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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바우 청주정씨 종가(글/윤천근)

선성이씨 종가와 같이 있는 청주정씨 종가
와룡! 누운 용의 등처럼 동글동글한 작은 산들이 연이어 이어서 있는 곳이다. 국도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안동소주 휴게소 옆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으면 태2리, 청주정씨 종가가 선성이씨 종가와 위 아래로 거의 연이어 붙어 있는 곳이다. 진입방향 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선성이씨 종가이다. 그곳으로부터 한번을 굽어돌아 밋밋하게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몇발짝 채 가지 못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 청주정씨 종가다.
"이 위에 있는 집은 죽헌(우윤공)의 사위 선성이씨의 종가이지요."
청주정씨 종가에서 만난 종손 정윤성씨는 말하였다.
"집도 땅도 다 죽헌이 그 따님에게 마련하여 준 것이지요."
죽헌! 대나무집이란 뜻이니, 처음 여기 태2리에 기지를 열었다는 청주정씨 15대 정두의 호이다.
"자는 대임이고, 호는 죽헌이니 조봉대부 사담시 첨정이다.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을 증직으로 받았다. 퇴계선생이 큰 일을 할만한 자질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일찍이 자식을 위하여 도산의 농운 한켠에 역락서재를 지었다. 정덕 무신년(1508년)생이며 만력 병자년(1576년)에 죽었다."

《청주정씨 대동보》의 기록이다.
바로 그 정두, 그러니까 도산서원 입구쪽에 자리잡고 있는 역락서재를 지어 퇴계 이황에게 건네준 정두라는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인 것이다. 그가 여기 태2리 기지에서는 따님에게 또 한재산을 선뜻 떼어주고 있는 것이니, 우리는 그의 살림살이가 상당히 풍족하였음을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동보》에 의하면 정두는 4남 3녀를 두었다. 그 중 맏따님이 선성인 이대인에게 출가한다.
"사위가 일찍 죽고 따님이 어린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살고 있는 것이 안스러워 따님을 데리고 오셔서 집도 지어주고 땅도 베어주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선성이씨가 여기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어요. 도랑을 경계로 저쪽은 선성이씨들 것이고, 이쪽은 우리 것이지요."
정윤성씨의 말이다.
"전에는 우리도 선성이씨도 여기 여러 집이 살았지만 다 떠나가고 지금은 우리가 여기 셋집밖에 없고, 선성이씨들도 지금은 몇집 없어요. 이 동네도 다 각성이지요."
따님을 불러들여서 삶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문화, 우리에게 유전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역사 속에서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문화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가 조선 초·중기에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여기 태2리에서도 우리는 그 증거의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문화의 의외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도 와룡의 태2리에 이르러 두 가문이 나란히 자리잡고 앉아 그 역사를 오래 유존시켜 온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흥미로운 일이다. 아들 딸 구분이 없는 사회, 우리가 오늘 만들어가고 있는 삶의 모습도 그것이기에 태2리의 마을 구성은 한결 의미심장한 것으로 우리의 시야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청주 정씨의 역사 … 안동입향 이전
"우리 정씨는 청주의 명망높은 성씨이다. 그 시초는 어느 시대로부터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우리 중랑장 선조에 이르러서이니, 고려 중엽에 벼슬하여 제 1대조가 되었다."
《대동보》에 수록된 정곤수의 <가승서>에 보이는 일절이다.
청주정씨의 시조는 정극경이다.
"고려의 중랑장이다."
《대동보》에는 이와 같은 한줄만이 간단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 점은 2대인 정효문역시 마찬가지이다.
"별장이며, 증직 중랑장이다."
《대동보》의 정효문 관계 기록이다.
"우리는 상계가 아주 희미해요."
태2리에서 만난 종손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시조와 2세는 역사조차 없고, 3세에 와서야 겨우 역사가 기재되기 시작하지요."
정윤성씨가 족보를 펼쳐보이며 말하였다.
청주정씨 3세는 정의이다.
