상전에 의해 밝혀질 수밖에 없다. 노비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 상전에 의해 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황진사는 부모들이 노비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워낙 잘 해서 진사과에 합격할 수 있었고, 그러한 덕분에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노비의 자손이 진사과에 응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그러한 내력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누구든 글공부만 열심히 하면 진사과에 합격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이야기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보다 희망사항이나 기대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뜻밖에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 곧 노복의 아들이 진사과에 응시하여 합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굳이 더 따지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스승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출신 성분도 잘 알고 있고 또 그 학문적 역량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미천한 출신이지만 진사를 하시고 예학에 밝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신분 사회에서는 누구나 미천한 신분을 감추고자 한다. 반상의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까닭에 상민은 갖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물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으므로, 가능한한 상민의 신분을 숨기고자 한다. 더구나 남의 스승이 되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종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제자들 앞에 잘 나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스승의 일반적 욕심이다. 그러나 황진사는 이를 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기 스승이 양반 신분이 아니라 종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황진사는 제자들 앞에서 무엇이든 숨김없이 투명했으며 거짓없이 솔직한 선비였던 셈이다.
한층 기특한 것은 그 제자들이었다. 스승이 종의 자식인 줄 알면서도 스승으로 섬기며 공부하기를 기꺼이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이 진사이자 예학자로서 제사도 잘 지낼 것으로 탄탄히 믿고 있었다. 오히려 미천한 집 출신의 스승이기에 그러한 역량을 가진 것을 더욱 귀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잘난 가문에서 잘난 자식이 나서 크게 성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황진사처럼 못난 가문에서 잘난 자식이 학자로 성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귀한 일이다. 제자들은 스승의 이런 점을 더욱 높이 샀던 모양이다. 그러니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이 제자들의 관심거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황진사가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제사 지내는 걸 구경하고자 작당을 했던 것이다. 이야기에서는 친기(親忌)가 있다고 했는데, 친기는 부모의 기제사를 말한다.
함지박에다 제삿밥을 푸고 숟가락을 꽂다
사실 이것은 작당이 아니다. 스승이 제사를 어떻게 잘못 지내는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흠을 잡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작당이 분명하다. 그러나 몰래 한 계획이지만 스승이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예학의 실제 모습을 터득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작당이라 할 수 없다. 일종의 현장학습을 기획한 셈이다. 그런데 제사의 현장은 뜻밖이었다. 이해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예학에 밝기로 소문난 분인데, 실제 제사 지내는 것은 전혀 예를 지키지 않았다. 예와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아 진설이고 뭐고 유구도 없이 저 함박에다 밥을 수북하니 갖다놓고 잔이고 뭐고 큰 그릇에다 저- 웃목에다 잔뜩 차려 놨드라네. [청중: 웃음] 숫깔을 한군데다 수북하니 꽂아놓고, 아이 그러고 절을 수없이 햐(혀, 해). 뭐 초헌 아헌 삼헌도 없구 절이나 햐. 모듬밥을 해 놓고."
제사에서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가 진설이다. 진설은 제물을 제사상에 격식에 맞게 가지런히 차리는 일을 말한다.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옛말은, 남의 집 진설에 참견하는 일을 삼가는 말로, 가가예문의 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제물이 많을수록 그 절차가 번다하고 차리는 순서가 까다롭다. 제일 첫줄에 과일을 차리는 일만 하더라도 이른바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붉은 과일을 동쪽에 차리고 흰 과일을 서쪽에 차린다든가, 조율이시(棗栗梨枾)라고 하여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로 차리도록 정해져 있다. 또 첫째 줄은 홀수로 진설한다는 원칙도 지켜야 한다.
둘째 줄에는 나물을 차리는데, 좌포우혜(左脯右醯)라고 하여 왼쪽에는 북어나 오징어 등의 포를 놓고 오른 쪽에는 식혜를 차리며, 그 사이에 각종 나물을 차린다. 나물도 생동숙서(生東熟西)라고 하여 김치는 동쪽에 익힌 나물을 서쪽에 놓기도 한다. 그리고 둘째 줄은 짝수로 진설한다.
