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시장 채소장수 배임이 아주머니(글/김선주)

해맑은 미소로 세상을 여는 새싹과 꽃봉오리가 마음 한 자락을 흔드는 봄날이다. 짙푸른 5월을 준비하는 4월은 충만하지는 않지만 설렘으로 가득하다. 푸르른 4월에 장터를 찾아 나서니 발걸음도 가볍고, 따스한 햇살로 장터에도 생기가 넘실거렸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
따뜻한 봄 기운에 시장 사람들의 따스한 정취에, 나도 모르게 신시장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길을 가다가 도로가에 질펀하게 앉아서 채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 여럿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풍산 막곡에 시집와서 30년이 넘게 채소장사를 한다는 배임이 아주머니(57)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걸걸한 목소리와 그 중 나이가 젊어 보인 까닭일까, 고운 주황색 조끼를 입은 배임이 아주머니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채소장사도 어느새 30년 세월
배임이 아주머니 고향은 대구 칠곡이란다. 안동 풍산 막곡에 시집 온 지가 34년이 지났다고.
“시집와서 장사만 한 건 아니고, 촌에서 농사도 지으며 살다가 여기 나와서 이렇게 채소도 팔고 있어요. 지금은 당북동에 살고 있고요. 풍산서 나온 지는 15년 정도 되었어요. 계속 농사는 짓고 있지요. 솔밤다리 지나서 류병원 가기 전에 호안이라는 동네에서 도라지며 깨도 갈고 고추도 갈아요. 이제 몇 일이 지나면 가서 갈아야지요. 바깥양반이 시간나면 가고, 내가 시간나면 가고…. 아직까지는 촌에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나와서 파는 거는 우리가 직접 키운 것도 있고, 동네 사람들이 채소를 대주고 그래요.”
건축업을 한다는 바깥어른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주머니의 일을 도와주신다고 한다.
예전에는 태화시장에서 채소장사를 15년 하다가 이제 이곳 신시장으로 오게 되었는데, 장날에 자리가 없으면 왔다 갔다 한단다. 신시장 도로변에 온 지는 몇 일 밖에 안됐다고. 계속 성소병원 근처에서 하다가 자리가 없어서 이쪽으로 왔단다. 시장 내에 세를 주고 하려해도 보증금 천만원에 한달에 30만원 세를 주고 어떻게 하냐는 아주머니 말이, 나물장사라 세주고는 남는 것이 없어 그렇게는 못한단다.
예전에는 장사가 잘 되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고 했다. 어디를 가나 요즘은 다들 어렵긴 마찬가지인가보다.
“예전엔 잘 됐지요. 예전에 대목에는 하루 130∼150만원까지 벌었어요. 요즘은 마트 때문에 재래시장이 죽어서 안돼요.”
재래시장 활성화다 해서 조금은 나은 빛을 기대해봤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그래도 앞으로 경기가 조금 회복되면 좋아지리라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래도 내 가족이 있어
“자식은 남매뿐인데, 이제 다 출가해서 외손자 친손자까지 봤어요. 아들 며느리는 경기도 광주에 가 있고, 딸은 대구에 시집갔고요. 이제 저하고 바깥양반이랑 둘이 있지요 뭐, 적적해서 집에 세를 놓고 있어요.”
자식들은 이렇게 시장에 나와 장사를 하는 게 못마땅할 테다. 힘들게 살았어도 이제는 자식들도 다 출가했고 한숨을 돌릴 때도 된 것 같아 집에서 장사를 못하게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왜 안그래요. 아들, 며느리는 못하게 하지요. 용돈을 한달에 10만원씩 받고 있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돈도 잘 주지만, 그래도 소일거리도 하고 나와서 사람들도 만나면 재미있고 그래서 해요. 채소 장사해서 번 돈으로 용돈도 하고 화장품도 사고 옷도 사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그래요.”
아주머니는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나란히 근무하는 아들, 며느리가 대견해 힘이 들어가는 눈치였다. 몇 년 전에는 아들이 외국인 길 안내로 선행을 해서 지역신문에도 났다고 했다. 며느리도 너무 착하다며 칭찬을 이었다. 둘 다 근무를 하니까 자주 안동에 내려오지는 못하지만 전화는 자주 잘 한단다.
몸이 아파서 남매 밖에 못 두었다는 배임이 아주머니, 그만큼 시집살이가 힘들었던 것 같은 눈치라 시집와서 어떻게 살았냐는 물음에 아주머니는 한숨부터 내쉰다.
