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의 고문서들(글/정진영)
오늘날 많은 시군에서 향교 건물을 이런 저런 문화재로 등록해 두고 있다. 또 근현대의 격변기에 소실되었던 향교도 예외 없이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향교는 독립된 군현의 필수 공공기관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인지 시군의 당국자나 일부의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건물’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향교에 대한 관심이 많음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관심이 그저 건물이나 번듯하게 지어놓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하다. 향교의 건물은 정형화되어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건물 양식이나 구조는 어느 향교나 마찬가지인데, 오늘에 와서 똑같은 건물을 자꾸 복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오직 ‘건물’에만 관심이 있다면, 복원된 향교가 우리의 삶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있는 향교를 잘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에게 향교란 무엇인가?
향교란 조선시대 지방의 공립 교육기관이었다. 교육기관이라면 당연히 건물이 아니라 교육이 그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 우리에게 끔찍한 사회문제가 된 현실에서 향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향교에서 오늘날의 교육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필자는 도리어 부정적인 의미만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뿐이다. 학교에 적을 둔다는 것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신분을 유지하거나 상승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그렇고, 본연의 교육기능을 거의 상실한 채 제사가, 그것도 이름도 다 기억 못할 중국의 명현(?)들을 수두룩이 모셔놓고 행해지는 의식만이 유일한 기능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어이 하리, 이미 번듯하게 복원된 이 마당에.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향교에는 이런저런 많은 자료를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름 하여 고문서라 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런 자료들은 궤짝 속에 깊이 갈무리되어 있어서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 연구자들의 접근도 쉽지 않다. 물론 자료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나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시대에도 그랬듯이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것이라는 소유관념과 특권의식도 한몫을 하는 듯싶다. 향교의 고문서는 우리의 문화유산의 하나고,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조직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고문서란 오늘날에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법적 효력을 상실한 자료들이다. 공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공개되고 전시됨으로써 향교란 덩그렇게 건물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려 우리의 현실과도 소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선시대 향교는 군현을 단위로 하여 설치된 공적 교육기관이었다. 그래서 사적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이나 서원과 흔히 비교된다. 서당이 오늘날의 초등학교 수준이라면, 향교는 중등학교에 해당한다. 향교가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학교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기능이나 체제와 운영, 그리고 교육의 대상이 되는 학생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물론 이것은 향교가 교육 기능이라는 본연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향교에의 입학 연령과 자격은 각 지역마다 달랐으나 보통 16세 이상으로 신분에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실재로는 양반들의 자제가 주로 입학하였고, 어떤 지역에서는 특정성씨의 자제만으로 입학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안동의 경우에는 향교의 입학 전에 각 면 훈장에게 먼저 수학하게 하였다. 초학의 과정을 마친 학생들 중에서 20세가 되면 성취한 학문의 정도를 살펴서 입학을 허락하였다고 영가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선초에나 통용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 버린 조선후기에 이 같은 규정은 그저 옛날 한때의 추억담에 불과하였다.
향교의 학생들
입학과는 달리 졸업에 대한 규정은 아예 없다. 양반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과거였고, 과거 응시자를 향교에 적을 둔 자로 제한하라는 조정의 조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생원·진사시에 합격할 때까지, 아니면 군역이 면제되는 60세까지는 학생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재로 향교 학생 명부라고 할 수 있는 교안류에는 40, 50대의 유생들로 가득하다.