셋째 줄에는 탕(湯)을 진설하는데, 고기로 만든 육탕과 생선으로 만든 어탕, 두부와 야채로 만든 소탕(蔬湯)을 3가지 또는 5가지를 차린다. 어탕은 동쪽에 육탕은 서쪽에 소탕은 그 사이에 놓는다. 넷째 줄에는 불에 굽거나 찐 음식인 적(炙)과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부친 전(煎)을 차린다. 생선으로 만든 것을 어적 또는 어전이라 하고 고기로 만든 것을 육적 또는 육전이라고 하는데, '적전중앙(炙煎中央)'이라고 하여 적과 전은 중앙에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라고 하여 어류는 동쪽에 차리고 육류는 서쪽에 차리며, '동두서미(東頭西尾)라고 하여 머리는 동쪽으로 가고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차린다. 적도 세 가지를 쓰는데, 초헌때 육적을 올리고 아헌때 계적(鷄炙), 종헌때 어적을 올린다.
떡은 오른쪽에 국수는 왼쪽에 차린다. 떡은 색깔있는 것을 피하고 팥고물도 껍질을 벗겨서 흰색이 나도록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차린다.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놓는다. 제삿밥을 특별히 '매'라고 한다. 이때도 '고서비동(考西 東)'이라 하여, 신위와 매, 국, 술잔을 놓을 때 아버지 것은 서쪽에 어머니 것은 동쪽에 차린다.
축문은커녕 절만 수없이 올리다
대충 진설만 보아도 이 정도로 번다하다. 어지간해서는 격식에 맞도록 정확하게 차리기가 어렵다. 구체적인 제례 절차는 그 격식이 더욱 까다롭다. 따라서 예에 관한 다양한 저서들이 나오고 예학이라는 학문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이다. 그런데 예학자인 황진사가 기본적인 진설은커녕 함지박에다 밥을 수북히 퍼놓고 제기나 술잔도 없이 큰그릇에다가 음식들을 잔뜩 차려 두었으니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제삿상에다 차린 것도 아니다. 유구(鍮具)도 없다는 것은 제기로 쓰는 유기 그릇도 전혀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진설이 이런 상황이니, 헌작의 제례 절차를 제대로 지킬 리도 없다. 그저 절을 수없이 올릴 따름이다. 모든 절차를 무시한 셈이다.
원래는 조상의 신위를 제청에 모시거나, 신주 또는 지방을 모시는 것으로부터 제사를 시작한다. 이렇게 신위 봉안이 끝나면 강신(降神) 의례를 한다. 제주가 제사상 앞에 꿇어앉아 향을 피우고 집사자가 강신 술잔을 주면 제주는 술잔을 받아 모래를 담은 모사(茅沙) 그릇에다 세 차례 나누어 부은 다음 재배를 한다.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다음은 모든 제관들이 제주와 함께 신위에 첫 인사를 올리는 참신(參神) 재배를 올린다. 제주가 초헌관이 되어 첫 번째 술잔을 올리면,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축문이 끝나면 초헌관이 재배한다. 이어서 아헌관과 종헌관이 두 번째 잔과 세 번째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다. 이때는 축문이 없다. 헌작이 끝나면 숟가락을 매에 꽂고 젓가락은 바르게 고쳐 놓는다. 이것이 삽시(揷匙) 의례이다.
삽시 다음에는 합문(闔門) 의례를 한다. 병풍으로 제사상을 가리고 제관 일동이 조용히 엎드려 있거나, 제청의 문을 닫고 밖에 나와 잠시동안 기다린다. 조상이 음식을 드는 동안 자리를 비켜드리는 것이다. 합문이 끝나면 축관이 기침을 세 번 하면 엎드려 있던 제관들이 모두 일어서며, 밖에 있던 제관들이 문을 열고 제청으로 들어간다. 이제 밥을 모두 자셨으므로 국그릇을 내리고 물을 올려 매를 세 숟가락 떠서 물그릇에 담고 잠시 엎드리는 헌다(獻茶) 의례를 한다. 그리고는 물그릇에 놓인 숟가락을 거두고 매그릇을 덮는 철시(撤匙) 의례를 한다. 이제 조상신을 돌려보내는 절차로 제관들이 모두 사신(辭神) 재배를 한다. 끝으로 지방과 축문을 불사른 뒤에 철상을 한다. 제주와 제사 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것도 음복(飮福)이라고 하여 제사 절차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런데 황진사는 이 모든 절차를 챙기지 않고 함지박에 퍼 놓은 매에다 숟가락 여럿을 꽂아두고 절만 수없이 올린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다. 모처럼 제례를 제대로 익히고자 예학자로 존경받는 스승의 제사 장면을 몰래 훔쳐보았는데,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으므로 가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음날 스승인 황진사에게 간밤의 사실을 여쭈어 보았다.
