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변천은 천길 낭떠러지를 박차고 흐른다(글/이동백)반변천은 아름다운 강이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언저리에 세워둔 천인단애(千 斷崖)가 또한 아름답다. 영양 들머리의 남이포는 그 가운데 압권이라 할 만하다.
영양군 입암면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경치가 아름다워 저절로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기암절벽 사이로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의 강을 이루고, 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난 바위 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두 물줄기가 만나는 이 곳을 남이포라 부르고, 높게 솟은 바위를 선바위라 한다.
이 아름다운 반변천의 경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강둑에서 반변천을 향하여 서서 강 건너 편을 바라보면, 곧바로 남이포와 선바위가 지척에 와 닿는다, 우선 탐심(貪心)을 버리고, 그리고 좌에서 우로 패닝(Panning).
물길을 잡아주며 내닫는 산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다. 절벽의 가을은 울긋불긋하다. 얼룩덜룩한 바위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먹물 번지듯 그럴싸하게 드리워져 있다 붉고 노란 단풍은 사람의 속을 흔들어주는, 무언지 모를 주술이 있어 마음의 깊은 곳부터 매스꺼워지게 만들었다. 폼잡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 시 한 편을 써버려 하는 따위의 마음 말이다.
선바위
이 절벽은 남이포로 접근하면서 그 고도를 높여가더니만, 선바위 하나를 그 끝에 세워두고는 느닷없이 푹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느닷없이 주저앉아 버린 절벽 끄트머리에 느낌표처럼 찍힌 것이 선바위인 것이다. 입암(立巖), 조물주가 남이포의 중심에 이 바위를 세울 때는 어떤 의도를 지녔을는지도 모른다. 물줄기는 이 선바위 앞에서 둘로 찢어진다. 원줄기는 반변천이고, 여기서 찢겨나간 것이 동천이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이 동천을 건너면 다시 절벽이 이어진다. 이 절벽 끝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한 듯한 정자(亭子)가 서 있다. 이 정자는 동천을 중심축으로 해서 선바위의 대응점에 위치한다. 선바위를 지향적 의지의 상징으로 풀어 본다면, 이 정자는 받아들이는 상징 체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바위는 남성(男性)이고, 정자는 여성(女性) 아닌가. 조물주가 선바위를 주조한 의미가 이런 데 있었을까. 사람이 정자를 세운 까닭도 그러했을까. 내 생각이 의도 확대일까, 아니면 이러는 내가 외설스러운가. 모를 일이다.
정자가 선 쪽의 절벽은 한 200여 미터 이어졌다. 그 절벽 위에는 누런 단풍이 든 참나무와 갈매빛 소나무가 파란 하늘을 받쳐들고 빼곡이 서 있다. 여기쯤에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면 시선은 철(鐵)로 지어진 다리에 닿았다가 곧장 반변천의 물살 위에 얹힌다. 아직 지난 여름 수마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소리 죽이고 철벽 밑을 빠져나가는 반변천에는 산이 내려와 잠겼다. 물에 잠긴 산은, 그 색깔이 좀 풀리긴 했어도 은은한 빛을 띠고 있어 오히려 실경(實景)보다 멋지다. 시선이 물길을 따라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걸리는 곳이 선바위쯤이고, 거기선 서석지로 빠지는 포장길을 만나게 된다.
선바위 관광지구
동천을 끌고 골짜기 안으로 사라지는 길을 바라보던 시선은 다시 하류로 떠내려간다. 그 시선을 잡아채어 수습하고 뒤로 돌아섰다. 잡아챈 시선 앞에 큰 건물 벽이 막아 버린다. 짓고 있는 호텔의 벽이었다.
이 호텔은 선바위 관광 지구 사업의 하나로 짓고 있는 것이다. 영양군에서는 이곳에다 호텔을 비롯하여 음식점, 농산물 직판장, 휴게 공간, 분재 전시관 등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개발하고 있다. 오래 전에 짓다가 만 호텔이 공사를 다시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분재 전시관이 개관되어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주차 공간도 충분하고 음식점도 들어서 있으며, 산책로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휴게소로서도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분재 전시장이었다. 영양 분재 수석 야생화 전시관이란 이름을 단 이 전시관은 영양군이 지어 금년 6월에 개관한 것으로 김원종 씨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유리로 지어진 전시관 안에는 분재 화분과 수석들이 꽉 들어차 있고, 그 중앙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영양 지방에 서식하는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도록 하였다. 바닥에는 영양지방 야생화를 심어 놓았다.
분재에 욕심이 자꾸 간다. 분재의 소재는 소사, 모과, 노간주, 소나무, 향나무들이었는데, 연조가 매우 깊어 보였다. 특히 아기 머리통 만한 노란 모과를 매단 모과나무 분재가 길손의 탐심(貪心)을 자꾸 쿡쿡 찔러댄다.
관리자 김상철씨의 말에 의하면, 관에서 지은 건물에 개인의 소장품을 전시함으로써 민관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 이 전시관이란다.