"처음 이름은 준유이다. 조의대부 행 신호위대장군 겸 위위경 서경 선유사이며 증직 정의대부 감문위 상장군이다. 성품은 지조와 절개가 높고 용감하고 의로워서 옛날 열사의 풍모가 있었다. 고종 4년에 서경의 반적 최광수를 물리친 공으로 거듭 표창되어 2등공신으로 뽑혔다. 10년 선유사로 봉명을 마쳤을 때 빛나는 지략과 웅대한 포부는 꺾일줄을 몰랐으나 결국 해침을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절조를 높이 사서 증직을 덧붙이는 것으로 표창하였다. 그 사적은 고려사 충의전에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 평안감사 서성의 장계로 특히 성천에 사당을 세우게 하여 편액을 하사하여 충절을 표창하였으니, 바로 표절사가 그것이다."
《대동보》의 3세 정의에 대한 기록이다.
정의의 아들은 정현이다.
"이목은(이색)이 찬한 <가전>에 어사는 조상들의 덕을 까먹지 않고 후대에게 경사가 있게 하였다고 적혀있다."
《대동보》의 기록이다. 정현은 감찰어사를 역임하였다.
정현의 아들은 현소, 참연, 해 등 셋이다. 현소는 일찍 죽어서 후사가 없었으며, 참연은 출가하였다. 해는 초명이 현계이며, 자가 회지이다. 원종 12년에 19세의 나이로 등과하였으며, 벼슬이 재상에까지 이르렀고, 시호는 장경공이다.
정해는 2남 3녀를 두었다. 《대동보》는 6대로부터 여계까지를 적어내리고 있으니, 아마도 이때, 그러니까 정해의 대로부터 가문의 역사를 세세하게 기록하여 전승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해는 또한 청주정씨 상계에서 생졸년과 묘의 위치가 족보에 기재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묘는 임진의 백악산에 있다. 정해의 아들은 책과 이이다.
6대 정책은 초명이 서이고, 통헌대부 판선공사로, 중대광 청하군으로 봉하여졌다. 충렬왕때 음사로 충주목사로 출사하여서 봉군되기까지 이르렀다. 묘는 개성에 있다. 정책은 특히 안동에 자리잡은 청주정씨 계열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책의 배위는 영가김씨(구 안동김씨) 문영공 순의 따님으로 충렬공 김방경의 손녀인데, 이러한 혈연적 관계가 단서가 되어서 안동으로의 입향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8대때 선외가를 찾아 내려오게 되었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정책의 손자 정침에 의하여 안동으로의 입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책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인 오는 자가 사겸이고 호가 설헌이다. 그는 고려 조의 충진의보리공신으로 서원군으로 봉하여졌고, 서원백이 덧붙여졌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니, 이 때에 이르러서 족보상 처음으로 청주와의 관계가 나타나는 셈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하여 청주정씨라는 관향이 생겨나게 된 것인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의 묘는 개성에 있다.
정책의 둘째아들은 보인데, 자가 중부이고, 호가 설곡이다. 한강 정구는 그의 8대 후손이다.

청주정씨의 역사 … 안동입향 이후
만약 7대인 정오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청주와의 관계가 마련되는 것이라면, 바로 그 후대에서 안동 입향이 이루어지므로, 청주정씨의 역사속에서 청주와 안동은 거의 같은 시기에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청주정씨 안동 입향조인 정침은 호가 퇴은 이고, 충혜왕 4년에 과거급제를 통해 출사한다.
"(충혜왕) 6년에 문하주서로 들어가서 공민왕 시대에 봉선대부 소부정윤에 이르렀다. 고려에 혁명이 일어나자 이조에 출사하지 않고 선대인 문극공(정오)의 외가 김문영공의 연고지를 따라 안동에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대동보》의 기록이다.
"문극공의 후 부인인 홍씨는 장간공 융의 따님으로 충혜왕 공민왕 두 왕의 장모였다. 후비의 친족으로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공민왕 때 출사하여 … 이 때에 신돈이 정권을 좌지우지함에 매양 물러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대로 충성을 다했던 가문으로서 결행을 하지 못하고 단단히 봉하여 상소하는 것으로 그쳤다. 나라가 혁명됨에 이르러 동료 중에 조선을 섬기는 사람에게 그대들은 밝은 임금을 받들어 태평한 세상을 만드시오. 나는 물러나 들판에 엎드려 살다가 죽어서는 지하에서 나의 임금을 뵐 것이오 하였다. 결심을 좇아 노정에 오를 때 다시 좌중과 손을 맞잡아 이별을 고하니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요. 이제 포은은 충성으로 죽고, 목은은 목 땅에 숨고, 도은은 도 땅에 숨고, 운곡은 운 땅으로 들어갔는데, 이제 그대가 은거하려 하니 작록과 생사는 비록 같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여러 군자들과 하나라 할 것이요 하였다."
