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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답답증이 나는구나, 그 좋은 술 한 잔 다오!(글/임재해)

두 형제가 사는데 동생이 그림을 아주 썩 잘 그렸어요. 어쩌다가 형이 나라에 중죄를 졌는데, 죄값으로 꼭 죽게 됐단 말이지. 원이 그 형을 불러설랑,
"네 죄를 모면해서 살려줄 터이니 내 시키는 대로 들어주겠느냐?"
"예, 무슨 말씀인지 얘기해 보시라구."
"네 동생이 그림을 잘 그린다니, 네 동생의 그림을 한 장만 얻어다 주면 네 죄를 모면시켜주겠다."
"그러면, 몇 달 말미를 해주십소사."
"몇 달이나마나 일년이래도 좌우간 그림 한 장만 얻어온대면 네 사형은 모면할테니까느루, 일년 이상이 돼도 우쨌든 그림만 한 장 가져오라구."
"그러겠다구."
그래 형이 그 말을 듣고 동생의 집에 가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만 하는 거요. 동생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형님 자기 집에도 일이 많은데, 자기 일은 제쳐놓고 내 집에 와서 저렇게 몇 달이고 아무 말도 없이 자꾸 일만 도와주고 있으니 그거 이상하단 말이지. 그래 인제 몇 개월이 됐던지 그렇게 있으니까느루, 동생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깐 하도 답답하니깐 하루는 물어봤어요.
"형님이 집의 일도 바쁜데, 왜 내 집에 와설랑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멫달을 일만 도와주고 있느냐구. 그 무슨 이치냐구?"
"난 니게다가(너에게) 말을 해야(해봐야) 들어줄지 않을 것 같애서, 니 입에서 뭔 말이 떨어질 때를 바래고 있노라구."
"그 뭔 얘긴지 해 보시라구."
그래 그 얘기를 쭉- 했어.
"내가 원에게 죄를 졌는데,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됐잖느냐. 그러니 원이 '네 동생 화가래니깐 그림만 한
장 얻어오면 사형을 모면허겠다' 그러니, 내가 얘길 해야 네가 들어줄 것 같질 않어. 그래서 난 네 입에서 말 떨어질 때만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유, 진작 그러시지. 여지껏 속에다 두고 계셨느냐구."
"그렇다구."
"그러면 내가 그림을 그려올테이까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일을 돌보고 계시라구. "
그러고는 화공 도구를 전부 해 걸머지고는 길을 떠나는 거야. 방방곡곡 댕기며 봐야 도대체가 어디 그릴 것이 없어. 그림을 뜰 만한 것이 없단 말이야. 돌아댕기다 한군데 산골 질(길)을 가다가 보니깐, 질 옆에다가 조그맣게 집을 짓고설랑은 고운 여자가 술을 팔고 앉았어. 그래 보니깐 그 아름답기 그지없단 말이여. '저걸 하나 뜰까?' 그런 생각이 나드란 말이여. 그래 들어가서,
"아이, 나 목이 마르니 술이나 한 잔 달라."
고 그러니깐, 그 술을 한 잔 주는데 아, 이 술이 또 일미여. 맛이 좋아. 그래 먹고서는,
"그럼 내일 또 오겠노라."
그러고는 그 주막집에서 멀찌감치 돼지울처럼 움막을 하나 짓고는 거기 들어가서 자는 거야. 자고서 인제 매일같이 가는거야, 그 술집에를. 그래 슬(슬쩍) 한 모습을 보고와설랑은 그 인제 하나 딱 그리는 거여 하루에 꼭 하나씩. 가서, 한쪽 귀면 귀, 눈이면 눈, 꼭 하나만 보고 와서 꼭 하나씩 그리는 거여.
