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문(通文), 뜻을 전하고 공론을 모으다(글/정진영)
어느 때나 통신이란 참으로 중요하다. 특정 조직이나 집단이 공식적인 의견을 제시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라고 다를 리 없다. 조선시대 이 같은 목적을 위한 문서를 흔히 ‘통문(通文)’이라고 하였다. 통문이란 주로 사림(士林)이나 서원, 향교 혹은 문중 등에서 특정의 일을 공론화하기 위해 관계 기관이나, 그 구성원들에게 돌리는 문서를 말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시 다른 곳으로 전해지는 글이라는 의미에서 ‘회문(回文)’이라고도 하였다. 이 같은 통문은 오늘날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문서 종류의 하나이다.
사족과 함께 등장하다
통문이라는 통신수단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였고, 그것도 대체로 16세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회문이란 말이 중종 연간의 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서원건립과 관련한 통문 역시 이 시기의 개인 문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이 같은 사실 확인이 아니더라도 통문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객관적인 환경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통문의 주체가 다름 아닌 사족(士族)이라는 점에서 사족의 등장 혹은 성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방 혹은 향촌사회에서 사족이라는 존재들이 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족은 유향소(留鄕所)라는 근거지를 마련하고, 향안(鄕案)이라는 명부를 만들고, 향약(鄕約)이라는 자치규약을 실시할 수 있었다. 물론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창설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사족은 이러한 조직과 규약을 통해 양반으로서의 신분 혹은 관인예비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의 지배층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활동이 왕권이나 그 대행자인 수령의 지방통치의 일부 혹은 보완책으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족과 그들의 조직은 자연스럽게 공인이나 공적 조직에 준하는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존재와 활동이 공인받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듯이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유향소의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고 있었고, 향약 또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쉽게 정착될 수 없었다.
통문이란 공문서가 아니라 사문서이고, 더욱이 개인이나 조직이 사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사람을 모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사족과 그들의 활동이 아니라면 어찌 사사로이 여론을 조성하고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사족과 그들의 행위들이 공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사정에서 중종 연간의 통문은 역모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개적인 ‘줄 세우기’
16세기 이후, 17세기를 거치면서 공적 존재로서의 사족과 그들의 사업은 크게 늘어났다. 18세기에 이르러 사족은 마을과 친족을 단위로 집단화되어 갔고 서원과 문집, 족보 등이 문중을 단위로 건립되고 발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향촌에서의 활발한 활동과는 달리 지방사족은 이 시기 국정운영에서는 점차 소외되고 있었다. 노론의 전제와 세도정권하에서 지방의 사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설사 조정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한직으로만 떠돌 뿐이었다. 그렇다고 향촌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8세기 이후의 향촌사회에는 이른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기존의 사족을 구향(舊鄕), 이들을 신향(新鄕)이라고 하였다. 신향은 대체로 서얼이거나 기존의 사족 집단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말하자면 격이 떨어지는 양반들이었다. 새로운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노론(老論)으로 자처하였고, 또 집권세력과 결탁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수령을 통한 노론과 세도권력을 배경으로 기존 사족의 지배체제에 적극 도전하고 있었다. 이로써 향촌사회에서는 다양한 쟁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이었으니 향촌의 사족은 신향과의 향전(鄕戰)에 휘말리어 기존의 특권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형편이었다.
이래저래 18세기 이후 사족은 할 일이 많아졌다. 물론 노론과 세도권력을 견제하거나 비판하는 일 보다는 주로 문중이나 향촌사회에서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 같은 경향은 세도정권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활동의 성패는 명분과 함께 얼마나 많은 동조자를 확보하여 세를 과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러하다 보니 그들의 입장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기 위한 방법이 적극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통문이 적극 활용되었고, 여기에 대한 회답은 또 다른 통문을 양산시키고 있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수십 건의 통문이 조직과 집단, 혹은 집단과 집단 사이를 오감으로써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회(道會)가 개최되고 의견이 수렴된다. 우리가 잘 아는 영남의 만인소(萬人疏)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은 참으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일 뿐이고, 실재의 내용에서는 공개적으로 개진된 의견에 동참할 것인지 아닌지를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공개적인 ‘줄 세우기’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확인되는 고문서 자료로서의 통문은 18세기 이후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같은 사실만을 근거한다면, 양반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결국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이 된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이 시기에 사족의 권위와 역할이 가장 컸으며, 그래서 조선의 양반사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반의 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해서 이것이 곧 안정성과 지속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도리어 양반사회가 전면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의미한다. 문중이나 향촌의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을 내부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한 도(道)의 사림을 총동원하거나 관에 호소하고 청원하였다는 것이 이 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아무튼 양반들의 왕성한 활동은 민생의 문제와도 무관한 그들만의 행사에 불과하였다.
이상(理想)을 상실한 영남 선비들의 자화상
통문의 형식은 대체로 통문이라는 제목과 함께 통지하는 내용, 문서를 발송하는 연월일, 발문자(發文者) 혹은 기관, 수취 기관 등의 순서로 쓰여 진다. 물론 회문(回文) 혹은 받은 통문에 대한 회답인 답통(答通), 성균관에서 발문하는 통문이라는 의미에서 관통(館通) 등이 제목으로 나오기도 한다. <통문 1>은 도산서원에서 동천서당으로 통문을 보낸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 단수의 수취기관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통문 2>의 경우와 같이 복수의 수취기관이 나열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수취한 기관에서 언제 받아서 어디로 보냈는지를 기록하여 차후에 증빙으로 삼기도 하였다.