학생이란 용어는 사실 당시에는 성균관의 유생을 일컫는 말이었고, 향교의 유생은 일반적으로 교생(敎生)이라고 통칭되었다. 그러나 교생이라는 용어는 극히 제한적으로 쓰였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따라서 개인의 지위와 역할은 곧 신분으로 자리매김 된다. 그런데 교생이란 기껏해야 평민보다는 나으나 사족에는 미치지 못하는 부류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생이라는 이름으로는 고을의 명문양반들 명부였던 향안(鄕案)에 등재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회(鄕會) 등의 여러 모임에서 양반들과 함께 나란히 자리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교생들이 주로 사족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생이라는 호칭이 영광스러운 양반의 신분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향교에 사족만이 아니라 평민의 자제들도 입학하였기 때문이다. 교생에게는 과거응시 자격뿐만 아니라 군역 면제라는 특전도 주어졌다. 따라서 향교에의 입학이란 평민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향교가 평민들의 군역 도피처가 된다는 지적은 이미 16세기 초반부터 나온 이야기였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만성적인 폐단이 되고 있었다. 현종 연간(1674)에 안동과 남원 등지의 교생수가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 것은 이 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일찍부터 정원제도를 두거나, 고강(考講)이라는 시험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향교의 법정 정원은 부(府)나 목(牧) 등 큰 고을인 경우에는 90명, 다음은 70명, 군과 현은 각기 50명, 30명이었다. 시험제도란 이 같은 법정 규모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시험을 치러 성적이 우수한 자들로 정원을 채우고 나머지는 모두 군역을 부과하고, 결원이 생기면 정원 외의 교생들 중에서 다시 시험하여 충당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정책은 관철되기 어려웠다. 우선은 양반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 같은 정원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시험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게 마련이다. 양반들이 고강에 강력 반발하였던 것은 시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반응도 있었지만, 떨어지게 되면 군역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튼 향교의 학생들인 교생은 양반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칭하는 교생이 중인 정도로 취급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중인이나 평민들에게 향교를 통째로 내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전기에는 비록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향교에 적을 두어야만 군역을 피할 수 있었고, 더욱이 양반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위라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양반들은 향교를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하면서도 서얼이나 평민들과는 차별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교에는 학생의 명부라고 할 수 있는 교안이 있었다. 양반들은 서얼이나 평민들과의 구별과 차별을 위해 유안(儒案)이니 청금록(淸錦錄)이니 하는 그들만의 명부를 별도로 작성하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교안에서 액내(額內)와 액외(額外), 혹은 동재안(東齋案)과 서재안(西齋案)으로 엄격히 구별하여 이름을 올렸다. 물론 형식과 명칭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양반의 유생들이 서얼이나 평민의 교생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로 분화되고 있었다.
안동의 향교
안동에는 향교가 둘이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안동부와 예안현이 하나로 합쳐져 안동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 당시에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지만, 예안향교는 선초에 창건된 후 수차에 걸쳐 고쳐지고, 다시 짓고, 옮겨지어 졌지만, 그래도 옛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예안향교는 건물만이 아니라 다양한 고문서 자료들을 온전히 보관해 오고 있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하였던 교생 명부라던가 전답과 노비안, 향안 등이 그것이다.
예안향교에서는 교생 명부를 <교안(校案)> 혹은 <유안(儒案)>이라고 하였다. 17세기 초반에서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50여 책이 넘는 분량이다. 이름으로만 본다면 <교안>은 교생의 명부이고, <유안>은 유생의 명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안동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안동과 예안의 양반유생들이 서얼이나 평민의 교생들과는 다른 명부를 만들지 않았던 것은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그 어느 곳보다도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안이든 유안이든 그 내부에서는 엄연한 구별과 차별이 있었다. 즉, 액내(額內)와 액외(額外), 혹은 별유(別儒)와 교생(校生) 등이 그것이다. 액내란 다름 아닌 예안현의 법정 정원을 말한다. 현의 정원은 애초에는 15명이었으나 뒤에 30명이 되었다. 물론 30명으로도 태부족이었다. 비록 작다고는 하나 퇴계를 배출한 고을에 어찌 30명이 가당키나 하였으랴. 그렇다고 국법을 어길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별유안을 두었다. 일정기간 액내교생을 수행한 후에 별유안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향교에 적을 두게 한다는 규정을 마련해 두었다. 이렇게 보면 액내는 상대적으로 젊은이들, 별유에는 늙은이들로 구성되었을 성 싶다. 그러나 규정과는 반대로 실재로는 젊은 나이에는 별유로 있다가 40, 50대가 되어서는 액내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 과거시험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과거응시는 액내유생으로 한정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젊은 나이에 액내에 들어 서둘러 낙방의 쓴 맛을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렇거나 액내는 줄곧 정원인 30명을 유지했으나, 별유에는 백 명 혹은 2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등재되어 있었다. 액내나 별유에 이름이 등재된 인물들은 예안의 전형적인 양반으로 보아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향안에서도 이들의 이름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안향교에는 향안도 함께 보관되어 있어서 이 같은 사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액외란 17세기 말까지는 대체로 정원 외의 교생이란 의미였다. 그러니 앞의 별유와 같은 성격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여기에는 서얼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남에서 적서가 본격적으로 분화하고 갈등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였고, 그 어느 지역보다도 심하였다. 이전에도 차별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런 속에서도 공존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적서의 분화와 갈등은 약자인 서얼이 조장한 일은 아니다. 이것은 영남 선비들의 정치적 패배와 대체로 일치한다. 정치적 패배가 거듭되면서 영남의 선비들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그냥 향촌사회에 군림하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제 향촌사회가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고, 오직 전부이기도 하였다. 자연히 이런 저런 일들로 갈등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적계에 의해 서계의 차별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적계의 양반이 액외에 서계와 함께 하지 않은 것이나, 그들보다 한 자 높게 이름을 쓴 것은 다름 아닌 차별의 가시화와 강화인 셈이다. 18세기 이후 액외는 서얼과 같은 중인(中人) 혹은 중서층(中庶層)으로 고정되어 갔다. 중인층이라 해서 신분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그들보다 못한 평민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지 않았다. 평민들의 교생은 액외에도 끼이지 못하고 교생으로 남았다. 이렇듯 차별은 또 다른 차별을 낳았다. 이것이 조선의 신분제 사회였다. 평민의 교생을 흔히들 원납교생이라고 한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기부 입학생 정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을 내고 향교의 교생이 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당연히 군역이나 잡역에서 제외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향교에서는 이들을 많이 모집하여 제기의 구입이나 건물 수리비용 등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에 원납교생들은 군역 면제만이 아니라 교생이라는 직역을 통해 신분상승의 계기로 삼았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오늘날 몇몇 대학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떠들어 대고 있는 기여 입학제의 역사성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교육이 없는 학교
향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일반적으로 교관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품계에 따라 교수 혹은 훈도라 하였다. 문과 급제자나 아니면 생원·진사시에라도 합격한 사람으로 선발하고자 하였으나, 교관에 대한 대우가 낮아지면서는 이들의 임명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 이후에는 아예 중앙에서 교관의 파견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향교의 운영은 당연히 수령의 책임 하에 있었다. 따라서 수령의 관심 여하에 따라, 그리고 서당과 서원의 발달과 더불어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어갔다.
