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열꽃′으로 피어난 해방둥이 정광영의 60년(글/이미홍)

내가 그를 만나러 가면서 알고 있었던 건 그가 안동문화원 사무국장 일을 맡고 있다는 것과 그가 오래 전부터 시를 써 온 문인이라는 것이었다. 전에 더러 모임이나 전시회 같은 데서 그 직함은 들어봤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기에 그가 해방둥이라는 사실도 실은 이번호 이웃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광영 사무국장이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안동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분이어서 그런지 쾌히 취재 승낙이 떨어졌다고 했다.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에 마음이 놓여 정말로 편한 날을 잡아 문화원으로 찾아갔다. 
한때는 시화전을 비롯한 이런저런 전시회를 기웃거리느라 열심히 드나들기도 했었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던 안동시립도서관은 쩡쩡하게 달아오른 도심의 모퉁이에서 조용히 열을 식히고 있었다. 조금은 빛바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단정하고 시원한 게 안동이라는 도시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곳, 그래서 안동문화원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 문화원 일층 사무실에서 정광영 사무국장을 만났다. 인사 외에 별다른 군더더기 말 한 마디 없이 우리를 조용한 옆 사무실로 안내하는 첫인상이 일견 무덤덤한 게  ‘꼭 안동 사람이구나’ 싶으면서도 소박한 겉모습에 비해 어딘가 정갈한 품새가 느껴졌다.
 그는 그 전부터 안동문협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안동에 있는 시조시인들의 모임인 『오늘』의 동인으로도 활동하면서 나래시조문학회장도 역임하는 등 그가 문학단체 일에 관여한 지는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30년간 다니던 직장인 한국통신을 그만둔 뒤 안동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안동의 문화와 관계된 일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문화원에 자리를 잡은 지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다섯 살되던 해
정광영은 1945년 음력 11월 7일 고향인 예천 풍양에서 동래 정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가 모두 5남매인데 위로 누나가 셋이고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딸만 셋이던 집안에 광영씨가 태어났을 때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 귀한 아들이라 태어난 지 일주일 뒤에 부친은 곧바로 출생신고를 했다. 그런데 호적에는 양력으로 기재가 되는 바람에 호적상 그는 46년 1월 7일이 출생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전쟁 뒤끝이라 시절이 어수선하던 때라 그때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대부분 한 치 건너 두 치 사이로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동성마을이라 출생신고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축하인사나 덕담을 주고받는 게 먼저였고 서류 정리야 형식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그는 동기들보다 서류상으로는 한 살이 적다.
6.25가 터졌을 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던 다섯 살이었다. 전쟁이 났다고 모두들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다. 그도 업히다 걷다하며 부모님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가다가 인민군을 만났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인 인민군들이 보더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다. 피난 가봐야 더 힘들다고 그냥 집에 돌아가라고 그랬다. 그래도 불안해서 그 근처에서 열흘 정도 피난 생활을 하다가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려운 피난 시절을 겪은 이들에 비하면 정광영씨네의 열흘간의 피난은 지금은 비록 웃으며 얘기하는 싱거운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 어린 자식들을 앞세우고 피난길에 나섰던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절박했겠는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인민군과 맞닥뜨렸을 그 순간의 마음은 또 어떠했겠는가 말이다. 그 열흘 동안에 생과 사가 갈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해방둥이들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비고비 생과 사의 갈림길을 넘어 살아남았다. 
“우리 자랄 때는 거의 다가 사는 게 어려웠어요. 저도 쌀밥은 구경도 못했고 보리밥에 나물 조각이나 밀가루 수제비 같은 걸 많이 먹었지요. 친구들 중에는 그것도 못 먹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도시락도 못 싸오는 친구들이 수두룩했고요. 그래도 굶지는 않았으니 저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죠. 다들 어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전쟁 때문에 그랬는지 이상하게 우리 또래들이 적어요. 학교에 들어갔는데 우리 전 학년도 학생 수가 많고 우리 다음 해에 들어오는 후배들도 수가 많았는데 우리 동기인 해방둥이들만 수가 적어요.”
해방이다 전쟁이다 하는 걸 겪으면서 시달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연의 섭리가 알아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4.19가 일어났을 때 그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때 전국적으로 데모가 한창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도 데모한다고 등교 길에 교문을 지키고 서 있다가 1, 2학년들 등교 못하게 막고 그랬어요. 그래도 학교에서 그것 때문에 징계를 받거나 뭐 그러지를 않았어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까 선생들도 어쩌지를 못했죠.”