“저는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대구 칠곡에서 클 때는 부모님이 장사를 하셔서 남부럽지 않게 잘 먹고 다녔는데, 시집와서 너무 없는데 와 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지요. 시집와서 3년 있다가 첫 아들을 낳았거든요. 큰 애를 놓고 한 달 동안 하혈을 했는데, 한 달을 그렇게 해도 시댁에서 약 한 첩 안 지어 줬어요. 그래서 친정어머니가하는 소리가 명도 길다 하며 어째 그렇게 살았냐고 했지요. 그리고 2년 있다가 딸을 낳았는데 뒷바라지를 또 안 해주더라고요. 그 길로 아팠는데, 애기 놓고 음식을 안 먹었어요. 한 날은 누가 계란을 먹어보라고 해서 날계란을 먹었더니, 장티푸스에 걸린 거예요. 땀을 못 내 가지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우리 어머니가 한 해 굿을 얼마나 한 줄 알아요? 7번을 했어요. 팔공산 밑에 가서 굿하면서 그때시절에 돈 70만원을 줬는데, 지금에는 한 700만원 돈 아이껴? 친정에서 병원비 데고 다 그랬지요. 친정이 칠곡에서 쌍방울 점포를 차리고 있거든요. 친정에서 그만큼 보태줘서 이렇게 살았지. 아니면 내가 못살았어요.”
장티푸스에 늑막염까지 걸려서 그때 안동의료원에서는 아주머니가 죽는다고 그랬단다. 딸까지 남 주려고 했다는 데, 그 속이야 오죽했을까.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근데 내가 죽어도 딸 남 못준다고 그랬지 뭐요. 시집에서 안 받아주니까 애들 감당을 못해서 남 줄려고 그랬어요.”
한다.
그 어려운 시절, 가족들과 함께였으니 이 만큼 살아오신 것 일 테다.
요즘도 세상이 어렵다 하지만 뭐든지 자기 분야에서 최선만 다하면 된다는 아주머니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사람들이 험한 일 안 할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경기가 어렵다, 취업이 안 된다, 그러는 거지요. 예전에 우리는 어땠는지 아세요? 바깥양반은 건축 일을 했는데, 겨울 되면 일이 없잖아요. 살아야 되니까 엿공장에 다녔어요. 대목에는 밤 열한시에 들어와서는 새벽 세시에 나가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한 해 겨울을 났어요. 내가 아프니까, 아 하나 업고 또 하나 들고 도시락을 싸다니면서 일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도 그렇게 잘 견뎌왔기에 남편과 남부럽지 않은 자식 둘, 그리고 손자들 그렇게 오순도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안동장날은 자리를 안 비워요”
아무래도 길가에 있으니 장사가 덜 된다고 했다. 이제 시장 안에 자리가 나면 들어간다고.
“시장 안이 더 나으니까요. 구시장보다는 신시장 쪽으로 가요. 그쪽이 장사가 훨씬 잘 되거든요."
늘 농사짓고 장에 나와 지은 농사를 팔고, 쉴 새가 없는터라 심심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물으니,
“일하면 심심한거는 없지요. 고스톱 안치고 이거 하는 거예요. 이게 취미니까.”
배임이 아주머니의 친정에서도 한때는 나물이며, 채소를 파는 장사를 했단다.
“옛날에 칠곡은 시내는 아니였고, 변두리였지요. 논도 하고 밭도 조금 했지. 친정에 논이 7마지기 농사짓고 밭이 300평 정도 됐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장사를 했지요. 저는 7남매에 둘째거든요. 딸 둘 밑에 남동생이 다섯 명이고요. 우리 언니는 집에서 매일 살림살고 동생들 빨래해주고 애기보고 있고, 저는 아버지 어머니 장사하는데 따라다녔어요. 클 때부터 장사하는 데를 따라다니면서 배웠어요. 장사를 어떻게 하는 지 봤으니까 아무래도 지금 내가 하는 것이 낫지요. 어떻게 한다는 방식은 알았으니까, 꼭 따라가서 고추, 마늘 같은 것을 팔았거든요.”
“어렸을 때는 너무 호강했기 때문에 귀한 게 없었고, 수박을 사서 오면 쟁반 한 가득 차려서 먹고살았어요. 딸네들이라고 공부는 안 시켰지만 먹는 거는 잘 먹고 컸어요.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지, 이제 조금 나은 지가 7, 8년 되요.”
장사하는 게 때로는 너무 힘들다는 배임이 아주머니, 그래도 시장 나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들 만나는 게 그렇게 좋아요.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 한 둘 있으면 좋은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살아가지, 나쁜 사람이 많으면 이 세상 못 살아가요.”
이제 아주머니는 건강 밖에 없다 한다. 더욱 건강해서 살아온 인생보다 더 즐겁게 더 희망차게 살아가길 바래본다. 푸르른 4월, 힘찬 아주머니 덕분에 나도 모르게 새 기운을 얻는 듯 하였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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