《대동보》가 길야은 전을 인용하여 적고 있는 기록이다.
정침의 묘는 안동 남쪽에 있다고 하나 실전이고, 배위인 안동김씨의 묘는 청주에 있다.
"안동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9대 때 안동 모산에 살지 않았는가 생각해요."
태2리의 청주정씨의 가계는 정침의 둘째 아들 의룡, 의룡의 장자 약, 약의 장자 보문, 보문의 장자 인로, 인로의 장자 윤소, 윤소의 장자 언보 등으로 이어진다.
정언보는 청주정씨 14대로, 자가 충경이고, 진사이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안자로 불리워졌던 사람으로, 배위인 진성이씨와의 사이에서 괄, 삼, 허, 두라는 네 아들을 두었다. 이 중 넷째인 정두가 태2리에 청주정씨의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죽헌공(정두)이 연산조 말엽, 중종년간에 모산, 지금은 지내2리이지요. 그곳에서 여기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여기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와룡면 태2리, 속칭 마암, 말바우라고 하지요."
우리는 죽헌 고택의 사랑채 바깥방에 앉아 있었다. 집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밖에 볕이 좋았으므로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저기 저것이 말바우이지요."
정윤성씨는 들 저쪽의 산굽이를 가리켰다.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산끝, 길가에 나와 앉아 있다.
"저 바위가 원래는 이 집터에 있었다고 하지요. 죽헌 할배가 처음 오니 집터는 수백년 기지가 될만한데 큰 바위가 있고, 옮길 방도도 없어서 걱정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꿈에 웬 노인이 나타나서 현몽을 했답니다. 내일 이 앞으로 초립동이 한사람이 말을 타고 지날 터이니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면 치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 꿈속에서 노인이 그랬대요. 과연 아침에 초립동이 말을 타고 오고, 잘 대접하고 사정을 하니, 해주지 해서, 그래 말죽을 끓여 먹이니 말에다 바위를 실었대요. 실고 가다가 바위가 흘러내려서 말이 죽고, 그래 바위가 저기 떨어져 있게 된 것이라고 하지요."
그 말을 하며 정윤성씨는 멋적게 웃었다.
"뭐 믿을 수 없는 전설입니다. 말에 바위를 어떻게 들어서 실었겠습니까?"
그러나 말바위 전설은 처음 죽헌 정두가 이곳에 기지를 열기가 쉽지 않았음을 전해주는 일화로서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죽헌공은 세계상 15대이고, 저로부터도 15대 조상이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안동에서 알아주는 분은 지헌공이지요."
지헌은 정두의 장자이다. 정두는 배위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사성, 사공, 사신, 사의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장자인 정사성은 자가 자명이고, 호가 지헌이다.
"봉훈랑, 양구현감이다. 가정 을사년(1545년)생이다. 17살에 퇴계선생에게 취학하였는데 선생이 아주 칭송하여 이름과 자를 명명하여 주었다. 무진년(1568년) 진사. 병자년(1576년)에 과거에 응하여 서울에 올라갔으나 부친의 부음을 듣고 급히 달려 내려왔다. 그 후 과거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신묘년(1591년)에 유일로 천거되어서 태릉참봉이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집경전 참봉으로 태조의 생일 초상을 지고 피난하였다. 마침내 온전한 관직을 얻어 현감에 이르렀다. 만력 정미년(1607년)에 죽었다."
《대동보》의 기록이다.
정사성은 6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7세에는 유일재 김언기를 스승으로 모셨고, 10세에는 백담 구봉령에게 배웠다. 그러니까 17세에 퇴계 이황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것은 세 번째 스승을 모시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선생(이황)이 공경함은 도리로 들어가는 문인데 반드시 성실함이 있은 연후에 쉼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며 이름을 사성이라 하고 자를 자명으로 지어 내려주었다."
