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시인들의 시집 읽기(글/한경희)〈글밭〉은 안동에서 1969년부터 동인지 『글밭』 창간호를 내면서 현재까지 지속적인 문학활동을 하는 시동인이다. 문화적으로 매우 곤궁하던 시절부터 문학동인을 결성하여 지역문학을 이끌어왔고, 현재에도 지역문학의 현장에서 매우 모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얼마 전에 글밭 동인 3인이 시집을 함께 출판하여 시집을 소개하는 형식의 글을 쓰고자 한다.
먼저, 김지섭 『안토니오 코레아의 알비 마을』(문예미학사, 2005)이라는 시집이다. 평생 시 쓰는 일을 지병처럼 앓았다는 자서에서도 보이듯, 시인에게는 어떤 순결성과 진정성이 시집 출판을 끝없이 미루도록 했는지 모를 일이다. 시의 언어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세계를 가진 시인에게 엄격한 시적 지향은 미덕이 될 수 있는 일이고, 출판 홍수시대에 요구되는 덕목일 수 있다. 그러나 김지섭 시인에게는 너무 지독한 자기검열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판형식으로 시를 풀어놓아도 보따리가 화려하고 푸짐한 잔치가 될 수 있는 것을 너무 오래 앓고 계셨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시집에는 시간에 대한 시인의 오랜 관찰이 아주 절절하게 스며들어 있다. 마치 여든의 지혜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성인처럼 청년의 방황과 갈등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시간대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단순히 현재성의 개념을 가리키는 시간보다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시인의 언어들은 발효되어 있다. 이 발효된 언어가 「삼월에는」이라는 시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좋아라/꽃은 자꾸만 피려 피려하고/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지/바람은 멱살 잡고/한사코 길목을 막아서는//……삼월에는 좋아라/낡은 수레 한 채/세월의 신작로 한가운데 서서/구를 듯 말 듯/찌그덕 찌그덕 소리 듣는/늙은 소도 좋아라” 이 시는 긴 겨울을 보낸 나무들의 새순과 그 새순을 피워 올리는 봄바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늙은소’를 봄 안으로 들여놓았다. 봄은 따뜻한 담장 밑으로 조용히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지만, 봄의 기미를 감지한 시인은 늙은 소를 내세워 봄을 드러내고 반기는 중이다. 이 시의 폭발적인 지점은 찌그덕거리며 낡은 수레를 끄는 ‘늙은소’가 느끼는 봄날의 환희에 있다. ‘늙은소’는 봄도 발효시키면서 곰삭은 세월의 언어를 열고 있는 상징이다.
김윤한 『세느 강 시대』(월간문학, 2005)는 인생의 통속을 들여다보기 좋은 시집이다.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표 나지 않게 할말 다 할 수 있는 사람의 심성을 시인은 스스로 지녔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민중이 귀한 대중들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통속에 확실한 경계선을 긋고 있을까. 시인은 치졸하지 않은 통속의 새로운 면모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모든 시인들에게 습작기는 열병 자체다. 스스로 한 때 종교였음을 실토하는 김윤한 시인에게도 시란 언어의 성지였을 것이다. 당시, 시에 대한 진정성은 생활의 전부가 되어 관통하면서 알콜에까지 닿았고 여전히 지속되는 일이다. 이런 습작기의 아름다운 진통과 열병이 셍활의 터전에서 일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삶의 애환과 고충으로 구체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상의 통속이 시적 언어로 재현되었다고 본다.
“술독에는 한창 막걸리 괴어오르고, 추운만큼 탁자위에는 늘 따스한 시들 가득했다/겨울도 밤도 더 가라앉고, 시인들은 합창을 한다. 세느 강 시인들의 노래는 작은 어둠 한 조각 걷어내지 못할지라도…… 세느 강-낮에는 우울하고 칙칙한 오물들 흘러내리지만, 밤이면 오히려 물결위로 별들 가득 시가 되어 빛나던”(『세느 강 시대』) 시인은 복개천 위의 포장마차에서 막걸리와 시를 나누던 열병의 시절을 별처럼 빛나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세상의 낭만을 막걸리로 다 녹여 마셔 낼 수 있을 무한대의 용기와 모든 서정을 별빛처럼 빛나게 할 자신감은 복개천을 세느 강으로 불러낼 수 있다. 혹시, 시인은 가볍게 통속을 가장하면서 속으로 삶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개천에 밤이 오면 빛나는 별들이란 얼마나 찰나적인 황홀인가를 되묻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흐르는 방향이 어른거린다.
강희동 『손이 차가워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월간문학, 2005)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시류에 순응했다고 하나 실제 시를 읽어보면 도시생활에서 주변인으로 서성거리는 마음의 그늘이 진하게 묻어난다. 왜냐하면 시인도 인정하고 있듯이 ‘두고 온 옛길을 걷고’ 싶은 사람에게 도시는 끝없이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강희동 시인의 이 시집은 길 떠남, 혹은 비움의 시학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비벼진 시인의 빈 마음은 기다림의 시편으로 정열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비어있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일은 상처 덧나기를 지속하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기차도 사람도 기다림도 멈춤도 잊었다/……지축을 흔들고 지나간 사연들이 침목에 누워/녹슨 옛 이야기를 철길로 전해주고 있었다”는 「겨울 무릉역」은 시인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잘 담겨있는 작품이다. “지독한 적막에 울고” (「만춘」), “돌아온 빈 방은 킁킁거릴 냄새도/입 다실 국물도/없다”(「둥지1」), 「늙은 감나무의 독백」에 오면 “높은 키 목 빼고 먼 눈길로 오래 기다린” 감나무가 보인다. 사람이 떠난 빈 공터를 한결같이 지키는 감나무도 시인에게는 끝없이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기다림이 도시공간으로 옮겨간 시인의 정서란 “우, 하고 소리치며/울고 싶은 아침”(「풍경1」)에 정박해 있다. 키가 커서 외로운 플라타너스는 외로움이 높이 자란 시인의 마음의 깊이를 재고 있는 중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철저히 혼자 남아서 아무도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거나, 너무나 아름답지만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거나, 시인이 설정한 시적대상들은 모두 상처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시인에게 상처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지로 변모되어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리는 힘이 되고 있다.
세 시인의 시집출간을 축하드린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