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평준화 왜 해야 하는가?(글/박주현)지난 2002년 일산 등 수도권의 6개 신도시들이 일제히 고교평준화 제도를 시행한 데 이어, 지난 해 11월 여수, 순천, 목포 등 호남의 중소도시들도 주민 여론조사를 거쳐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고교평준화 제도가 적용되는 지역은 서울, 부산 등 우리나라의 모든 광역시를 포함하여 전국 26개 시이며, 전체 인문고생의 75% 가량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안동은 지난 90년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고 인재의 유출을 막는 한편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선발제를 강행하였지만, 과연 당시의 교육 목표가 얼마만큼 충실히 달성되었는지 그 성과를 검토해 보고 고교평준화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선발제의 성과>>>
선발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고교평준화 제도로 인해 하향 평준화된 안동의 학력을 끌어올려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발제 이후 안동고를 이전하면서 180여 억 원을 투자하는 등 경쟁력 있는 명문고 육성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안동의 명문대 진학률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안동 전체의 서울대 진학생 수는 해마다 10명 남짓한데 이는 평준화 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물론 서울대 진학생 수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는 있지만, 다른 명문대를 포함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선발제 시행의 또 다른 명분은 우리 지역에 명문고를 육성함으로써 지역의 인재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나아가 외지의 인재들까지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안동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특목고 등을 찾아 외지로 나가고, 심지어 부부가 별거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를 대도시로 전학시키는 학부모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부모들의 가장 큰 불만은 우리 지역에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고등학교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선발제 옹호론자들은 평준화 제도가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하여 왔다. 그러나 학교 선택권이란 학교마다 다양한 교과 과정과 교육 내용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현재 안동의 인문고들은 교과 과정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학교선택권은 단순히 우수한 학생이 많이 모인 학교에 대한 선호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에게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뿐, 대다수 학생들은 중학교 내신 성적에 따라 고교에 배당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안동의 고교 입시에 선택과 선발은 없으며 '고교배당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선발제가 남긴 것>>>
고교서열화 현상은 선발제가 남긴 가장 심각한 폐해이다. 명문고 진학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학생들은 엘리트 의식과 패배 의식을 지니게 되고 이것이 청소년기의 원만한 인격 형성에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패배 의식에 빠진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 의욕마저 상실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고, 교우 관계마저 위축되어 비슷한 수준의 학교 학생끼리만 교우하는 경향도 발견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이후 사회 생활에까지 이어져 결국 지역민의 화합과 결속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단지 청소년기에 지적 성취가 높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랜 동안 열등감과 좌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기의 경쟁에서 패배한 학생들이 짊어져야 할 이 멍에와 상처는 선발제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이득으로도 보상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간 경쟁의 상실과 공교육의 붕괴 현상 또한 선발제가 남긴 폐해이다. 선택과 경쟁은 선발제의 핵심 개념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안동 지역은 선발제로 인해 선택과 경쟁이 사라졌다. 선택은 성적에 따른 획일적 배치이고, 경쟁은 아예 성립되지 않고 있다. 평준화 시절 지역의 고교들은 같은 조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학업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학교의 성과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수 학생을 독점한 학교는 지역민의 기대에 큰 부담과 고민을 안게 되었고, 나머지 학교는 교육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 '교실 붕괴 현상'은 평준화 지역의 공립 고교에서 일어나는 문제이지만 안동은 사립학교의 공통적 현상이다. 사립이 80%를 차지하는 지역의 특성상 사립학교의 붕괴는 곧 공교육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발제로 인한 고교 서열화 현상과 공교육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사교육비 지출을 증가시켰다. 선발제 이후 지난 12년 간 안동의 학원과 과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대도시와는 달리 안동 지역은 명문고 진학을 위한 초중학생 대상의 사교육 시장이 유난히 발달되어 있다. 특히 중학교 시절부터 내신 점수따기에 내몰린 학생들은 정작 고교 교육에 필요한 기초 학력 연마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고교 진학 후 학력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 중학교가 입시위주 교육에 치우치게 되고, 고등학교는 과열 유치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등 지역의 교육력이 낭비되는 일도 간과할 수 없는 선발제의 폐해이다.
<<<고교평준화 제도 도입의 필요성>>>
명문대 진학률 제고와 인재 유출 방지, 학교선택권 보장이라는 선발제 시행의 명분이 모두 사라진 마당에 이 제도를 더 이상 지속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고교서열화와 공교육의 붕괴, 사교육비 증가 등의 부작용을 계속 방치한다면 지역의 중등 교육은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황폐화될 것이다.
교육 기회의 평등이라는 공교육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 중학교 졸업생의 98.9%가 고교에 진학하는 지금 고교 교육은 의무 교육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세운 공립학교가 일부 우수한 학생만을 선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훌륭한 시설과 환경을 갖춘 우리 지역의 공립학교는 당연히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영미 등 서구 국가들도 사립은 자율 운영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공립은 학교를 배정받는 학구제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선발제를 시행할 당시와는 크게 달라진 교육 여건의 변화 역시 고입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먼저, 평준화 제도를 전제로 하여 내신 성적을 반영하고 있는 현재의 대입제도하에서는 상대적으로 선발제 지역의 명문고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내신 위주의 수시 입학이 확대되면서 이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수상한 학생이 내신 성적 때문에 서울대 수시모집 1차전형에서 탈락한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안동과 교육 환경이 비슷한 여수, 목포, 순천 등 호남의 중소도시들이 고교평준화 제도를 다시 도입한 주된 이유도 선발제 지역이 대입제도에서 크게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특수목적고가 크게 늘어났으며, 민족사관학교와 같은 자립형 사립고가 새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에 70개나 되는 특목고 재학생은 전체 인문고생의 6%, 자립형 사립고까지 합하면 7%에 가까우며 이는 서울, 연·고대 등 명문대 정원의 몇 배에 이른다. 평준화의 보완책으로 그 숫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인데 지방 중소도시의 명문고가 이들 학교와 경쟁하여 이기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평준화 제도를 통해 인재를 여러 학교에서 나누어 육성하는 것이 훨씬 경쟁력이 있다. 이는 비교되며 자란 자녀보다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자란 자녀가 보다 바람직하게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지막으로, 선발제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학력 향상을 위해서도 평준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평준화제도가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1995년 한국교육개발원은 평준화제도가 학력 저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결론 맺었으며, 지난 2001년 강태중(중앙대), 성기선(가톨릭대) 교수는 평준화 고교의 학업성취도가 비평준화 고교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를 한국교육개발원에 보고한 바 있다. 이밖에도 고교평준화 제도가 학력 향상에 유리하다는 연구는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중소지방도시에서 명문고를 육성하는 방식은 더 이상 실효와 명분이 없다. 이제는 고교평준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공교육의 이념을 구현하고 변화된 교육 여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지역 중등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역민의 지혜와 뜻을 모아야 한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