《지헌선생문집》에 보이는 일절이다.
"우윤공(정두)이 공(정사성)을 위하여 작은 집을 도산에 지어 머물며 공부하게 하였다. 선생(이황)이 그 집을 동몽재라고 명명하여 주고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너를 위하여 공부방을 지어 주었으니, 배움을 구하는 뜻이 은근하다고 할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힘써 노력해서 부친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동몽재는 지금의 역락재이니, 선생이 일찌기 손수 역락서재라는 네 글자를 썼다."
정사성은 영양남씨와의 사이에서 기, 전, 면, 신 네 아들과 한명의 딸을 두었다.

종손 정윤성씨
나직한 산들은 띠를 이루며 청주정씨 말바우 종가의 앞뒤를 휘감고 돌아간다. 나직한 산들 사이에 좁직한 분지가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실개울이 흘러나간다. 분지의 들에는 벼들이 허리를 굽히고 쏟아지는 양광 아래에서 눈부신 노란 색으로 빛나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용한 분위기가 종가의 하늘을 가만히 지배하고 있다.
"이 집이 안동에 있는 청주정씨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대종가에는 종손이 없고, 지하의 후손들도 흩어져 살지요. 맏집은 안동에 내려온 집인데, 부석가면 맏띠라는 곳이 있지요, 그곳에 있어요. 그렇지만 유명무실하고, 사실 죽헌공 위로는 문상초헌을 합니다. 그 아래로는 내가 종손으로서 초헌을 하고… 윗대는 종손이 없으니…"
아마도 죽헌공 윗대에서 종가다운 종가를 유지하고 있는 집이 없다는 말인 듯 하였다.
"이 집도 한 60년 비어 있었대요. 그러는 동안에 서책같은 것도 이리저리 흩어지고…"
그것이 언제쯤의 일인지 정윤성씨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방은 안과 밖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안쪽 방은 안채로 연결되어 있고, 바깥쪽 방은 뜨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바깥쪽 방에는 두 쪽의 자리가 깔려 있었다. 안쪽 방과의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의 한쪽 위로는 시렁이 매어져 있었고, 시렁 위에는 옛날 책들이 가득하였다. 사라져가고 남은 책들과 그 후에 새로 만든 족보, 문집 따위들인 모양이었다. 사랑 바깥방과 사랑 안방 사이의 열린 문을 통해서 사랑 안방의 건너편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져 있는 접힌 병풍의 한폭이 보였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표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병풍이었다. 그만큼 자주 사용하고, 또 그만큼 오래 사용했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따님인듯한 소녀가 정갈하게 차린 다과상을 내왔다. 상 위에는 과일접시 하나와 한과를 담은 접시 하나, 동충하초라는 이름의 작은 음료수병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우리는 동충하초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정윤성씨는 우리에게 약술을 권하였으나, 우리가 마다하자 강권하지는 않았다. 흰색이 섞여있는 숱이 짙은 눈썹에 선이 굵은 얼굴, 낡은 흰색의 와이샤쓰에 잿빛이 섞인 양복바지, 분홍빛과 푸른빛, 그리고 흰빛이 뒤섞인 양말을 신고 반백의 머리칼을 곱게 빗어서 넘기고 있는 정윤성씨는 몸체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얼굴은 호랑이상이 분명하였다.
"나는 청주정씨 30대입니다."
정윤성씨는 죽헌공 정두의 종가를 지키고 있는 15대 종손이다. 그의 가계는 정두, 정사성, 정기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
지헌 정사성의 장자인 정기는 자가 도포이다. 그는 종사랑이고 언양훈도를 지냈다.
"가정 병인년(1566년)에 출생하였는데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폐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숭정 병자년(1636년) 8월 15일날 타계하였다."
《대동보》의 기록이다. 그는 배위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기성, 기경, 기업 3형제와 4녀를 두었다.
정기선은 정기의 장자이다. 그의 자는 이원인데, 장사랑이다.
"만력 경인년(1590년)에 출생하였는데, 품성이 근후하고 풍체가 위의를 갖추었다. 여러번 과거에 나갔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현종 경자년(1660년)에 타계하였다."
