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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길
류 은 경(서울시 종로구 계동)
출근길..
안개마냥 속눈썹에 달라붙던 물 알갱이들이 사무실에 도착함과 동시에 들이 붇듯 장대비가 되어 바람을 몰고 온다. 일에 열중하다가도, 혹은 맥없이 앉아있다가도 비 쏟아지는 소리만 나면 나는 아련한 어린 시절 기억에 사로잡혀 시공을 넘나들곤 한다.
올망졸망 고만고만한 세 아이가 길을 걷고 있다.
적당히 한 두 개 쯤 우산살이 부러지거나, 비와 바람까지 얹어져 아이들에겐 버거워 보이기도 한 큰 우산을 하나씩 어깨에 지탱해 들쓰고, 세 아이는 인적 없는, 빗줄기에 먼발치 내다보기도 쉽잖은 산길을 간다.
제 덩치만한 가방이 걸음마다 터덕터덕 등을 두드리고 엉덩이를 쳐대면, 가끔씩 어깨를 비틀어 가방끈을 추슬러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길을 걷는다.
갈 길이 바쁜데, 그중 가장 어린아이는 물웅덩이 앞에서 하염없이 발끝을 토닥거리거나, 질퍽한 비포장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개구리를 쫓아 덩달아 폴짝거리며 늑장을 부리고, 혹은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린다. ‘저 모퉁이만 돌면, 저 고개만 넘어가면’ 그러면 잠깐 쉬었다가자며 그 중 큰 아이가 달래고 어른다.
그렇게 십리길 비포장 길을 걸어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도착한 학교는, 늘 1교시 수업이 한창이거나 어떤 땐 이미 2교시가 시작되어 있기도 한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린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맡아 놓고 지각을 한다.
예천 어느 골짝에 살던 어린 우리 형제들은, 면소재지로 부모님이 이사를 나오시고도, 몇 년간을 그렇게 여전히 그 골짝마을 작은 초등학교로 등교를 했다. 전교생이 백 명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던 정겹던 학교를 떠나기도 싫었으며, 그 골짝마을에서도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일명 ‘산너메 외딴집’에 살던 우리 형제들은 면소재지 ‘큰 학교’로 전학 가는 것이 못내 두렵기도 했던가보다. 그도 그럴 것이 형제가 여섯인 넉넉지 못한 형편에 벽지학교 출신들에게 주어지는 중?고등학교 ‘등록금 면제’라는 혜택이 그 고생길을 감내하게 만든 큰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근 20년 쯤 전이던 그때에, 면소재지와 학교가 있는 마을을 잇는 버스는 하루 네 차례, 그나마도 큰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하며, 산을 휘돌아 난 비포장 길인지라 비만 왔다하면, 눈이라도 내렸다 하면 이내 버스는 발이 묶인다. 허면,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학교가 있는 마을 어귀까지 돌아 돌아가는 버스로 두 번을 갈아타고 내려서도 30분은 족히 걸어야 했다. 허나 그리되면 시간도 곱절이려니와, 차비도 역시 곱이다 보니 으레 어린 우리형제들은 통상 열에 여덟 번은 진작부터 ‘걷기’를 택하곤 한다. 어김없이 지각이다.
비포장 길을 달리는 버스를 타는 것은, 멀미심한 어른들에겐 고역이었을지나 어린 우리들에겐 놀이기구 저리가라 할 만큼 재미난 경험이었다. 오늘날에야 어쩌다 시골 비포장 농로를 잠시라도 지나갈 양이면 행여 자동차 어디 흠이라도 날까 슬금슬금 기어간다지만, 당시엔 그것이 늘상 있는 일이므로 아랑곳없다. 쿠당쿠당 달리는 버스는 우산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마냥 쉼 없이 우리들을 튕겨 올리고, 그럴수록 우리들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높아만 간다. 지금이야 시멘트로 매끈하니 깔린 그 길이지만, 십 오리(약 6km) 상당되는 그 길을 시멘트 포장 공사하는 동안은, 장마철 중임에도 선심 쓰듯 가끔씩은 다녀주던 버스를 가끔은커녕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었으니, 비약을 좀 심히 하자면, 그렇게 먼 길 등교를 하던 3여년 중 족히 2년 반은 걸어 다녀야했던 우리 형제들의 고생을 담보로 지금의 매끈한 시멘트 길이 만들어진 것이리라….
당시만 해도 뒷문 하나뿐이던 시내버스는, 청록색 상의에 자줏빛 바지 유니폼을 입은 안내양 언니가 있었다. 1년 365일을 한결같이 그 길을 따라 그렇게 올망졸망 서로를 의지해 ‘고난의 행군’을 하는 우리들을, 주기적으로 같은 노선을 운행하여 자주 마주치는 버스기사 아저씨들과 안내양 언니들은 일일이 알은 채 하며 반겨주곤 했다. 어떤 땐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었던 녹진녹진 녹아내린 사탕을 쥐어주기도 하고,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져 어쩔 수 없이 휘돌아가는 버스를 타야할 때면, 옛날 구식버스에 있던 운전석 옆 ―엔진열기가 올라와 뜨끈뜨끈한, 돈바구니 올려놓던― 널찍한 공간을 특별히 내어주기도 하고, 우산도 없이 갈아탈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이 애처로운 어린 형제들을 위해 경적을 마구 울리며 저만치 달아나는 버스를 잡아주기도 하셨다.