그럭하다 보면 매일 같이 술을 한 잔씩 먹고는 그 모양을 보고서 인제, 오늘은 코를 봤으면 와서 코를 그리고, 그 이튿날은 가서 입을 봤으면 입을 그리고, 매일같이 하루에 한 가지씩만 똑 보고 와서 그리는 거여. 그런데 마지막 인제 그리는데 마지막을 그리고 나니까 그 여자가 슬며시 죽어. 여자가 죽어. 그래 겁이 나서 얼른 와설랑에 그림을 마쳐가지고 뚤뚤 말어서 짊어지고는 들고 뛰는거지. 괜히 나중에 탄로나면 죽겠으니까, 들고 뛰는 거여.
그래 여러 달만에 집에 왔는데 형이 인제 있어. 형한테 집을 지키고 있노라 수고가 많으셨다고 인사를 하고,
"원님한테 가설랑은 '그림을 가져올테니 그림을 걸어둘 단칸집을 하나 짓는데 문을 하나만 내고설랑은 단칸집을 잘 지으라'고 그래라고."
형이 가서 원을 보고 그랬더니, 후원에다가 남구르다가(나무로) 일간 초옥을 잘 짓고 문을 하나만 딱 내고 잘 지었어. 동생이 형에게 그림을 주며 시키는거여.
"이 그림을 가져가서 원한테 당부하기를, 그림을 그 지둥(기둥)에다, 방에 벼름짝(벽)에다가 걸어놓고 매일같이 그림보고 술을 한잔씩 달라고 그래라. 두 잔이나 세 잔이나 거푸 먹으면 못 쓰니까. 매일 한 잔씩만 먹으라 그래라. 그러면 수만 년이래도 한 잔씩 먹을 수가 있어. 괜히 더 먹었다가는 안돼. 그러니깐 아주 신신당부허라구."
형이 그림을 가주고 원을 찾아가서 동생이 시키는 대로 당부를 하니,
"아, 그러냐구? 그럭허지 그럼! "
그러고는 그림을 받아다가 별당의 단칸방 벽에다가 걸어놨어. 걸어놓고는 인제 관아에 가서 사무를 보고 저녁때 들어오다가 집으로 바로 안가고. 그 그림 걸어놓은 방에 쇳대(열쇠)를 가주고 열고 들어가서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 덥다! 오늘 참 매우 덥구나. 그 술 한 잔 다고."
그러면 그림에서 그 미녀가 아주 분통같은 손으로다가 술을 한 잔 줘. 먹으니 기가 막히게 술이 좋아. 야! 그저 뭐 수없이 먹었으면 좋겠으나 딱 한잔씩만 먹으라고 그랬으니깐 그대로 해야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잘 먹었다고."
그래고 인제 또 문을 걸어 잠그고선 집으로 왔어. 이렇게 얼마동안 하다보니 마누라한테는 정이 없어. 아무래도 그림속에 있는 여자한테 마음이 잔뜩 간단 말이여. 퇴근해서는 늘 거기 별당에 먼저 들어가지. 들어가서는
"하! 오늘은 무슨 사무가 있었고 또 뭔 정사가 바쁘고 그래서 오늘은 아주 뭐 했다고! 그러니 술 한 잔 다고."
그러면 역시나 그림에서 분통같은 손으로 술을 한 잔을 준단 말이지. 그 마시니 기막히게 맛이 좋아. 이렇게 얼마를 지내게 되니, 그 부인이 이상하그던. 하루는 퇴근할 때 별당 뒤에 숨어서 지켜보이, 여차저차한단 말이지. 그래 다음날 원이 출근하고 난 담에 그 별당에 가서 쇳대를 열고 방에 들어갔어. 원의 부인이 자기도 인제 본 대로 하네.
"야, 어째 목도 컬컬하고 속이 답답증이 나는구나. 그 좋은 술 한 잔 다고."
여전히 분통긑은 손으로 술을 한 잔 줘. 그래서 먹었어.
"야, 한 잔 먹으니 어디 시답잖아서 견디겠느냐. 그 한 잔만 더 다구."
그러니까 한 잔 더 줘. 한 잔 더 주드라구. 먹으니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아.
"야, 일배 일배 삼배주라는데 그게 이왕이면 석 잔 채우자. 한 잔만 더 다구."