《대동보》의 정기선에 대한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연대표시 방법이다. 명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 연호를 써서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을 버리고 조선의 군왕을 통하여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바꾸고 있는 것인데, 이 점은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기선의 장자는 훈이고, 정훈의 장자는 시주이며, 정시주의 장자는 의모이다.
정의모의 자는 사범이고, 호는 석강이다. 1670년에 낳아서, 1730년에 타계하였다.
"품성이 간결한 것을 좋아하였고, 갈암 이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문학과 지행이 당세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동보》의 기록이다.
정의모의 장자는 래원이고, 정래원의 양자는 지종이다. 정지종은 종가의 일에 충실하였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가의 가계는 정지종으로부터 천규, 시흠, 승문, 주원, 창의를 거쳐 지금의 종손인 정윤성씨에게로 전하여진다. 정윤성씨도 양자로 들어와 종가의 가계를 이었는데, 족보를 통해서는 친부가 누구인지를 알기 어려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군대 갔다온 것 외에는 여기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그는 그만큼 종가를 지키고 종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데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인은 전주유씨인데, 예안 주진(삼산) 사람이다.
"대사간 유정원 선생 후예이지요. 집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그 동네도 가본 적이 없었어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하나도 내 눈으로 확인해 본 것 없이 집안 사이의 결정으로 혼인을 하였지요. 그 때 내 나이가 23살이었어요."
"자는 덕화. 1941년, 신사년 9월 11일생."
《대동보》의 정윤성씨 관계 기록이다.
《대동보》에는 그와 부인 전주유씨와의 사이에 상인, 기인, 인웅 세 아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큰 아들은 경산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들도 군대 갔다와서 직장을 구했어요. 막내아들은 군대에 가 있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우리는 딸 넷 아들 셋을 두었어요. 딸 둘은 시집보내고, 다들 나가있어서, 집에는 거의 둘이 있다시피 하지요. 이 마을이 다 그래요. 여기 우리 성씨가 세 집 살지만, 자식들은 다 나가있고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지요. 노인들 돌아가시면 외지 나가있는 자식들이 들어와 살겠어요?"
말바우에 있는 세 집의 청주정씨 집조차도 조만간 줄어들 모양이었다.
"집성촌요?"
청주정씨 마을이 어디 있는가 알고싶어하는 우리를 향해 정윤성씨는 오히려 반문하듯이 입을 열었다.
"안동에 우리 집성촌은 없어요. 단 열집이 사는 데도 드물어요. 예전에는 좀 많이 살았던 데가 도나리, 광평같은 곳인데… 지금은 거기도 예전같지 않지요. 거기도 많이 떠나서 몇집 남지 않았어요."
우리는 안동에 청주정씨가 대략 몇집이나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정윤성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안동은 영남에 내려온 청주정씨의 뿌리가 되는 곳이지요. 그래서 인근 지역에서 다 안동화수회에 나와요. 안동만 얼마인지 나누어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정윤성씨는 추정치조차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5대 봉사를 한다는 정윤성씨, 그의 1년은 조상을 섬기고, 지역사회에서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농사짓는 것으로 빈틈없이 짜여져 있었다.
"향교, 서원이나 타문에 일이 있으면 나가지요. 음력 2월이나 3월, 8월이나 9월에는 묘사관계로 집에 없는 날이 많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사당에는 불천위로 죽헌공을 모시고 있고 … 종가의 가산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요. 저기 앞으로 보이는 산들과 집뒤의 산은 다 우리 것이고, 요 앞 들도 우리 전답이예요. 논밭이 각 2천평 정도씩 되지요."
그것은 혼자 손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넓이였으나, 15대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풍족한 규모라고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맏이가 들어와야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들어오라 하지 않아도 들어와야 하지 않겠어요? 퇴직하면 지가 어디 따로 갈 데가 있습니까?"
그 점에 있어서 정윤성씨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중에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청주정씨와 의성김씨 사이의 관계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김복영씨의 14대 조모가 청주정씨 약포 정탁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과연 대동보에는 정탁의 둘째 아들 정윤위의 사위 중 하나로 의성인 김임이 등재되어 있었다.