오일도 시비
남이포에 스민 남이 장군의 전설을 생각하며 입암교를 건너 감천 마을로 향했다. 감천에 이르는 동안 반변천은 계속 절벽을 따라 흘렀다. 감천은 시인 오일도의 고향이다. 마을 안에는 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가 남아 있었다. 이 마을은 오일도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지만, 측백나무 서식지로 유명하다. 마을 건넛산 절벽에 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이것이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벽에는 측백나무 외에도 모감주나무 털대강나무 등 희귀목들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의 보고라는 것이다. 절벽 아래에 침벽 공원이 있어 아름다운 운치를 더해 주기도 한다.
폐교가 된 감천초등학교를 지나 한 굽이를 돌아 낮은 언덕빼기를 낚아채고 올라서니 저만치 길가에 비(碑) 하나가 서 있다. 오일도 시비이다. 까만 시판(詩板)이 박힌 비신에 一島詩碑라고 새겨진 돌 지붕을 올린 모양이었다.
이 우주에
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비에 새겨진 저녁놀의 일절이다. 장미 대신에 저녁놀을 타고 이상향으로 상징되는 붉은 꿈나라로 떠나고자 하는 시적 자아의 의지가 선명한 이미지에 의하여 드러나고 있다. 시비의 뒷면에는 조국이 왜제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때 감연히 붓을 들어 시를 읊고, 전 재산을 털어 문학 운동을 하면서 이에 저항한 시인이 있으니, 곧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이다.라고 시작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을 가지고 본다면, 붉은 꿈나라는 광복된 조국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일도 오희병은 서정 시인이면서도 거기에만 안주한 시인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식민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어찌 서정만을 한가롭게 읊을 수 있었겠는가. 오일도는 시를 쓰면서 시 운동에 열심이어서 『시원』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저녁놀처럼 붉게 물든 단풍나무들 속에 둘러싸인 오일도 시비를 아쉽게 작별하고 반변천을 따라 영양으로 향했다.
태풍 루사가 지나간 영양 현리
영양 초입인 현리에 이르렀다. 강건너 서 있던 효자비각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알고 보니, 태풍 루사가 지나가던 날 이 비각이 물길에 휩쓸려 가고 말았단다. 오면서 루사가 남긴 상흔이 깊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도 강둑에 선 집까지 날려버릴 줄은 미쳐 몰랐다.
영양 읍내를 못 미치는 지점에서 가던 길을 버리고 현리 가는 농로로 들어섰다. 들판에는 아직 거두지 아니한 벼가 누렇게 여기저기 서 있었다. 현리 마을은 그 길 깊숙한 곳, 반변천 가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마을에서 반변천으로 나가는 길 위로 이설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설 도로가 하도 높아 마을에서 반변천으로 나가는 길 쪽으로는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마을 위로 지나갔다. 나지막한 석탑 하나가 이 다리 밑에서 조금 비껴난 논바닥에 서 있었다. 이 마을을 굳이 찾은 까닭은 반변천을 만나기 위함도 있었지마는 실로 이 석탑 때문이었다.
석탑이 선 논으로 들어서다 말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바닥이 온통 자갈과 모래로 덮여 있었고, 멍석짝 만한 아스팔트 조각이 벼를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지고 자갈에 덮인 벼에서는 파란 싹이 돋아났다. 루사의 횡포는 정말 끔찍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논으로 들어 밀었을 때,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다. 풀썩 모래 먼지가 일었다. 파랗게 돋아난 벼의 새싹을 밟으며, 석탑 앞에 가서 섰다. 다행히 석탑은 물벼락을 고스란히 맞고서도 상처를 입진 않았다.
당간지주 하나를 앞에 세우고 선 이 탑은 언뜻 보기엔 매우 낡고 허름했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볼라치면, 자그마한 몸체가 단아한 기품을 느끼게 해 주었다. 또한 도드라지게 새긴 기단의 십이지신상과 탑신의 사천왕상에서 신라인의 탁월한 예술적 영감을 만날 수 있어 좋기도 하고.
보물 제610호로 지정된 이 삼층석탑은 전체적인 구성이나 양식,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 하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당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탑이다.
탑 주변에 심은 고추는 물에 잠긴 채 썩어버렸다. 썩은 고추 대궁에는 비닐 조각들이 걸려 지나가는 바람에 쓸쓸하게 흔들렸다. 반변천은 썩은 고추 대궁의 애달픈 사연을 알기나 하는지, 허물어진 강둑에 기대어 도통 말이 없었다.
영양읍 남단에서 물줄기를 동서로 잡았던 반변천은 영해로 빠지는 지방도를 만나면서 방향을 북쪽으로 튼다.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은 주변에 너른 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산을 끼고 강은 좁은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천변을 따라 일구어진 밭뙈기들은 산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하원리를 지나 다리를 한 번 건너 상원리로 들어섰다. 루사의 횡포로 하원에서 상원까지 이르는 천변의 모습은 참혹했다. 얼마나 심했으면 지형이 몰라보게 변해 버렸겠는가. 과수원 안에 지어졌던 가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과수원의 흔적도 가늠할 수 없었다. 연기가 이따금씩 강에서 피어오르고 있어서 살펴보니, 홍수 때 휩쓸려 내려온 쓰레기가 불에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을 피워놓고 그 곁에 앉아 새참을 나누어 먹는 중이었다.