전국적으로 워낙 학생들의 데모가 많기도 했고 그만치 시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여서 당국에서도 손을 놓고 있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우리 현대사에서 학생들이, 청년들이 역사의 선두에 섰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5.16이 일어났다.
“그때는 겁이 나서 사람들이 완전히 차렷 자세가 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조심스런 시기였어요. 워낙 혼란스럽던 시국이어서 그랬던지 어떤 면에서는 당시로서는 군부의 그런 통제가 어쩌면 예고된, 일어날 게 일어나고 말았다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 직전에 우리 면에서도 면장 선거를 하는 걸 보면 흑색선전에, 돈 봉투에, 주먹다툼까지 온통 난리였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 들뜬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은 거죠. 그리고 아무래도 군부가 정권을 잡다보니까 규율과 통제가 많아지고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한 그런 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죠.”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대학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군대엘 갔다. 그리고 제대한 뒤 그는 체신부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체신부 통신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83년도에 전신전화국은 한국통신공사로 독립해서 발족해 나오게 된다. 자연 그는 공무원에서 민영화된 한국통신공사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 셈이다.



호롱불 아래 선녀같았던 신부
그들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도 중매결혼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매 반 연애 반이지만 선 본 지 하루 만에 약혼부터 한, 요즘에 비추어 보더라도 초스피디한 결혼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구담에 살던 누나가 중간에서 소개를 했는데, 신부될 이가 의성 신평에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인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주말에 구담 누나 집에 내려와서 선을 보러 갔다.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구담 누나 집에서 신평까지 사십 리가 족히 넘는 길을 걸어서 갔다. 도착하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을 얻어먹고 방 안에서 호롱불 켜 놓고 선을 봤다.
“선 보러 가서 길이 머니까 처녀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그리고는 그날 저녁에 선을 본 거죠. 저녁 먹고 나서 장모되실 분하고 처제들이 둘만 남겨 놓고 다 나가더라고요. 호롱불을 켜 놓고 선을 보는데 호롱불 아래 신부가 그렇게 이쁘더라고요. 진짜 선녀 같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눈에 뭐가 씌였던 것 같애요. 그래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약혼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신평서 한 이십 리 되는 안평까지 약혼 사진 찍으려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얼마 못가서 신부가 못가겠다 하는 거예요. 시골에서 차를 안타다가 타니까 멀미가 난 거죠. 그래서 일단 버스에서 같이 따라 내렸죠. 장인 장모는 그대로 버스를 타고 가고 우리 둘은 걸어서 안평까지 가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는 저는 근무를 해야 하니까 그날로 인천으로 올라갔죠.”
아무리 한 번 보고 결혼하던 시절이라지만 신부가 참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아내 이야길 하면서 아직도 수줍어하는 태가 역력한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8개월 정도 있다가 결혼을 했다. 첫눈에 반한 광영씨로서는 참 많이 참았다 싶다. 그런데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도 컸다고 슬쩍 한 마디를 보탠다. 떨어져 있으면서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던 그 시절이 새삼 기억이 나는 듯 이야기를 하는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머문다. 순수했던 해방둥이들의 청춘 시절 이야기 한 토막이다. 



시 인생
그렇게 스물일곱살에 첫눈에 반한 지금의 아내 황희순씨(46)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 있어 안동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다. 73년의 언저리였다. 그렇게 시작된 안동살이가 어느덧 30여년이 넘어간다. 줄곧 한국통신 밥을 먹다가 IMF때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직장을 조금 일찍 퇴직하고 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일을 하고 있다는 게 30년 안동살이에서 변화라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정년퇴직이 10여년 남은 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직장에서 물러나야 했던, 그를 비롯한 그때 50대를 막 지났던 해방둥이들이 근래에 넘은 가장 큰 파고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 학생이었던 두 아들은 어느 틈에 다 자라 각각 자기 일을 찾아 부모 품 떠나 독립을 했다. 그 세월 속에서 그 스스로도 그렇고 지인들도 그를 안동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는 어느새 안동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동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다. 그의 시 속에는 그래서 안동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안동 일직면 조탑동에 사시는 동화작가이신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쓴 ‘권정생 記’를 비롯해서 ‘임하댐의 가을’이나 ‘조흥은행 앞에서’같은 시들은 그의 잔잔한 안동 사랑을 말해준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한 이십 년 됐지요. 처음에 한국통신 사보에 시를 한 편 두 편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그때가 83년 무렵이었는데 그런데 그때는 아주 쟁쟁한 분들이 시평을 써 주고 있었어요. 처음 시는 고은 선생님이 시평을 써 주셨는데 아주 호평을 해 주셨더라고요. 두 편 세 편 계속 실었는데 계속해서 평을 좋게 해 주시고 글로 격려도 많이 해 주셨어요.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한 삼년 전에 겨우 『흰 열꽃』이라고 시집을 하나 냈어요.”
