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천집과 향천선생(글/주승택)
향천 김용직(向川 金容稷) 선생은 광산 김씨 예안파(光山 金氏 禮安派)의 후손으로 안동 사람들이 외내, 오천(烏川) 또는 군자리(君子里)라고 부르는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원래 유서깊고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부친인 김남수 의사(金南洙 義士)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가산을 바닥내는 바람에 고학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모교의 교수가 되어 오래 재직하다가 현재는 정년 퇴직하여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향천 선생은 현대시가 주전공으로 전공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한 저술을 하셨는데 특히 시사(詩史)에 관한 한 앞으로 이를 능가할 업적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향천 선생께서『벽천집(碧天集)』이라는 자작 한시집(漢詩集)을 필자에게 우송하여 왔기에 필자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대시를 전공하는 향천 선생이 한시집을 낸다면 필자처럼 한시를 전공하면서도 한시를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향천 선생이 한시를 짓는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를 호사취미(好事趣味)정도로 생각해 온 것이 필자의 착각이었다. 모두 212편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들로 이루어진 아담하면서도 묵직한 『벽천집』을 받아들고 필자는 다시 한번 향천 선생의 집념과 노력에 고개를 숙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이라고 한 것은 이미 향천 선생이 50대 초반의 늦은 나이에 서예를 시작하여 10년만인 1997년에 당당히 개인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기 때문이다. 『벽천집』의 발문에서 밝혔듯이 향천 선생은 죽마고우인 지헌 김호길(芝軒 金浩吉)선생과 함께 벽사 이우성(碧史 李佑成)선생을 모시고 난사(蘭社)라는 시회(詩會)를 창립하였다(그것도 역시 50을 넘긴 知命의 연세에). 그런데 지헌 선생이 어떤 분인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낸 세계적인 물리학자로서 오늘날의 포항공대를 일군 분이고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자전(字典)을 찾아가며 『퇴계집(退溪集)』을 독파했다는 분이다. 때(연세 불문)와 장소(국내외 불문)를 가리지 않고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도전하는 두 분의 집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이 선비정신이요 양반의식이며 군자리(君子里)와 지례(知禮) -지헌 선생의 고향 -의 고색 창연한 반촌(班村)에서 자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 사치라고 생각한다.
각설(却說)하고, 향천 선생이 지은 한시에 대하여 필자는 그 문학적 성과를 왈가왈부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단지 전반적인 인상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수련기를 지나서 본격적인 창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정도의 감상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향천 선생이 가장 득의(得意)해 하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편인 「직지사의 여름」을 예로 들어보자(『벽천집』에 실린 시 열 편 가운데 아홉 편도 칠언절구이다)
松風吹送白雲還 / 一枕鳴泉客夢寒/ 莫道妙詮天竺在/ 眞如不外此靑山 (솔바람 불어보내 흰구름 오고/ 베겟머리 우는 시내 꿈이 시리다/ 말을 마라 참 불법이 천축 있다고/ 석가모니 참 이치가 이 청산인걸)
『벽천집』에서 필자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이 작품에서는 특히 "莫道妙詮天竺在 眞如不外此靑山"이 경구(警句)인데 소동파(蘇東坡)가 읽었더라면 아마도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또 "松風吹送白雲還"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一枕鳴泉客夢寒" 역시 결코 쉽지 않은 대수(大手)다운 솜씨이다.
이 작품 외에도 필자는 「쌍계사 춘음(雙溪寺 春吟」, 「삼각산(三角山)」같은 향천 선생의 시편에서 점차 원숙해가는 연탁(鍊啄)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남의 시를 평할 때 좀 과정해서 추키는 것이 우리 선인들의 풍습이다. 선인들의 문집 서발(序跋)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에는 이백(李白) 두보(杜甫)에 필적할 만한 시인들이 부지기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향천 선생에 대하여 두 번째로 경탄한 것은 향천 선생이 노심초사해가며 지은 한시보다도 원작을 능가하는(?) 역시(譯詩)쪽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향천 선생은 저으기 실망하시겠지만 아무래도 부전공에 해당하는 한시보다 주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문시쪽이 향천 선생의 장기가 아니었겠는가? 사실 한시의 번역 문제는 필자가 요즈음 무척 고심하고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인데 그 핵심적 문제는 직역을 할 것이냐, 의역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명역으로 꼽히는데 번역방식은 거의 축자역(逐字譯)에 가까운 직역이었다. 그러나 이 『두시언해』는 두보의 시를 한문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능력을 갖춘 독자들(당시 사대부들)을 대상으로 좀더 정확한 이해와 감상을 돕기 위하여 편찬된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들은 한시를 한문으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독자들에게 동양문학의 진수인 한시를 어떻게 전달해야 그 참맛을 부분적으로라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신념은 재창작에 가까운 과감한 의역으로 시를 시답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당시(唐詩)를 시조로 재창작한 최남선의 번역을 높이 평가하며 비록 부분적인 오역이 있기는 하지만 김소월의 당시 번역에도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이 『벽천집』에서 향천선생은 5언시는 동량 4보격으로(흔히 4·4조라고 함) 7언시는 층량 3보격(흔히 7·5조라고 함)으로 세련되게 의역을 하였는데 그 솜씨가 최남선과 김소월을 능가한다고 단정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굳이 실례를 들지 않는 것은 『벽천집』의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이 같은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까 이 『벽천집』은 각기 2백12편의 시를 수록한 두 권의 시집(한시집과 국문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느라고 다시 한번 『벽천집』을 통독한 필자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고희(古稀)를 바라보시는 향천 선생께서 도산별시(陶山別試)에 도전하시어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유가(游街)하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다(당연히 장원급제 하실테니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