그런 그분들의 마음이 늘 고마웠으나, 때마다 어수룩히 고맙단 인사한번 제대로 못하던 숫기 없던 우리들은,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가 있어 책 대신 먹을 것들이 잔뜩 든 가방을 울러 매고 버스를 타게 되는 날이면, 불쑥 가방에서 사이다 한 병을 꺼내 쑥스럽게 건네기도 하고, 삶은 달걀 절반을 덜어 건네기도 했다. 학교근처 뒷산에서 친구들과 주운 알밤을 아껴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안내양 언니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 줄때면 마치 도둑질 하는 냥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던 어린 녀석들….
그렇게 길 위에서 영근 고만고만하던 아이들은 그때의 그 안내양 언니보다도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어느새 저마다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된 남매들이 모여 어릴 적 일들을 떠올릴 때면, 콧잔등이 시큰해지기도 하고, 울컥 목이 메기도 해가며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곤 한다. 지금이라면 해내지 못할, 어쩌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 오래고 먼 길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가 아니라 ‘비가 오고 눈이 올 때면 반드시’ 걸어야 했던 그 굽이굽이 비포장 길 위의 시간들이 마냥 그리울 따름이다.
내게 어릴 적 가난과 숱한 고생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지긋지긋함’이 아니라, 꼬옥 그러안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다. 저다지 구구절절 내리는 빗줄기 앞에 코끝 짜안 해지도록 떠오르는 추억 한 토막 없다면, 다 자라 성인이 되고도 작은 어려움 앞에서조차 난감해하고 당혹스러워해야할 포시러움으로 자랐다면, 아… 나는 얼마나 사는 재미가 없었을까 말이다.
흠뻑 시원스레 비 한번 맞기조차 두려운, 매캐한 먼지 냄새 가득한 서울 도심의 여름장마. 무심히 지나치는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토록 추억할 것이 많은 어린 시절을 가진 내가 새삼 배부르다.
글을 쓰는 동안 잠시 개는가 싶더니 후두둑 다시 비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 내리는 하루, 내도록 어린 내가 오늘을 산다.

장마의 추억
이 순 희(안동시 명륜동)
하루종일 해가 쨍쨍 쏘아대는 날이다. 어찌나 더운지 축축 늘어진다. ‘옛날보다 더운건가?’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께 물어보지만 옛날보다는 안 덥단다. 아무래도 에어컨이다 선풍기다 해서 더위 면역력(?)이 떨어진 탓일 거다. 옛날엔 부채 하나만으로도 시원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지겹게 지속되는 장마가 그리워진다. 장마면 덜 덥지 않을까? 하는 흑심에서다. 내가 물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다. 물론 머리 위까지 잠기는 물은 싫고, 목 아래까지 오는 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비도 좋아하고.
초등학교 시절, 여름에 장마로 비가 쏟아지면 신발이고 양발이고 다 벗고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었다.(시골이라 차가 잘 안다녔지만 아스팔트는 깔려있었다. 차와 사람이 같이 다니는 공용도로랄까.)
어린 아이의 부드러운 발바닥이라 돌이라도 밟으면 아팠지만 비가 한참 쏟아질 때 아스팔트는 아무것도 없이 막 청소한 방바닥처럼 깨끗해보였다. 흙처럼 물이 스며들지도 않으니 빗물이 아스팔트위를 돌고 있어 걸을 때마다 발을 착착치고 도는 빗물의 시원함과 찰박찰박 나는 소리는 나를 참으로 편안하고 행복하게 했다.
우산과 스레이트 지붕 위로 빗물이 터덕터덕하고 부딪히는 소리도 좋았다. 시원한 기분이 들어서 어떨 때는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초등학교 장마의 기억이 장마 그 자체를 즐겼던 것이라면 고등학교 시절은 조금 다르게 기대에 찼던 기억이다.
고등학교를 버스를 타고 다녔었는데, 학교를 가려면 버스가 낙동강의 다리를 지났어야 했다. 80년대에 한번 강둑을 넘어서는 홍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는 학교주변 사람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장마만 오면 조금 긴장을 했다. 80년대 홍수 한번 외에는 한번도 없었지만 강 위를 지나는 다리도 조금 낮은 편이었고, 강둑도 높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다리에 닿는 강물이 위험 수위에 찰랑거리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물이 강둑을 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의 위험수위에서 찰랑거리기만해도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미 등교를 한 상황에서도 다리의 위험 수위까지 물이 차면 학생들을 빨리 집에 가라고 떠밀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장마가 좋았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었던 때니까.(나름대로 정당한 이유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백이면 아흔아홉은 학교가지 않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학생이라면.) TV에서 장마전선이 온다고 떠드는 때면 친구들과 함께 눈을 반짝였다. 혹시나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학급실장들은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 장마시기에 반 아이들이 실장 집에 전화해서 학교 가야하냐고 줄기차게 물었을 테니까.
아아. 여름 장마가 그립다. 지금 옛기억을 떠올리다보니 더위가 가실까하는 흑심보다는 옛기억에 행복해 하기위해 장마가 그립다.
여름 장마가 오면 옛날 고향집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그래서 맨발로 그 아스팔트 위를 걸어봐야겠다. 고등학교 때 그 다리를 지나봐야지. 다리에 위험수위까지 찰랑거릴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쁜 바램일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