김복영씨와 정윤성씨는 14대 이전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한결 친숙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14대 15대 전의 인연을 기억하고, 또 그 인연을 소중히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한 가문의 종손인 정윤성씨와 다른 한 가문의 종손인 김복영씨는 그런 점에서 동질적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두 사람의 인연 되살리기 작업을 감탄하는 눈빛을 하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그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도 적당히 마무리가 되고, 나는 틈을 노려서 족보를 빌려주기를 청하였다.
"족보를요?"
정윤성씨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지로 만들어져 있는 옛 족보가 아니라 요즘에 활자로 새로 찍은 《대동보》를 가르켰다.
"그러지요."
잠시의 망설임을 마음속으로 정리하였는지 정윤성씨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하였다.
"원래 책을 남에게 내주는 것은 아닌데… 요 위 집에서도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동국통감》을 당시 안동교대 교수라는 사람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나중에 알아보니 빌려간 사람은 안동교대 교수도 아니고, 어디 사는 누군지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아는 분도 오셨고 하니, 빌려 드려야지요."
우리는 반드시 책을 돌려드리겠다는 다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탱자나무 두그루
우리가 앉아있는 사랑채 바깥방의 좁은 난간 건너 뜨락의 서쪽편으로는 커다란 탱자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탱자나무가 아니었다. 거목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몸체를 자랑하는 탱자나무였다.
"오래된 것이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지금 살았으면 1백살이 넘었을 노인이 내게 들려줬던 말에 의하면, 그 어른 어렸을 때에도 저 탱자나무는 매양 저만한 크기였대요. 그 어른 어렸을 때 저 탱자나무 아래서 숨바꾸를 하곤 하였다는 것이지요."
탱자는 노랗게 익어서 푸른 가시 사이로 여기저기 황금빛 몸체를 과시하고 있었다.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좋은 가을 한낮이었으므로, 탱자의 노란 피부는 더욱 선연한 빛을 토해냈다.
"탱자술은 좀 신맛이 나지요. 뒷맛은 향기롭지만… 우리는 매년 탱자술을 담는데, 작년에는 못 담았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방을 나와서 집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탱자나무도 빼놓지를 않았다. 방에서는 마치 한 그루같이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탱자나무는 두 그루 였다. 그것은 한 뼘쯤의 거리를 띄우고 벌려서 있었다. 같은 뿌리에서 두 개의 싹이 올라온 것인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그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쪽으로 한뼘 앞서있는 것은 서쪽으로 한뼘 물러나 있는 것보다 두배는 더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줄기는 무수한 혈맥으로 묶여있는 것같은 형상의 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둥치는 사람 키보다 약간 낮은 위치에까지 느린 곡선을 그리며 밋밋하게 솟구쳐 올라서 무수한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으며, 가지에서는 또 무수한 가시들이 뻗어나왔다. 이리저리로 얽힌 가지와 가시의 푸른색 덩어리는 성긴 듯 하였지만 어디 한군데 빈틈이 없었다.
"새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날라가지를 못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우리가 탱자열매 몇 개를 원하자 정윤성씨는 작대기로 쳐서 충분한 양의 탱자열매를 따주었다. 그리고 종이봉지를 가지고 나와 탱자열매를 그 속에 담아주는 수고를 성가셔하지 않았다.
여러백년이 된 탱자나무! 나무를 가꾸는 마음은 미덥고 아름답다. 수백년 연륜을 가진 나무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나무의 수종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그 나무를 가꾼 사람들의 역사와 마음씨를 넉넉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백년 역사를 가진 종가와 종가의 한켠을 지키고 있는 고목은 미상불 아주 잘 어울리는 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죽헌고택
우리가 앉아있던 사랑채의 남쪽으로 면한 처마 밑에는 죽헌고택이라는 넉자가 한자로 씌어진 현판이 붙어 있었다.