그러니까 한 잔 더 줘 석 잔 먹었어.
"야, 이왕 먹을려면 아주 잔뜩 먹어보자. 한 잔 더 다구."
그 다음은 없어. 안 줘. 술잔을 거푸 먹었는데 안 줘. 겁이 나지, 안 주니까, 그래 인제 문을 채우고서 얼른 나왔지. 저녁때 원이 집으로 오다가 또 별당에 들어가설랑,
"야, 뭐 어떻고 저떻고 거 술 한 잔 다고."
그러니까, 술을 안 준단 말이여. 그 마누라가 다 먹어버렸으니 술을 줄 텍이 없지. 매일 한 잔씩만 먹어야 하는데 석 잔이나 거푸 먹었으니 암만 사정을 해도 안 줘.
"왜 골이 났느냐구? 그러지 말고 내 목이 컬컬하니 어서 한 잔 달라구!"
안 주그덩. '그거 이상하다. 암만해도 무슨 조화가 있다'고 나와가주고 부아가 나서 집안의 종놈들을 싹 불러다가 꿇어놓고는 매질을 해도 어느 놈이 들어간 일이 있어야지. 그래서 원이 죄를 지은 형을 불렀어.
"매일 한 잔씩 먹으라는 술을 오늘부터 안 주구설랑은 이렇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조환지 네 동생한테 가서 물어보고 오라구."
형이 동생을 찾아가서 무슨 조화냐고 물으니,
"그걸 내한테 와서 묻지들 말고, 당신네 집안이나 닥달을 하시오. 당신 집안에 어떤 사람이 약속을 안 지키고 나쁜 짓을 했을거라."
그러드래. 그래 원이 종놈들을 다시 불러놓고 닥달을 하는거여. 그 애매한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매만 죽도록 맞지. 그래 부인이 가만 보니깐 안 되겠그덩.
"그 매를 멈추시고 이리 들어오시라구. 내가 헐 말이 있으니까."
원이 그적새는(그제서야) 매를 멈추고 방에 들어가니,
"내가 사실은 이러저러해서 당신이 내게는 정이 없구 만날 거기만 정을 쏟구 해서, 하루는 내가 들어가서 거푸 술을 석잔 받아먹었더니, 그 담부터는 안 주고 그렇게 됐다구."
그러니 원인들 어쩌겠어. 마누라가 그랬다는데. 마누라한테 숨긴 자기 죄밑도 있구 말이지. 그래설랑은 고만 그 그림이 나중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드라고. 옛날엔 그런 화가가 있었대. 지금은 그런 화가가 없잖아.

이야기의 터무니없음과 이야기의 재미
이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사람이 나오고 술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터무니없는 것 같은 상상력이,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내고 바람직한 가치관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이야기로서의 의의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파격적 상상력이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충격도 주고 일정한 깨우침도 주는 것이다. 그림의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이야기로 형상화했다는 점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점이야말로 이야기가 지닌 창조적 상상력의 미덕이자 이야기의 진정한 재미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권선징악의 교훈성을 내포한 것인데 비하여 이 이야기는 그러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림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얘깃거리부터 특이하다. 자연히 선악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좋고 나쁨을 특별히 따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특별히 나쁜 사람을 징계하는 내용도 없으며 특별히 착한 일을 했다고 행운을 듬뿍 안겨주는 일도 없다. 실패와 성공의 기복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되어 그가 누리는 성공을 대리 만족할 수도 없다. 이야기의 상투적 말미를 이루는 "잘 먹고 잘 살았단다"는 말도 불필요해진다. 상황이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처음과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우리에게 새로운 자각을 일깨워준다. 그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림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
그림이 무엇인지 어디서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림 자체를 설명하는 부분이나 그림의 가치를 직접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한 장의 값어치는 사람 목숨만큼이나 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원이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살려주는 대신에 동생한테 가서 그림을 한 장만 얻어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얻어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줄테니 자기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거의 부탁하는 수준이다.