"아, 참! 선생님한테 여쭙기는 죄송합니다만, 선생님은 진살(진사를) 하시고 예학에 밝으시기 때문에 선생님 간밤에 참 친기가 계신다고 해서, 어떻게 예로서 제사를 잘 지내는가 싶어서 저희들이 참 구경을 갔었는데, 전부 함박 모름이로 밥을 놓구설랑 모듬밥을 놓구설랑 그라니 어디 예문에 그런 게 있는 겁니까?"
호기심 많은 제자들과 솔직한 스승의 대화
스승과 제자가 허물없이 진실로 대하지 않는 사이라면 감히 여쭈어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먼저 여쭈기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긴 했지만, 두 가지 버릇없는 자신들의 행위를 노출시키는 셈이다. 하나는 스승의 허락도 없이 몰래 스승의 제사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잘못을 밝히는 것이며, 둘은 예법에 맞지 않은 제사를 지낸 데 대하여 '어디 그런 예문이 다 있느냐?'는 질문으로써 사실상 따지고 드는 것이자 스승의 무례를 공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군사부일체라고 하는 봉건사회 도덕률을 고려할 때 스승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질문을 버르장머리없이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거침없이 질문을 하고 스승도 자상하게 답변을 한다. 바람직한 사제관계라면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질의 응답 형식의 토론식 학습 방법이 민주적일 뿐 아니라 학습효과도 아주 높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전들은 사제간에 묻고 답하는 형식의 대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고 야단법석인데, 오히려 전근대적인 시대에 서당교육을 하면서도 사제간에 인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들의 공부 방식은 요즘 학생들도 부러워할 정도이다. 스승의 제사 방식을 실제로 관찰하고 이를 학습 내용으로 삼아서 예학의 본질을 공부한 셈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스승이라고 하여 특별한 권위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학생들이라고 하여 비교육적인 일탈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예학에 대한 탐구욕과 호기심을 파고드는 제자들은 요즘 학생들 못지 않게 자유분방하면서도 의욕적이며,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예의 본질을 수월하게 설명하는 스승의 태도는 현대적인 교육방식을 넘어선다. 요즘처럼 체계적인 학교는 없어도 사제간의 교육권과 학습권이 충분히 보장된 높은 수준의 학교가 실질적으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미천했던 가계의 신분을 보기로 삼아 제례를 설명한 스승의 솔직한 대답은 제자들의 의문을 고스란히 풀어준다. 진설을 아무렇게나 편하게 해두고 절만 거듭 올린 것은 자기 조상이 노비였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그런 식으로 한데서 모듬밥을 먹었다는 점을 고려한 까닭이다. 따라서 제대로 제기를 갖추어 제물을 차리고 예법에 따라 축문을 이르고 절을 하면 오히려 조상들의 마음이 편치 못해 제사를 흠향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평소처럼 그렇게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비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양반들처럼 상에다 밥그릇을 차려 먹은 것이 아니다. 커다란 함지박에다 밥을 수북하게 퍼서 여러 사람들이 부엌이나 헛칸 모퉁이에서 둘러앉아 먹었던 셈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하여, 높다란 제사상 위에다 번쩍거리는 유기를 갖추어 격식에 따른 제물을 줄지어 진설해 놓고 복잡한 제례 절차에 따라 절을 올린다면, 즐겁게 제사 음식을 흠향할까. 그것은 마치 시골사람을 데려다가 점심 대접을 한다면서 호텔 식당에다 앉혀놓고 법식을 제대로 갖춘 양식을 먹도록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마디로 주눅이 들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없다. 모처럼 낯선 호텔에서 고급 음식을 본의 아니게 얻어먹은 사람들은 대부분 푸념한다. '차라리 어디 가서 뜨끈뜨끈한 해장국밥이나 먹었으면 밥 먹은 것 같겠다'고 말이다. 제사라고 하여 산 사람 대접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형식에 얽매이면 본질을 잃는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제자들이 사정을 알고는 자기 스승을 진짜 예학자로 존경했다고 한다. 진짜 예를 아는 사람은 예서의 차례를 소상하게 알거나 제례의 관행을 익숙하게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의 본디 정신에 맞게 예의 격식에 구애됨이 없는 융통자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제례는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범일 따름이다. 따라서 절차에 구애되어 정작 헤아려야 할 조상들의 혼령을 불안하게 한다거나 편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한갓 예를 위한 예일 뿐 조상신을 잘 섬기는 예는 아니다. 예라고 하는 것도 계층과 남녀와 상황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사실상 다 다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한 가지 방향으로 틀지어져 있는 규범을 예라 하고, 이 예를 근거로 예를 갖추면 갖출수록 사실상 예의 본디 정신과 빗나가게 된다.
