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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가산 속 애련암(글/윤천근)

애련암 가는 길
애련암. 이름부터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이 절은 학가산 속에 숨어 있다. 숨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여럿 있다. 어머니 보석이 그러하고, 정결한 여인네가 그러하고, 산 속의 절집이 그러하다. 애련암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숨겨져 있음으로 그 속에서 넘치도록 향유할 수 있는 고즈넉함에 있다.
생강나무가 노란 꽃잎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봄. 애련암을 찾아 길을 나섰다.
길은 언제나 떠나는 이의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길은 떠나는 이를 향하여 문을 활짝 열어 준다. 그러나 길은 언제나 떠나는 이를 목적지까지 인도하여 주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길이 아니라 떠나는 이의 의지이다.
길 떠난 자를 길 가는 것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목적지를 잊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는 날씨만한 것이 없다. 이른 봄인데도 초여름처럼 따사로운 날씨가 자꾸만 몸과 마음을 잡아 끈다. 어디 양광이 내리쬐는 산기슭에라도 주저앉아 조을 듯 하염없이 앉아 있고만 싶다는 소망이 마음 속 가득 자리잡고 사라질 줄을 모른다. 운전대를 잡은 김복영 씨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달래 얘기를 거듭한다. 어리고 연한 달래를 캐다 고추장 단지 한쪽에 박아두면 맛깔스러운 장아찌가 된다는 것이다. 미상불 달래나 찾아 캐어볼까 하는 유혹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길은 전에 간 그대로이지만 풍경은 사뭇 다르다. 전에는 천주마을을 보러 이 길을 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주마을에서 우리의 자동차는 멈추지 않는다. 천주마을을 휘돌아 뒤로 나아가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서행을 하면서 천주마을의 전답들 사이를 관통해서 느르치로 넘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행하여 학가산 정상을 향해 치솟는 길이다. 북행하는 길은 사실 학가산 정상이 아니라 그 품에 숨은 애련암을 목적지로 한다. 애련암은 그 세 갈래 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20여 년 전에 애련암에 오른 적이 있다는 김복영 씨의 기억이다. 길이 멀지 않다면 굳이 자동차를 부르릉거리며 절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는 좀 넓은 공지를 찾아 차를 멈추었고, 천천히 애련함을 향해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차 속에서도 마음을 잡아끌던 봄이, 차에서 내린 다음에야 오죽하겠는가? 발걸음은 추를 매단 듯 무거워지고, 시선은 길가 좌우를 훑기에 바쁘기만 하다. 나무와 풀 사이를 더듬던 눈이 버려진 과수원을 발견한다. 키 큰 나무들은 돌보는 손길이 미치지 못해 덩굴들을 뒤집어쓰고 있다. 마른 덩굴들이 잎을 틔우면 사과나무는 햇빛으로부터 차단될 것이고, 덩굴은 더욱 무성하여져 결국 사과나무를 고사시켜 버리고야 말 것이다.
김복영 씨는 처음 사과나무를 심으며 꿈에 부풀었을 농부에 대해서 말하였다. 나는 지금이라도 손질만 잘 하면 그 사과나무도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미련을 마음속에 품어 보았다.
그렇게 애련암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우리의 마음은 엉뚱한 곳을 더듬고 있었다.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해 준 것은 길을 따라 걷는 데 익숙한 우리의 발길이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순간에 절집 영역이 나타나고, 우리의 관심도 자연히 절집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애련암의 망치소리
절집 주변에는 망치 소리가 시끄럽게 퍼져나고 있었다. 애련암 초입,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전북 번호판의 작은 트럭이었다. 공사자재를 싣는 청년은 전북에서 공사하러 온 참이라 하였다. 참으로 멀리에서도 왔다 싶기도 하고, 그게 수지가 맞는 일일까 싶기도 하였다. 무슨 대 역사라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일순 마음이 불편하여졌다. 절집에 가서 공사하는 것만 보고 돌아섰던 기억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요즘 절집은 참으로 커다란 공사를 많이도 벌인다. 기와마다 이름을 써서 죽 세워 놓고 있는 것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기도 한다. 큰 절일수록 그런 모습은 심하고, 공사에 쏟아 붓는 자금은 천문학적인 규모가 된다. 그런 절집의 모습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절집은 조용하여야 가 볼 마음이 생기지 않던가. 공사판을 볼 양이면 산 속을 찾아들 것이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를 기웃거리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애련암에서는 그 흔한 기와불사 한 장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망치 소리는 애련암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쪽 좁은 골짜기 속에 자리잡은 작은 집에서 났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그 집은 작고 골짜기에 폭 쌓여 있어서 우정 고개를 빼고 기웃거려야 겨우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원래 스레이트 지붕인 모양인데 그 위에 각목으로 틀을 만들고 함석으로 제작된 기와 모양의 판을 얹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전라도 청년의 일행은 그 공사를 맡은 모양이었다.