그게 2003년 12월의 일이다. 83년 ‘나비춤’으로 시조문학에 초회추천을 받은 지 20년, ‘거미’라는 작품으로 시조문학에 천료되어 등단한 지로는 13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스스로와 자신의 작품에 엄격한 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그 사이에 시집을 묶었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몇 번이나 해판을 했다는 이야기가 서평에 실려 있다.   



안동
애정이 있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것, 관심이 있기에 그는 안타까운 것도 많다.
“안동의 문제랄까 후진양성이 안 된다는 거 그게 참 큰 문제인 거 같아요. 문학 단체나 동호회 모임 같은 데 가 보면 거의 옛날 멤버들이 그대로이고 새로운 얼굴이나 변화가 없어요. 정체되어 있다는 거죠. 그건 한편으로는 교육 때문이기도 한데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만 가면 입시위주로 돼서 시 쓰고 하는 건 아예 뒷전이고 쓰기를 아예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요즘 아이들이 표현력 같은 게 많이 부족하고 또 쓰긴 쓰더라도 젊은 세대일수록 인터넷 매체 같은 것에 익숙하다 보니까 가벼운 글쓰기에 그친다든가 하는 게 많죠. 세대가 내려갈수록 젊은 층의 문학 활동이 저조한 건 안동만 그런 게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이니까 예외로 치고, 그래도 안동은 젊은 사람들이 문화 활동을 상당히 활발하게 하는 편이예요. 문화지킴이라든지 국제탈춤축제와 관련해서 다방면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서 전국에서도 강세를 띠고 있죠.”
말 속에 안동 문화를 새롭게 이끌어 가고 있는 그들 젊은 후배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덕분에 우리도 후배들한테 많은 자극을 받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지다 보니까 문화 콘텐츠도 점점 다양해져서 문화원도 일거리가 자꾸 많아져요. 각종 문화행사도 행사지만 책 발간에 문화학교니 예절학교니 사회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해야 하고, 작년부터는 또 문화역사 마을 가꾸기 운동까지 더해져서 일 년 내내 쉴 틈이 없어요. 사는 게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수록 문화 쪽에 관련된 사람들의 욕구가 커지니까 아마도 갈수록 이런 문화 관련 쪽 일은 바빠지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컴퓨터보다는 원고지
언젠가 한 번은 살아온 인생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게 삶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그게 잘 안 된다는 그다. 뭔가 산만하고 옛날처럼 집중이 잘 안되는 게 나만 그런가 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삶에 여유가 없이 쫒기 듯이 산다고들 한단다. 그래서일까? 그가 여전히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을 고집하는 것은. 잃어버린 여유를 글자 한 자 한 자 속에 잡아두고 두고두고 곱씹어보고 음미해보며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는 컴퓨터를 잘 쓰는 편인데 이상하게 컴퓨터로 하면 시가 잘 안 써져요. 요즘 주위에 보면 컴퓨터 없으면 글을 잘 못 쓴다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통신 관련 직종에 있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젊었을 때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서 286 이전에 처음 컴퓨터가 나왔을 때부터 컴퓨터를 했어요. 덕분에 초창기에는 회사에서 컴퓨터 관련 문서 일도 많이 했고 문협의 문서 작성이라든가 그런 것도 제가 많이 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만치 따라가기도 쉽지 않고요. 그리고 시는 특히 몇 번씩 머릿속에서 수정을 거듭하며 다듬어야 되는 거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쓰는 게 버릇이 돼서 컴퓨터는 업무 볼 때만 쓰고 있어요.”
