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의 품안(글/이현정)
노년기에 접어든 야산 자락에 터잡은 어느 무덤을 지키고 선 문인석이다. 얼마만큼의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을까. 얼굴은 돌이끼가 자라느라 거뭇거뭇해졌고, 석공의 예리한 솜씨는 세월의 풍파에 깎여 찾아볼 수 없지만, 알듯 모를듯 감춰진 미소는 만고 풍상을 겪어낸 해탈의 경지인가 오히려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넘친다. 그래서 일까. 연륜이 쌓이고 오래된 것을 대하면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때 내 얼굴이 이 문인석을 닮아있다면!
큰 나무 한 그루가 수명을 다했는지 말라 죽어 있다. 죽은 나무는 잎을 피우지 못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래 된 나무의 영험함도 사라지므로, 사람들은 죽은 나무를 더 이상 올려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나무는 화려하다. 썩어가는 자신의 육신은 텃밭삼아 새 삶을 시작하는 온갖 생명들을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고 있다. 피부에 이끼처럼 붙은 버섯들, 몸둥이를 기어오르는 박주가리, 현삼덩굴, 그 속을 헤집고 다니는 온갖 벌레들…. 죽은 나무가 말한다.
“이제 나는 스스로 살 수는 없지만, 이것들을 살게 할 수는 있단다.”
돌 지난 아이의 티없는 살결,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의 넘치는 활기, 이십대들의 팽팽한 근육과 세상과 한 판 겨뤄보자고 덤빌 수 있는 패기. 이런 것들은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을 만큼 탐낸다.
그러나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 윤기 없이 흩날리는 백발,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든 굽은 허리가 더 아름답다. 굳은살로 덮인 발이, 아무리 씻어도 하얘지지 않는 거친 손이 더 아름답다. 세상이 던지는 그 모든 풍파를 막아주며 오늘 우리를 있게한 징표이므로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답다!
“고추는 다 말랐어?” “오늘 볕이 좋으니 다 마르겄지요.” “언제 온다누?” “일 마치고 출발하니 밤중이나 돼야 들어온답디다.” “마늘하고 고구마도 챙겼어?” “아이구, 어련히 알아서 할까.”
이런 이야기가 막 오갔을 것이다. 할매는 삐걱거리는 마루에서 아들네 싸줄 고추며 마늘, 호박고지, 무시래기들을 챙기고, 할배는 앞밭에 나가 김장용으로 심은 배추를 묶어주고 있을 것이다. 무덤의 문인석을 닮은 할매 할배는 고목나무 밑둥치에 자라는 애기버섯같이 귀여운 손주가 얼른 보고 싶어 가뜩이나 거친 손에 가시가 드는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손을 놀릴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