애련암 영역에서는 망치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였지만 공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작고, 소박하고, 고적한 애련암 영역의 모습은 참으로 애련이라는 이름이 제 짝을 얻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번잡하지 않고, 고대하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미학을 찾아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애련암에는 그런 미학이 좁직한 공간 가득 충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하여서, 비로소 나는 거기까지 들려오는 망치소리를 너그럽게 참고 들어줄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애련암 극락전
절집의 중심은 불당이다. 왜 그러한가? 거기 부처님이 자리잡고 계시고, 또 대부분의 불당은 오래된 역사를 안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여러 장식물들을 포함하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련암은 이런 보편적 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애련암의 불당이라고 해봐야 극락전 뿐인데, 이것도 17년 전에 불탄 것을 중건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련암의 중심은 요사채이고, 요사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타기 전의 애련암은 지금 애련암 영역의 서쪽 한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간의 모양으로 보아서는 동향한 집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 터는 여전히 비워져 있고, 버려진 빈터가 아니라 잘 관리된 빈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쑥대나 작은 나무 하나 없는 풀밭이다. 그것은 지금 애련암 영역과는 키 낮은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간을 구분하여 놓았으면서도 잘 관리되고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거기 불당이 들어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인가? 풀밭의 한쪽 끝, 지금 애련암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맞닿아 있는 곳에는 두 개의 돌덩이가 어울려 있다. 주추 하나와 장대석 하나. 그것이 이 옛 애련암 영역의 주인처럼 옆으로 누워있다. 옛 영화를 증거하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인가?
옛 애련암 터는 남쪽으로 거대한 반석을 축담으로 삼고 그 위에 조성되어 있다. 이 거대한 반석 위에는 키 낮은 소나무 두 그루가 터를 잡았다. 키야 작지만 그 소나무들이 버텨낸 세월이야 어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돌 위에 뿌리를 내리고 몸체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월이 아니다. 세월을 초월하는 의지인 것이다. 진실로 불력을 쌓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불타버린 애련암의 불당을 나로서는 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과 오늘의 극락전을 비교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작고 단정한 모습의 지금의 극락전은 남향하여 서서 공간 전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 시야 속에는 사각의 절집 마당이 펼쳐지고, 영역 저 너머로 산 아래 세상이 펼쳐진다. 우리가 안동 일원에서 가장 높은 학가산 꼭대기 주변에 터 잡고 있는 산사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여 주듯, 극락전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세상 속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여기저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애련암의 부처님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터를 잡은 것은 멀리 산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상 일로부터 초연하기 위해서, 세상 일을 넓게 보기 위해서. 세상 속에 묻혀서야 부처님의 안력이라 하더라도 작은 가치에 사로잡혀 좌불안석하기 십상일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 학가산 꼭대기쯤으로 올라와 앉아서야 기와 불사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부처님의 여유를 갖출 수 있었으리라. 애련암의 부처님은 작고 소박한 불당 한가운데 무겁게 자리잡고 앉아 조을 듯한 시선으로 세상을 오시하고, 세월을 희롱한다. 옛 애련암 터의 반석 위에 터 잡은 두 그루 소나무처럼.
극락전의 동쪽 문 앞에는 돌로 된 표석이 하나 버티고 서 있다. 중건공덕성불비. 거창한 이름의 비석이다. 불기 2532년 무진 상월 초8일 황룡등천시, 중건주 혜통화상. 아하! 혜통화상님이 불 탄 절을 다시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절집을 지키고 있는 스님이 혜통화상이고, 혜통화상은 이런 절집의 고적함을 사랑하는 스님이신 모양인데, 불행하게도 그날은 출타 중이라 인사를 나눌 기회는 가질 수 없었다.