원이 죽을 죄인을 앞에 두고 큰 소리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담보로 그림을 얻고자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셈이다. 중죄인이 아니라도 원의 자리에 있다면, 이 정도 부탁은 당당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원은 죽을 죄인에게 호감을 사가며 그림 한 장을 얻고자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그림 한 장 값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비싸다. 왜냐하면 원이 "네 이놈! 목숨만은 살려줄 터이니 그 대신에 네 아우에게 가서 당장 그림이나 한 장 얻어오너라!" 하는 당당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자네 목숨만은 내가 살려줄 터이니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는가?" 하는 투이다. 바로 그림을 들이대지도 않고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하고 동의를 구한 뒤에 비로소 그림 한 장을 부탁한 것이다. 목숨보다 그림값을 더 비중 높게 여긴 까닭이다.
목숨이 달려 있는 형은 오히려 배짱이다.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원이 '내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하고 물으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놀라거나 이제 살판났다면서 '무슨 일이든 들어주겠습니다. 시키기만 하십시오!' 하고 즉각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 말씀인지 얘기해 보시라구."하며 태연하다. 들어줄지 말지 일단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는 투가 아닌가. 이렇게 두둑하게 배짱을 부려도, 원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림 한 장만 얻어다 주면 죄를 면하고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거듭 다짐을 하는 상황이다.
형은 내키지 않는 듯이 동의를 하되, 조건을 붙인다. 원에게 금방은 안되고 몇 달 말미를 달라고 한 것이다. 말미를 넉넉히 주면 그림을 한 번 구해보겠다는 것이다. 일종의 옵션을 다는 셈이다. 어지간한 원 같으면 화를 불같이 내면서 '저 놈을 당장 사형에 처하라'고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을 붙여서 허락을 한다. 몇 달은 물론 일년이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숨값과 그림값을 대등하게 보고 정상적으로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보다 그림의 값어치를 훨씬 높게 잡은 나머지, 다른 조건들을 다 들어주면서까지 그림을 구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원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형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목숨을 살려준다고 하는데도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말미부터 요구한 것이다. 자기 동생이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림의 가치를 생각하면 손쉽게 요구할 일이 아님을 아는 까닭이다. 따라서 몇 달 말미를 달라고 했던 것이다. 동생에게 그림 한 장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도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듯하다. '일년이 걸리더라도 좌우간 그림만 한 장 얻어온다면 살려주겠다'고 하며, 요구한 것 이상으로 충분한 말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림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형은 죽을 목숨이 살아왔지만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없다. 그저 동생 집을 찾아가서 말없이 일만 거들었다. 자기 집의 일도 제쳐놓고 동생 집에 가서 묵묵히 머슴처럼 일만 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직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림을 얻어가야 하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동생네 일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동생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것은 동생에게 새로 목숨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요구이다. 그림의 가치를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동생이 몇 달을 두고 봐도 형이 하는 일이 아무래도 이상하였다.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는 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지 하고 그 이유를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여전하므로 그 까닭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네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부탁할 일이 있으되 염치가 없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림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거듭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비록 죽더라도 아우가 그림을 그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뜻밖에 아우의 반응은 선선했다. 진작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렇게 속을 썩이고 있었느냐며 형을 책망까지 하는 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까짓 그림 한 장이 대순가' 하는 식의 표현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림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이지 그림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림 그릴 차비도 대단하다. 형에게 집안 일을 당부하고는 화구를 두루 갖추어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케치 여행을 떠난 셈이다. 오랫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며 그릴 만한 것을 찾아다녔지만 '뜰 만한 것'이 없었다.