모두들 빠른 것, 새로운 것만을 쫒을 때 그는 그렇게 느리게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사는 데 골몰하고 있다고나 할까, 해방둥이로 살아온 그 세월들을 그는 그냥 허투루 내다버리지 않고 하나하나 곱씹으며 곰삭여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창모임
몇 십 년 만에 동창 모임을 했다고 한다. 정신없이 3,40대를 보내고 그러고도 자식들 얼추 다 키워 놓고 그러고서야 가진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이었다. 
“한 사십 년 만에 한 번 모였었어요. 55명 정도 졸업을 했는데 그중에 더러 죽은 이도 있고 한 이십 여명 모였었는데 아직도 고생하는 이들도 있고, 게 중에는 객지에 나가서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이들도 있고 그렇지요 뭐. 다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는 거랑 노후에 먹고 살 걱정들이죠.”
환갑을 맞았다지만 자꾸만 노령화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어깨에서 짐을 다 내려놓지 못한 해방둥이들인 셈이다. 아니 어쩌면 퇴직이 눈앞인 지금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또 다른 묵직한 화두 하나를 새로 짊어지고 가야할 판이다. 
“자식들하고 같이 살면 불편할 거 같아요. 따로 사는 게 서로 편하죠. 그런 면에서 자식들한테 몽땅 다 주는 건 안 좋은 거 같아요. 우리 친구들끼리 농담반 진담반 그러거든요. 너는 행여 자식한테 다 주고 홀대받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요. 어쨌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따로 마련해야 하는 게 맞죠. 젊었을 때는 흔히 하는 말로 늙으면 두 내외 여행이나 다니며 살지 뭐 그랬거든요. 그런데 막상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래요. 여행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행만 다니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요즘 앞으로 어떻게 살까 나름대로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려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저는 우리 또래 중에서는 비교적 평탄하게 살았어요. 특별히 큰 굴곡이나 이런 게 없었어요. 덕분에 지금까지는 잘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죠. 이제 한 이 삼년 후면 퇴직인데 아직까지는 노후설계라고 따로 해 놓은 건 없고 두 아들 장가 다 보내고 나면 시내 가까운 곳 농촌에 집 한간 마련해서 두 내외 텃밭 가꾸고 살면서 정말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싶다 그런 생각은 해요.”
 
45년생 해방둥이의 메세지
8월이다. 광복 60주년이라고 매스컴에서는 연일 특집방송을 한다.
“해방둥이 해방둥이 하지만 남북이 갈린 상황이니까 옳은 해방은 아니고 반쪽짜리 해방이잖아요. 언젠가는 합쳐져야겠지만……. 점점 이질적으로 벌어지니까 안타깝죠. 해방될 당시에는 모두들 곧 다시 합쳐질 줄 알았죠……. 언젠가는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겠죠. 그런데 연전에 금강산엘 갔다 올 기회가 있어서 다녀오게 됐는데, 그때 그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나름대로 자신들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산에 나무가 별로 없고 땅의 토질이 정말 너무 척박했어요. 벼를 심어 놨는데 벼 포기가 우리처럼 풍성한 게 아니고 앙상했어요. 하루 빨리 통일이 돼야죠.”
남들은 금강산 구경 잘했다 하는데 괜시리 혼자 마음이 안 좋아 괜히 왔다 싶었다는 정광영씨, 그 세대를 살아낸 해방둥이 시인의 진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라고 뭐 별다른 게 있나요. 단지 해방되던 해에 태어났다는 거 외에. 그렇지만 우리 때는 정말 몸을 안 사리고 열심히 일했거든요. 요즘 젊은 후배들을 보면 다들 좋은 대학 나와서 학벌들도 그렇고 자격들도 그렇고 대단들 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능력을 최대한 발휘들을 못하는 것 같아요. 비단 젊은 사람들만의 일은 아니고 현대 사람들의 공통점인데 일은 많이 안하고 자기 시간은 많이 누리려고 하는 경향들이 강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우리 때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어릴 때부터 입시에 시달리고 취직 시험에 시달리고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삶에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아야 되니까 어떨 때는 그게 참 안돼 보이기도 해요. 어느 세대든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거죠. 요즘 신세대들, 밝고 발랄하고 다 좋은데 기본이 좀 약하다고 할까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기본이 망가지면 안 되거든요.”
아무리 시대가 각박하고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인간으로서의 기본만은 변하지 말고 지켰으면 한다는 것, 그것이 격동의 60년을 살아온 해방둥이 시인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메시지이다.<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