극락전 뒤편은 바위절벽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바위절벽 아래 샘이 솟았다. 바위 아래 시멘트 확을 지어 놓고, 철판 덮개를 씌운 우물이 있었는데, 열어 보니 차고 깨끗한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푸른색 플라스틱 바가지도 하나 우물 덮개 위에 놓여져 있다. 물을 마셔 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중건기념비 동쪽으로는 두 그루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웠고, 두 그루 모과나무도 노랗게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련암의 두 보살님
절집 마당에는 노란 호랑이 무늬 털을 가진 고양이가 한 마리 어슬렁거린다. 절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아닌 듯하고, 들고양이가 애련암에 둥지를 튼 모양이다. 고양이는 마당 안을 이리 저리 어슬렁대다 절집 마당 동쪽 끝으로 자리잡은 요사채의 샤시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요사채는 시멘트로 지은 작은 살림집이다. 절집의 품격과는 관계가 없는 실용적인 선택이 거기 있었다.
요사채의 샤시문이 열리고 중년의 보살님이 하나 마당으로 나왔다. 옛 절집이 17년 전에 불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보살님이었다. 보살님은 우리에게 들어와 차라도 한잔 들라는 청을 하였다. 우리는 극락전을 돌아보고 나서 보살님의 청을 따라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샤시문이 달린 방은 부엌 겸용이었다. 한쪽으로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고, 우리를 청한 보살님과는 다른 보살님이 커피를 끓여 내었다.
두 보살님은 이 절집의 오랜 신도라 하였다. 두 분이 다 서울서 같이 오셨지만, 우리를 청한 보살님은 20년 이상 출입한 신도이고, 우리에게 커피를 만들어주는 수고를 한 보살님은 15년 정도 출입한 신도라고 하였다. 앞의 보살님은 여성스러운 점이 눈길을 끌었고, 뒤의 보살님은 활달한 점이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앞의 보살님이 이 절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듣지 못하였다. 뒤의 보살님은 부산 사는 동생이 이 절에 다녔는데, 동생을 따라 출입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인연이 닿으면 멀리서도 오는 것이지요. 인연이 닿지 않으면 코앞에 살아도 안 오게 되는 거 아닙니까?”
김복영 씨가 안동 살면서도 20년 전에 한번 이 절에 와 보았고, 나는 초행이라는 이야기 끝에 두 보살님이 참 멀리서도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나는 두 보살님이 멀리서 어렵게 이 절에 출입하는 이유에 대해 듣고 싶었다.
“우선 부처님이 있으니 좋지요.”
왜 이 절이 좋으냐는 나의 물음에 20년 된 보살님이 웃음 섞어서 한 말이다.
“절집의 부처님이야 어디에나 있고, 다 좋지요. 특별히 애련암 부처님만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아요?”
내가 말하였다.
“공기 좋고, 스님이 좋아요.”
15년 된 보살님이 말하였다.
“스님이 어떻게 좋습니까?”
“그냥 좋아요.”
20년 된 보살님은 웃음기만 날리고 서 있고, 대답은 15년 된 보살님이 도맡아서 하였다.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무조건 좋지.”
그러나 그녀는 그 대답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인 모양이었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고, 아시는 게 많아요.”
미상불 그것은 억지로 찾아낸 답변일 것이었다. 앞의 대답만으로 충분한 것을. 덧붙이는 말은 언제나 좋은 느낌을 해치게 마련이다. 나도 언제나 이 점을 실감하면서도 굳이 덧붙이는 수고를 거듭한다. 경계할 일이다.

20년 된 보살님은 샤시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를 챙겼고, 우리에게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하였다. 이야기는 혜통스님과 그 형제분이라는 혜경스님에게 이르렀고, 뒷산 등산로에 미쳤다.
“이 뒤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김복영 씨가 확인하듯 물었다.
“한 30분 걸려요. 스님은 20분 정도 걸리고…”
혜통스님. 부재중인 그를 가장 분명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극락전 옆에 버티고 서 있는 빗돌이 아니라 샤시문 옆 안 벽에 걸려있는 두 개의 밀짚모자였다. 그리고 그 벽에 붙은 액자 속의 글씨들이 특히 눈길을 잡아끌었다.