통문의 전달 방식은 유사(有司)가 직접 통문을 가지고 가서 전달하는 방식이 보다 일반적이고, 통문을 받은 곳에서 다음 곳으로 전달해 주는 릴레이 방식도 있었다. 대동보의 간행 등과 같이 전국을 범위로 한 경우에는 각도와 파별로 통문하면 여기서 다시 그 예하에 별통(別通)을 작성하여 전달하는 중층적 구조를 갖추기도 하였다.
향교·서원 유생들이 주체가 된 통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내용은 향촌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다툼에 대한 의사 표시, 특정 인물의 서원 배향 문제, 효자·열녀의 정표(旌表) 청원, 종통(宗統)과 적서(嫡庶) 문제 등이다. 반면에 문중이 주체가 된 통문의 주된 내용은 문집이나 족보간행 등 위선사업과 관련된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통문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양반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당시의 향촌사회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향촌 문제 중에서도 영남의 양반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문제는 다름 아닌 적서문제였다.
<통문 2, 3>은 영남의 사림(士林)이 서얼을 성토하는 통문이다. 영남 사림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이중업, 김용복 등의 이름으로 1768년 11월 28일 경상좌도 각 향교에 발송한 통문은 안동향교를 시작으로 하여, 의성, 군위, 비안, 의흥, 신령, 영천, 하양, 경산, 자인, 청도, 밀양, 양산을 거쳐 언양에 도착한 것은 12월 19일이었고, 언양향교에서는 즉시 경주의 용산서원에 전하고 있다.(<통문 2>) 근 20여 일만에 경상좌도를 두루 돈 셈이다. 또 1768년 8월 22일에 공사원(公事員) 이도현과 황윤덕을 대표로 한 도회통문(道會通文)에는 안동, 영주, 용궁, 예천, 선산, 순흥, 풍기, 칠곡, 봉화, 의성, 예안, 인동, 함창, 성주, 영덕, 진보, 영양, 비안, 함창, 상주 등 경상좌도의 1,500명이 넘는 사림이 참여하고 있어서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통문 3>)
전자는 경상좌도에서 안동의 도산서원이 갖는 위력을, 후자에서는 당시 각 군현별로 동원되고 있었던 남인(南人)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유림(儒林)이나 사림이 아니라 남인이라 한 것은 통문의 내용이 서얼에 대한 성토와 이를 위한 적손(嫡孫)들의 연대와 힘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 가문의 서얼을 성토하는데 이렇게 많은 영남의 사림이 모두 동원되고 있었던 것은 이 시기의 서얼들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고 있었고, 또 개별적으로는 노론집권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통문에서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주 옥산의 회재 후손 역시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통문에 참여한 인물들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일 수밖에 없었다. 노론과 연결되어 있었던 옥산의 회재(晦齋) 이언적 후손 역시 통문을 내어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았음은 당연하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당연히 노론계였다.
영남의 서얼 대부분이 노론이 되었던 것은 영남에서 적서의 차별이 가장 심하였기 때문이다. 영남의 양반들은 서얼을 양반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향안(鄕案)에는 물론이고 유안(儒案)과 교안(校案) 등에도 적서의 차별을 엄격히 하고 있었다. 서얼은 이 같은 차별을 철폐하고자 전국적인 연대를 강화하면서 국왕을 상대로 통청(通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관직 임용이나 향촌의 다양한 조직에서 적손과 똑같은 자격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서얼의 이 같은 요구는 영조와 정조 연간에 이르러 조금씩 수용되고 있었다. 적계의 사족들이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독점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이 크게 침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뿐이 아니었다. 서얼은 이 같은 조정의 법을 근거로, 그리고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향안에의 입록과 향교와 서원의 운영에 참여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당시의 지방 수령은 대부분 노론계였고, 이들은 서얼세력을 통해 향촌의 사족 나아가서는 영남의 남인을 적절하게 견제함으로써 수령권을 강화하거나 노론의 집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서얼의 시도는 그 노력에 비해 의미있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지만, 노론 집권세력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영남의 선비 곧 남인이 이 같은 서얼과의 다툼에 혼신의 힘을 다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향촌의 조그마한 이익은 지킬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노론이나 세도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정치세력으로, 나아가서는 국정운영의 주체로서의 역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온 힘을 기우려 지켜내려 했던 그것도 사실은 혈연이나 향중의 내부문제였으니 결코 자랑스런 ‘영광’일 수는 없었다.
유림이니 사림이니 하는 말은 단순히 공부 하는 선비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학문인 유학 자체가 그러하듯이 그 궁극적인 목표는 치국(治國)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정치세력임을 의미한다. 유림이니 사림이 향촌의 기득권에만 안주하여 치국의 이상(理想)을 포기하였다면, 그것은 지역을 볼모로 한 채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집권의 의지를 상실한 없어져야만 할 오늘날의 정당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영남의 각 가문에 보관된 수많은 통문들은 치국의 이상을 상실한 영남 선비들의 안타까운 자화상을 보여준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