법조문의 형식논리와 법정신의 거리
'법'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가 예 아니듯이, '법이 법 아닌 것'은 바로 법을 준수하는 것이 사실은 법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범법행위가 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법 아닌 것이 법'인 것은 법을 어기는 것 같은 행위가 사실은 진정한 법의 뜻을 존중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범법 여부의 판단은 법조문의 형식 논리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법의 본디 정신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법조문으로 걸어 넣으면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법조문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법 정신으로 얽어 넣으면 사법처리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보기가 특검법이다. 옷로비 사건으로 위증죄와 사기죄 혐의를 받고 있는 특검의 피의자가 오히려 특별검사를 특검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여 특검을 걸어 넣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특검법은 특검의 수사대상자가 특검을 걸어 넣으라고 만든 법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지금 국민들은 특검의 수사활동과 그 성과에 갈채를 보내면서 '특검 힘 내라!'고 아우성을 치며 격려를 보내고 있는 판에, 오히려 옷로비 의혹의 핵심 가운데 한 사람인 피의자가 적반하장으로 특검을 특검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까닭은 여권이 의도적으로 특검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특검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검제 실시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국민 여론에 밀려서 마지못해 동의할 때부터 특검의 활동을 폭넓게 허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특검의 수사결과를 수사진행 과정에 발표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조문을,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특검법에 끼어넣은 것은 물론, 특검법을 한시적인 법으로 만들어 특검의 존재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실제로 특검의 수사가 진상에 점점 다가서고 사직동팀 최초문서로 추정되는 문건이 드러나자,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수사내용을 최종보고서를 통해서만 공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거나, 여권에서는 '최특검팀을 특검법 위반 혐의로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들이 들먹이는 법은 한결같이 정일순 사장이 들먹이는 법과 같다. 특검법은 특검이 수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특별한 권능을 부여해 주어야 하는데, 거꾸로 특검 활동을 제약하는 쪽으로 제정되어 있으니, 법이되 법 아니라 할 만하다.
이런 까닭에 밑으로는 수사대상자인 정일순에서부터 위로는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특검을 향해 윽박지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법이 권력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탓에 특검의 법적 지위는 여러 모로 훼손되고 있다. 정일순을 구속 수사하겠다고 영장을 신청하면 법원에서는 이를 번번히 기각하였다. 영장의 구속 사유가 법적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았으며 청문회의 위증죄는 특검법의 수사범위를 벗어난다는 이유이다. 법조문에 입각한 형식 논리의 해석이다. 이러한 법조문주의는 법리의 본디 정신을 무색하게 만든다. 결국 형식적인 법조문 적용은 옷로비 의혹을 푸는 특검법의 수사활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법이되 법 아닌 것이 이처럼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법관들이 법 정신을 무시하는 까닭이다. 오죽했으면 법을 두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했을까.
특검의 수사 발표에 대하여 청와대, 여당, 검찰과 법원 등이 모두 반발하는 것은, 사실상 특검이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특검이 밝힌 진상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직동팀과 검찰이 결론을 낸 것처럼, 특검팀 또한 '실패한 로비 사건'으로 동어반복을 했다면 특검에게 불만을 내보일까. 모든 권력들이 특검의 수사 개가에 대하여 국민들과 다른 법 감정을 가지고 함께 준동하는 까닭은 법 아닌 권력을 곧 법으로 믿고 있는 탓이다. 그들은 법과 법조계가 사건의 진실을 가리고 의혹을 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봉사하기 위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법 정신은 외면하고 법조문만 따지는 법조계 인사들에게는 사실상 권력이 곧 법이다. 우리 시대에 참으로 예를 아는 진짜 양반 황진사처럼, 참으로 법을 아는 진정한 법조인은 어디 있는가.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갖은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을 당당하게 사법처리한 심재륜 전고검장같은 분이야말로 진정한 법조인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법 정신에 입각해서 당대 최고의 권력 실세를 구속했기 때문이다. 권력과 법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압력에 당당하게 맞섰던 까닭에 '국민의 중수부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지금 심재륜은 어디 있는가. 권력을 곧 법으로 착각하고 있는 정치검찰 김태정에게 밀려나서 지금은 법복을 벗고 한갓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가 천신만고 끝에 잡아넣었던 김현철은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심재륜과 김현철, 김태정의 행방이 현정부의 법 정의 수준과 도덕성을 절묘하게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