“상이 없이 베풀라/
걸림 없이 얻으리라/
목적 없이 행하라/
고통 없이 이루리라/”
좋다. 좋도다. 비로소 나는 밖의 빗돌에서 볼 수 없었던 혜통스님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밀집 모자 속에 얼굴을 감추고 휘적휘적 학가산 정상을 향해 걸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연하였다. 이 작은 절, 산 속 깊이 숨어 웬간해서는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고, 십 수년씩 된 찰신도들만이 가끔씩 기도하러 들어오는 암자의 주인만이 좋아할 법한 글이 아니겠는가. 한 줄기 바람이 되고, 한 덩이 돌이 되는 것이 인간이 목적할 사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되고, 한 덩이 돌처럼 되어서야 깨끗한 인간의 숨결을 토해낼 수 있음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속기가 그만큼 찰진 탓이다. 혜통화상. 그는 상 없이 베풀고, 목적 없이 행하는 길을 어디까지 높이 걸어올라 갔는가? 그는 한 줄기 바람이 도달한 높이까지, 한 덩이 돌이 온갖 땅덩어리를 아래로 깔고 앉은 학가산 정상 애련암이 자리잡은 높이에까지 이미 이르러 있는 것인가?

추자나무의 환송을 받으며
20년 된 보살님은 절 집 공양을 들지 않고 나서는 우리를 따라나와 아쉬워 하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언젠가 한가로울 때 다시 애련암에 들러 스님도 만나보고 등산도 하여 보라는 청을 하였다. 그럴 때 자신이 이 절집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혜통스님! 그를 만나 본다? 인사를 하고 절집의 마당을 나서며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나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두려운 일이기도 하였다. 속기 가득한 내가 속기를 떨쳐낸 인간 앞에서 어떤 시선을 갖춰야 할 것인가가 우선 걱정되는 일이었고, 액자 속 그의 표어가 그의 인생 속에서 실종되고 없다면 어찌할까 하는 것도 다음으로 걱정되는 일이었다.
걱정이 많아지는 것은 피해감이 상책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액자에 넣어 벽에 걸 좌우명이 될만한 것이 아닌가? 나는 혜통스님이 부재 중일 때 애련암을 찾은 행운을 자축하였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베품, 목적 없는 행위를 일상의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한 사람에 대한 영상을 고스란히 품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나의 자존이 상처받지 않고 돌아갈 수 있고, 그것이 실재라는 환상으로 인간의 위엄을 내 속에 자리잡게 하여 돌아갈 수 있는 이중의 행운을 얻었으니, 그의 부재는 나의 원행을 두 곱은 넉넉하게 남는 장사로 만들어준 셈이라고 하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추자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절집 초입의 추자나무는 거목의 품새를 갖추고 있었다. 오래 전 절집에 머물렀을 누군가의 손길이 거기 미친 결과이리라. 절집 입구의 추자나무와 옛 절터 반석 위의 소나무. 둘은 참으로 어울리는 짝으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둘은 세월을 동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서로가 들여다보고 있는 세상은 사뭇 다르다. 소나무는 스스로의 인고를 실험 중이라면 추자나무는 인간을 위한 헌신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탓인가? 소나무가 절집 안쪽으로 한발 들어서 있는 지점을 장악하고 있다면, 추자나무는 절집 바깥으로 한발 내놓고 있는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추자나무의 그림자를 벗어나면 굿당으로 보이는 당집이 하나 있고, 텅 빈 주차장이 있고, 인간의 손길이 오래 미치지 못한 절집 아래쪽의 밋밋하게 흐르는 경사면이 있다. 굿당은 애련암의 발치에 시멘트로 허름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소각용으로 마련된 시멘트 구조물의 크기로 보아 목하 성업을 구가하였던 묘양이다. 인간이 지고 가는 짐이 얼마나 큰 것이기에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갈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가? 굿당은 그렇게 엉뚱하게도 내게 인간의 무거운 짐을 떠올려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차장 저쪽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리는 경사면은 밭으로 이용되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또 언젠가는 밭으로 써먹었던 흔적이 역력한 것이었다. 거기 감자라도 심고 콩이라도 가꾼다면, 애련암 영역은 한사람은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 욕심 없는 사람이 몸을 숨기고 살기에 적당한 곳이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흠칫하였다. 영영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의 속기는 농군의 아들로 성장하는 동안에 고질이 된 나의 품성인 것인가? 허허! 이것이야말로 세인들이 실소할 나의 거대한 빗돌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