곡강 팔경중의 하나 척금대
상원리를 지나면서 차는 완만한 경사지로 난 포장로를 따라 달렸다. 구릉지의 중간 지대를 빠져나가는 길은 산촌의 정취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비리등 마을까지 북쪽으로 곧장 거슬러 올라가던 강은 갑자기 물줄기를 바꾸어 남서쪽으로 급하게 접어들었다.
수월 마을을 거쳐 금촌 마을에 이르니 강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강가에 차를 세워 놓고 척금대를 찾았다. 척금대는 금촌 마을을 끼고 직선으로 흐르던 물이 부딪히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원리를 돌아서 닿은 까닭에 척금대의 위치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영양에서 봉화로 빠지는 국도를 타고 고개 하나를 넘어서서 닿는 곳이 곡강리이고, 그 왼쪽 산자락이 곧 척금대이다. 반변천의 물길이 오랜 세월 부딪히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 절벽에 척금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숙종 때의 사람 정석교가 여기서 시회(詩會)를 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척금대로 들어가는 입새에는 솔밭 유원지가 만들어져 있다. 여름이면 숱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 유원지도 태풍의 위력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수백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쓰러져 있고, 청우샘터란 간판을 단 샘터집은 통째로 떠내려 가다가 바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쓰러지다만 소나무들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그 아수라장을 뚫고 나가 척금대 앞에 섰다. 남이포의 절벽을 닮아 있었으나, 가까운 거리여서 그런지 규모는 좀 커 보였다. 수평으로 단층을 이룬 절벽에는 돌이끼가 허옇게 끼여 있고, 돌 틈 사이로는 가을이 형형색색으로 꽂혀 있었다. 척금대 밑을 흐르는 물은 상당히 깊었다. 그리고 척금대의 물 역시 남이포의 물보다 맑고 푸르렀다.
척금대는 여기봉, 약수천, 지석암, 병풍암, 반월산, 이수곡, 동만곡과 더불어 곡강 팔경을 이룬다. 보통 척금대를 절경으로서만 기억하지만, 역사적으로 기록해 둘 만한 것을 하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산을 뚫어 만든 수로를 두고 하는 말인데, 척금대 남사면(南斜面)의 수면 가까이에 사람 하나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크게 뚫린 이 수로는 일제 시대에 척금대 너머 영양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터널 수로인 것이다.
터널수로 노역에 참가했던 정행성씨
척금대를 돌아 나와 이 터널 수로의 출구를 보기 위해 삼지리로 들어갔다. 마을에서 이 굴을 뚫을 때 노역에 참여했다는 정행성(68세) 씨를 만났다. 삼지 마을에 못을 만들었으나, 물은 늘 부족하여 농민들은 농사짓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반변천의 물을 끌어오자는 공론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산을 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굴을 뚫느라 힘도 많이 들었지요. 간대라(카바이트) 불을 켜고 굴로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이 불이 자주 푹푹 꺼져. 그러먼 짚고 가던 작대기로 벽을 치며 굴 안으로 들어갔어요. 해방이 되고도 그 일을 계속했으이, 내가 처음부터 마무리할 때까지 참여한 심이지뭐."
"주로 무슨 일을 했나요?"
"무슨 특출한 재주가 없으이, 막노동이제. 노미도리짓이나 버력을 져 나르는 일을 했제."
그는 잡부로서 굴 뚫을 곳에 정(釘)을 거는 일을 하거나, 거기서 나오는 돌 부스러기들을 지게로 져서 나르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착암기도 같은 장비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뚫었어요? 그리고 그 길이는 도대체……?"
"그러이 사람 죽이는 일이었제. 그러하되 먹고사는 일이 달린 일이라 참고 했지 뭐. 이 굴 길이? 정확히 681미터야."
삼지 사람들은 이 물로 농사를 짓는다
그는 물이 빠져 나오는 곳을 가리키며 정확히 그 길이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들어갈 때 구멍은 대단했는데 나오는 구멍은 마을 하수구 비슷했다. 여기서 나온 물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한 줄기는 삼지, 하원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른 줄기는 선디들, 바대들, 멀리 현텃들까지 뻗어 나가요."
영양 읍내를 에워싸고 있는 들은 이 물로 농사를 다 짓는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삼지리의 세 개의 못(池)도 한 몫을 하긴 하지만. 첨엄(添言)을 좀 하고 가자. 삼지리는 못이 세 개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못이 대략 밑변이 긴 이등변삼각형의 꼭지점에 만들어 져 있다는 것이다. 그 크기도 비슷하고 말이다.
정 씨와 헤어져 차를 몰고 나오니, 척금대로 넘어갈 때 만났던 영해 가는 길이 나섰다. 척금대를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며 돌아다닌 셈이다. 내륙 깊숙한 분지에 올라앉은 영양 읍내를 가로질러 회정길에 올랐다. 베어내지 못한 나락논 위로 저녁 어스름이 슬며시 내려앉고 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가을 저녁 바람이 서느렇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