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는 그림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분 같은데, 그림으로 '뜰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릴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실수로 이렇게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면, 그림의 의미를 별도로 부여하고자 의도적으로 한 말이다. 뜰 만하다는 것은 곧 고스란히 떠서 옮길 만하다는 뜻이다. 대상의 형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정도로 그림을 이해하기 쉬운데, 이 이야기를 한 할아버지는 '대상을 화폭에 고스란히 떠 옮겨 담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도 '뜨겠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그리다는 말과 구별하여 의도적으로 '뜨다'는 말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는 그야말로 '뜰 만한 것'을 물색하고 다니느라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좀처럼 대상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뜰 만한 대상을 만났다. 어느 산길에서 술을 파는 주막집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요즘 술 파는 여성이라고 하면 우습게 알기 일쑤이다. 물론 술 파는 여성이라도 사람마다 다 다를 터이지만, 이야기에서는 고운 자태만 이야기하고 말았다. 화가의 눈이 '저걸 하나 뜰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상에 관한 인식이 별달랐던 모양이다. 술 한 잔을 사서 마시는 체하면서 여인네를 자세하게 살폈다. 술맛도 기가 막힐 정도로 일품이었다. '내일 또 오겠노라'고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주막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돼지우리와 같은 움막집을 짓고 그림 작업에 들어갔다. 화구를 펼쳐 놓고서는, 매일 한 차례씩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척하며 그 여성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하루에 한 가지 모습만 유심히 보고 와서 그 모습 하나만 본 대로 그렸다. 술을 한 잔씩 먹고 와서는 코면 코, 눈이면 눈, 입이면 입 하나씩만 매일 그려나간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 그렸든 세밀하고 자세한 관찰을 토대로 한 부분씩 완벽하게 그려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은 한 부분씩 그린 것이 아니라 한 부분씩 떠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까 여자가 죽게 되었다. 여자의 생명이 고스란히 그림속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림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은 여기서 다시 입증된다.

그림의 여인이 분통같은 손으로 술을 주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완성하자니 여러 달이 걸렸다. 동생은 몇 달만에 집에 와서 형에게 당부를 했다. 고을 원에게 그림을 주기 전에 그림 받을 준비를 시킨 것이다. 그림을 보관할 단칸집을 한 채 지으라고 주문을 했지만, 그러한 주문을 전하는 형이나 그러한 주문을 받는 원이나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형이야 동생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원까지 그 주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그림 한 장을 받겠다고 했는데, 도리어 말미를 엄청나게 요구할 뿐 아니라, 이제 그림을 다 그려 놓고도 그림을 주지 않은 채 사람을 보내서 그림을 보관할 집부터 별도로 한 채 지으라고 하면서 요모조모 주문을 하는 데도 불평 한 마디 없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동생은 마치 군주처럼 행세를 하지만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림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말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원은 마치 상전의 말처럼 죄인의 동생이 시키는 대로 집 후원에다 별당을 짓고 출입문도 하나만 딱 내고서 잠금장치까지 마련을 하였다. 그림 받을 준비를 철저히 한 것이다. 그때서야 화가 동생이 형에게 그림을 주며, 다시 원에게 당부할 내용을 일러준다.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매일 술 한 잔씩을 달라고 해서 마시되 절대로 한 잔 더는 마시면 안 된다고 당부를 시키는 것이었다. 원은 당부를 듣고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을 할 뿐 아니라, 실제로 당부를 잘 지켰다. 매일 관아에서 퇴근하는 길에 별당에 들려서 그림을 보고 술을 한 잔 달라고 하면, 그림속의 여인이 분통같은 손으로 술을 한 잔 주는 것이었다. 그 술맛도 일품이었다. 그림 속의 여인은 곧 화가가 그림의 대상으로 삼은 산골 주막의 여인이며 그림속의 여인이 주는 술은 화가가 매일 주막에 들러서 마셨던 바로 그 술이었다. 그러니 여인의 자태도 아리땁고 술맛도 일품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고스란히 화폭속에 옮겨 담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속에 대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게 마련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원이 그림속의 여인과 술맛에 넋이 나갈 수밖에 없다. 부인의 처지에서 볼 때 원의 낌새는 무척 수상하다. 부부간에 정이 다 떨어진 것이다. 원은 퇴근하면서 곧바로 별당에 들려서는 "아, 덥다! 오늘 참 매우 덥구나. 그 술 한 잔 다고." 하고는 그림속의 여인이 주는 술을 마시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두루 이야기도 하고 정담을 나누게 되니 부인과 정이 날 리가 없다. 참다 못한 부인이 퇴근하는 원의 동정을 엿보다가 마침내 별당에서 그림속의 여인과 하는 수작을 알게 되었다. 시샘이 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서 자기도 한 번 시험해보리라 하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원이 관아에 나가자, 부인은 몰래 별당에 들어가서 원이 하듯이 자기도 "야, 어째 목도 컬컬하고 속이 답답증이 나는구나. 그 좋은 술 한 잔 다고." 하고는 술을 한 잔 얻어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혔다. 