향교의 교육 기능의 상실은 따라서 그 구성원의 성격 변화를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즉 피교육생인 학생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지역 양반들의 모임이나 사교회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어갔다. 자연히 그 운영도 지역 양반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이루어졌다.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는 직임을 교임(校任)이라고 하였다.
교임으로는 도유사, 장의, 유사 등이 있었다. 도유사는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장의는 향교의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유사는 각 분야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직임은 향교의 액내나 별유 중에서 선출하였으니 사족이 담당하였고, 회계를 담당하는 전곡유사(典穀有司)는 특별히 중서인 액외교생으로 선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향교에서 교육의 기능이 거의 소멸되었음에도 향교가 여전히 기능하고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제례라는 또 다른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교에서 행해지는 제례는 춘추의 석전례(釋奠禮)와 매월 초하루 보름의 삭망분향(朔望焚香)이 있었다. 이러한 제례는 철저히 사족들에 의해 주관되었으며, 이것은 사족이 곧 고을의 지배자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서얼은 향교를 운영하는 교임(校任)이 된다거나 향교에서 거행되는 제례를 주관하는 헌관(獻官)이나 집사(執事)의 직임을 맡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후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노론전제권력의 성립 등의 정치적인 변화는 서얼을 크게 고무시키고 있었다. 서얼은 전국적인 단위에서 결속하여 적계의 사족과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말하자면 조정에서의 통청(通淸)과 함께 향촌의 제 명안(名案)에서도 적계 사족과의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것이었다. 서얼의 요구는 영조 연간을 거쳐 정조의 즉위(1776)와 더불어 대부분이 관철되었다. 안동의 향안은 이미 1773년과 1774년에 서얼의 입록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향안은 작성되지 않았다. 더 이상 서얼의 입록을 허용할 수 없었던 사족들의 고육지책이었다.
전적으로 사족에 의해 운영되던 향안과는 달리 관학으로서의 향교의 운영에는 수령의 의지가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서얼은 대체로 노론을 표방하면서 수령권과의 결탁을 통해 향청이나 향교를 장악하고 있던 적계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적계만의 전유물이었던 교임이나 석전례의 헌관과 집사가 되고자 했다. 이로써 적서의 차별을 부정하고자 했다. 안동에서 이와 관련된 서얼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안동의 서얼이 이 같은 문제에 침묵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향안에의 참여뿐만 아니라 이미 1738년에 김상헌 서원의 건립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풍기의 서얼이 향안에 참여하고 교임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일이나, 소안동으로 불리던 영해에서 1840년대에 석전례를 주관하는 헌관과 집사 선임문제를 둘러싸고 적서간의 치열한 향전(鄕戰)이 야기되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서도 추측해 보기에 충분하다. 이 뿐 아니다. 무엇보다도 적계 사족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에서조차 비록 19세기 후반이기는 하지만 원임직을 둘러싼 적서간의 심각한 분쟁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이런저런 문제를 둘러싼 적서간의 분쟁이 19세기 영남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의 하나였다. 현실이 이러할 진대 영남의 선비들이 배우고 익힌 바의 이상이었을 경국제세(經國濟世)를 들먹이는 것은 너무 철없는 이야기일까?
이상은 향교가 가지고 있는 많은 고문서 자료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역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향교는 더 이상 특별한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더구나 세상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을 상실한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교육기관이라는 허명으로 연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차라리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속속들이 전시라도 해서 세상과 현실과 보다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거듭 나기를 도모해 보는 것은 어떨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