"종가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집의 역사를 나는 잘 알지 못해요. 중수를 몇 번하고, 새로 짓고 하였다고 하는데…"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볼 때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집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깥채, 즉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사당지역의 세부분은 어느 종가에서나 만나게 되는 일반적 구조인데, 그 점은 청주정씨 말바우 종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채와 안채는 ㅁ자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고, 사당은 그 뒤편으로 높다랗게 산기슭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종가에서 사당지역으로 올라가는 화강암 계단이 위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는 사당이 저렇게 높이 있지 않았다고 해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원래는 종가가 좀더 높이 자리잡고 있어서 사당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저 아래 길에서 종가로 올라오는 것이 힘들어서 땅을 깎아내고 종가를 내려앉혀 다시 지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종가가 길과 거의 수평을 이루는 높이를 갖게 되었고, 대신에 사당과는 상당히 높이의 차이가 있게 된 것이지요. 종가를 내려앉히고 난 다음부터 우리 집안이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해요."
그 말을 하면서 정윤성씨는 웃었다. 나도 그 말을 들으면서 정윤성씨를 따라 웃었다. 정윤성씨의 웃음과 나의 웃음이 같은 음색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종가의 서쪽 벽면에는 나무 풍구 하나, 녹슨 자전거가 하나 놓여져 있었고, 그 서쪽의 빈터에는 여물간과 여물써는 기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집의 뒤쪽으로 돌아가보니 동북쪽 모퉁이에 거름탕이 있고, 거름탕의 말뚝에 매어져있는 소 한 마리가 보였다. 그 소가 여물간의 여물을 먹는 주인공인 듯 싶었다.
"여기에는 원래 대청이 있었다고 해요."
정윤성씨가 집의 서쪽에 있는 빈 터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보세요, 여기 초석들이 있잖아요?"
빈터에는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그 사이로 몇 개인가의 돌이 엿보였다.
"관리가 안되고 해서 대청을 뜯어버렸답니다."
그것은 종가의 살림살이의 규모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일 것이었다. 종가가 그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대청을 뜯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종가는 상당히 높은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축대는 크게 떼어낸 화강암 바위를 시멘트를 이용해 붙여놓은 것이었다. 축대 위로는 또 상당한 높이의 뜨락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사랑채가 올라앉아 있었다.
"전에는 뜨락이 흙과 돌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몇 년에 한번씩은 꼭 손을 보아야 했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그런 일이 귀찮아서 이렇게 시멘트로 싸발라 놓았는데, 그게 집의 모양을 망쳐놓았어요."
그것은 굳이 정윤성씨의 말이 아니라도 좀 떨어져서 종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시멘트는 종가의 건물이 갖는 통일적 미학에 결정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종가는 각진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벽은 백회칠을 하였다. 그리고 지붕은 돌이끼가 잔뜩 낀 오래된 기와로 덮여 있었다. 종가의 건물은 세월의 빛으로 착색된 품격을 드러내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좀 거칠고 안정되지 못한 분위기가 종가의 건물을 휩싸고 있었다.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하나 있어서, 여러마리의 제비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고, 추녀 끝 여기저기에는 무수한 말벌들이 부산하게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어디 말벌들이 집을 지은 모양이예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우리는 정윤성씨와 함께 축대 위, 뜨락 밑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축대 밑으로 내려갔다. 축대 밑 아래쪽 마당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헛간에는 마른 홍화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올해는 홍화 값이 좋지 않아서 두드리지도 못하고 쌓아놓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깥마당에서 바라보는 종가는 높다란 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사랑방 방문의 동쪽 위편으로 손바닥만한 창이 눈에 들어왔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의 이름과 용도가 궁금하였다.
"광창이지요."
정윤성씨가 말하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기창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종가 주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나서 종가를 떠났다. 정윤성씨는 우리를 따라오며 종가 텃밭에 심겨져 있는 작두콩 이야기를 하였다. 좋다고 해서 가져다 심기는 하였지만 콩이 익을런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작두콩은 물 설고 땅 설은 외국으로 와서 여기 청주정씨 말바우 종가의 텃밭에서 스스로의 낱알을 충실하게 만들어내기 위하여 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종가는 작두콩과는 달리 우리의 환경을 지배하여 온 문화, 바로 우리의 문화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정윤성씨의 작두콩의 처지가 바로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종가의 처지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윤성씨와 작별을 하고 말바우마을을 떠나올 때 나의 시야 속에는 오래도록 커다란 작두콩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청주정씨 말바우 종가에는 위기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생활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