그 바람에 시기심도 사라져버렸다. 한 잔만 더 달라고 해서 한 잔 더 마셨다. 점점 술맛에 빠져들었다. "야, 일배 일배 삼배주라는데 그게 이왕이면 석 잔 채우자. 한 잔만 더 다구." 하고는 석 잔을 얻어 마셨다. 석 잔을 마시고도 만족할 수 없다. 다시 술을 청했더니, 이게 웬일인가 더 이상 술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술을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켜야 할 금기를 모르고 술 얻어마시는 것만 보고 좋아서 흉내를 내다가 일을 그르친 것이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얼른 문을 잠그고 별당을 나왔다. 원은 평소처럼 별당에 들러서 술을 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뭣에 화가 났느냐 하고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누가 저지레를 한 것으로 판단한 원은 종들을 불러서 닥달을 했다. 애매한 종들만 치도곤을 당했다. 할 수 없이 그림을 그린 동생에게 원인을 물어보도록 했다. "당신 집안에 어떤 사람이 약속을 안 지키고 나쁜 짓을 했을거라."는 말에, 종을 다시 불러다가 매질을 했다. 애매한 종들이 매를 맞는 것을 보고 마침내 부인이 "여차저차 해서 내가 술을 연거퍼 석 잔을 받아마셨더니 다음부터는 술을 주지 않더라." 하고 실토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화가와 살아 있는 그림
원님인들 자기 부인이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을 어쩌겠는가. 더군다나 아내에게 사실을 숨긴 자기 잘못도 적지 않다. 사정이 어떻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엎질러진 물이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이다.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 셈이다. 생명이 살아 숨쉬던 그림이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부인이 특별히 나쁜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원이 특별히 좋은 사람도 아니다.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원은 그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다.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안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원보다 더 주목받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그는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필요에 따라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의 그림 작업은 대상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실체를 고스란히 화폭 속에 옮겨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뜬다고 하였다. 원이 그림의 가치를 알고 화가가 진짜 생명 있는 그림을 그리니 죽을 사람의 생명도 구하게 되고 위대한 작품도 창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힘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다시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예술의 힘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자 창조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진정한 화가는 이처럼 대상의 겉모습만 베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혼을 옮겨 담는 것이다. 신라 최고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려놓았더니 새들이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하지 않는가. 솔거는 황룡사 벽에다 소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소나무를 옮겨심은 것이다.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진정한 화가로 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들려준 할아버지는 "옛날엔 그런 화가가 있었대. 지금은 그런 화가가 없잖아." 시골 할아버지이지만 요즘에는 그런 골돌한 화가가 없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어디 화가뿐이랴.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이 다 그렇다. 진정한 예술활동은 창조력에서 비롯된다. 창조력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양식이 새롭든 내용이 새롭든 어느 하나라도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창조력을 인정받지 못하며 따라서 예술성도 없다. 이야기속의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을 창조해냈다. 창조적 예술성을 극도로 미화시켜 놓은 이야기인 셈이다. 예술의 창조력을 가장 훼손하는 것은 표절이다. 예술가의 표절은 도둑질이다. 따라서 남의 것을 고스란히 모방하는 것은 아예 예술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훈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두고 음악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사교춤을 배워서 따라 추는 것을 두고 제비족들이나 '예술한다'고 하지 문화계에서는 예술활동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천박한 대중예술가들은 모방을 일삼는다. 대중가수 중에서도 나훈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너훈아, 김건모를 모창하는 김검모가 가수로 인정받을 까닭이 없다. 밥벌이 삼아 밤무대를 뛰는 사람을 두고 예술성을 거론할 계제가 아니다. 그러나 탈춤은 다르다. 민중적 양식을 담은 전통적인 민족예술로서 그 창조력이 세계적이다. 다른 어느 나라의 탈춤과도 구별되는 독창성을 지닌 민족극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후에 전승이 중단되는 수난을 겪은 탓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초기에 탈춤 계승운동이 붐을 일으키다가 후기부터는 창작탈춤이 활발하게 공연되었으며 80년대에는 민족극 한마당을 통해 다양한 창작탈춤과 마당극이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과천마당극 행사의 성공은 좋은 보기이다. 창작탈춤과 마당극이 우리 연극문화의 판도를 바꾸어놓고 있다.
안동에서는 국제탈춤페스티벌을 한다면서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탈춤만을 계속 되풀이해서 공연하고 있다. 이들 탈춤은 일년에도 몇번씩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꼭같이 공연된다. 문화재보호법상 재연밖에 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너훈아나 김검모 구실밖에 할 수 없다. 올 가을에도 크고 작은 행사에 두루 동원되어 재연되었다. 자연히 새로운 창조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일년에 정기적으로 한 차례 이상 발표를 해야 문화재로서 의무를 다한다. 따라서 이들 탈춤만 끌어모아 해마다 같은 것을 거듭 보여주는 것은 탈춤문화재 전승대회일 뿐 탈춤페스티벌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탈춤 전문가는커녕 시민들도 식상해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야시장의 먹자판에는 사람들이 복작거리는데 정작 탈춤마당은 텅 비어 있다. 나랏돈을 써가며 우루루 외국의 축제를 구경하러 다닌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없는 예산만 더욱 축낼 뿐이다. 탈춤축제의 본질을 망각한 채 한갓 관광거리로 축제를 구상하는 한 시행착오는 거듭될 수밖에 없다.

아비뇽축제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프랑스의 아비뇽축제가 세계적인 연극제로 성공을 거둔 것은 축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덕분이 아니다. 그들은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예술은 창조성이 생명이며, 창조성은 새로움이 생명이라는 상식에 입각해서 페스티벌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비뇽에는 세계 초연의 연극작품만 참가할 수 있다. 자연히 가장 실험적이고 가장 전위적인 연극작품들이 제일 처음 선보이는 연극제가 아비뇽축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경향에 관심을 가진 세계의 연극인들과 연행예술가들이 아비뇽축제에 다투어 모여들게 마련이다. 거기서 초연되는 작품을 먼저 보지 않으면 연극계에서 뒤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연극의 조류는 아비뇽축제가 이끌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아비뇽의 연극제가 세계적인 축제로 성공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연극이나 영화, 미술, 음악, 탈춤 등 예술축제의 생명은 창조성이다. 비록 이들 예술축제를 통해 관광수입을 올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축제를 계기로 새로운 경향의 실험성 높은 작품 하나라도 새롭게 생산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소득이 없다. 연극제든 영화제든 음악제든 새로운 작품이 발표되고 공연되지 않는 축제에 전문가들이 모여들 까닭이 없다. 연극 전문가가 모여들지 않는 국제연극제, 영화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국제영화제가 성공할 까닭이 없다. 새 작품이야 있든 말든 구경꾼만 많이 와서 관광수입이나 올려달라는 발상이야말로 천박한 상업주의적 발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작년에 봤던 묵은 탈춤을 거듭 보고자 탈춤판에 모여들겠는가.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세계적인 영화인들이 3백명이나 몰려왔다고 한다. 거기에는 영화의 창조적 생명력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어째 답답증이 나는구나, 나도 술 한 잔 다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