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글/한경희 - 안동대학교 국문학과 강사)

특별한 여행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중동의 두바이까지 현대 상선 하이웨이호를 타고 간 이력의 글이다. 대만, 홍콩,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거치는 바닷길의 원정대가 1만 2천 킬로미터, 21일간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각자의 시선에서 쓴 글이다. 항해의 일지가 작가마다 색다르게 읽혔는데 그것이 바로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실천문학사, 2005)로 묶였다.
책을 읽을수록 말라카해협이, 바다만 보이는 곳의 하늘과 구름이, 그곳의 돌고래가, 남지나해, 인도양의 태양, 달, 별빛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기행의 매력을 모조리 발휘해낸 책임에 틀림없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나면 모두들 원양어선의 선원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는 걸까. 모르리라.


이 책의 구성은 네 명 작가들의 바닷길의 체험을 각자 쓰도록 하고 있고, 선장 이하 모든 승선원들의 얼굴과 속내까지 밝힌 글도 싣고 있다. 바다 사나이들의 나고, 들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함께 묶여있는 책이다. 그러니 단순히 여행담이라고 하기에는 책을 너무 가볍게 설명하게 되고, 바다 이야기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즐거운 책읽기의 반열에 드는 책임에 분명하다. 즐겁고, 유쾌하나 독(?)한 아름다움에 취한 기록을 작가별로 더듬어 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순서대로 적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원고지 100매를 채우기 어렵다는 박남준 시인의 걱정도 아닌 걱정을 미소로 날리며 글을 읽다보니, 그 어려움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분량의 어려움은 핑계였을 테고, “그 깊고 푸른 바다”의 소회를 번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의 언어를 다 풀어낸다는 것, 혹은 납득할 정도라도 풀어낸다는 것의 버거움이 그것이었다.
스스로 ‘죽음의 술조’라고 쓰면서 자신이 포함되기를 꺼리지는 않은 것 같다. 세관검사의 문제로 술 없는 하룻밤을 힘들게 넘기던 일화, 한창훈 소설가의 농 짙은 질문거리는 먼 바다항해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으로 읽혔다. 박남준 시인에게 ‘공해’(公海)는 대단한 의미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어느 누구의, 어느 나라의 땅도 아닌, 어느 나라의, 어느 욕심도 금을 그어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공해상의 바다”라고 쓴 그 절절한 글에는 분단된 땅에 사는 우리의 무의식이 들먹거리고 있었다.
그 바다를 달리거나, 그 바다 위에 기약없이 떠 있거나 간에, 일종의 축복으로 읽히는 까닭은 돌아올, 이미 예약된 육지가 상주하기 때문일까. 특히 인도양에 올라 날치와 돌고래를 만난 이야기는 영화 <그랑블루>를 떠올려도 좋을까. ‘능라의 길’이라 쓴 인도양에 대한 수사와 놀라움과 감탄의 언어는 마를 줄 모르는 샘으로 거듭되고 있었다. 바다에서 뜨고 지는 해와 함께 별들의 잔치를 두고 쓴 글은 사막의 별밭과 바다의 별밭이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지속적으로 묻게 만들기도 했다.
막상, 두바이 항구에 도착해서 아라비아 사막에서 만난 별과 오아시스, 낙타에 대해 시인은 말을 잃어버렸다. “오아시스와 눈이 슬픈 낙타들은 사진으로는 절대 찍을 수 없었다. 나의 짧은 문장으로도 결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시인이 언어 앞에 절망했다니 언어는 역시 졸렬한가.


유용주 시인은 바다론으로 항해의 나날들을 일갈한다. 새롭게 쓰여지는 바다론 덕분으로 바다의 이름이 알려지고, 바다의 품성이 대중의 판으로 번져갈 것이라 믿는다. 그의 말처럼 “체증이란 육지에서나 써 먹는 싸구려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시인의 말과 만나서 행복한 거듭나기를 하고 있으니, 단순히 바다헌사가 아니라 바다를 제대로 알아가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바다는 문패도 달 수 없고, 못 하나 지르지 못하는 “순결한 집”이다. 바다로 인해 생겨나는 많은 놀라운 풍경 앞에서 찾은 것이 소주라니. 그런데 배 위에서 소주는 없거나 귀하신 존재였던 모양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대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걸신들린 듯 술을 찾았지만 소주는 아예 없다.” 이 걸신들린 귀신에서 자유로운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유용주 시인은 “나는 나를 알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고 썼다. 그래서 줄곧 살림과 땀과 노동과 성실에 중심추를 내려놓고 그것에 충실한 풍경을 안으로 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다를 보니 말이 막힌다. 눈이 막힌다. 저 물을 떠마신다면 몸속 나쁜 피가 전부 빠져나가고 저 물에 한 번만 몸 담글 수 있다면 몸속 깊은 병도 씻은 듯 나을 것 같다. 정화될 것 같다.” 작가들의 심성이란 “늘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든가 그것이 문학의 뿌리가 된다는 믿음 등은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가동 중이었다.


안상학 시인의 글은 다른 작가들보다 엄청 담담하다. 특별한 여행에 앞서 치른 어려운 일 탓이었는지 바닷길에 대한 경배의 마음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또, 경어체를 사용하여 꼬박꼬박 ‘-습니다’로 읽혀져서 그런가, 유용주 시인의 바다론의 수사와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박남준 시인의 긴장을 읽는 재미와 다른 묘한 흥미가 일어나는 글이다. 이렇게 문체도 지문처럼, 목소리처럼 사람마다 다르니, 이것도 읽기재미 반열에 드는 일이다.
“선원보다 더 선원 같아 보이는 유용주, 무슨 소년병 같은 얼굴에 안전모를 얹고 자못 진지한 박남준, 선장보다 더 선장 같아 보이는 한창훈” 이들과 동행한 항해는 그야말로 가슴 설레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거문도를 제외하고 배를 타고 물길에 나서지 못했다는 안상학 시인에게 제주 근해를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놀라운 바닷길이 트였지만, 그 진짜 흥취는 인도양을 위해 아끼고 있었던 거 같았다. 시인은 인도양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만 같아서 다시는 바다에 침을 뱉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니 말이다.
이러자니 인도양의 황혼과 별을 두고 놀란 가슴의 진폭은 대단했을 것 같다.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별자리가 사라지고 글쎄, 북극성까지 희미해지고 온통 별들이 동등하게 모두 반짝거렸다니. 알고 있던 별자리란 얼마나 사치(치사)한가 싶었을 것 같다. 이건 선입견으로 정리할 일도 아닌 듯 싶다.


한창훈 소설가, 역시 입담 능숙한 이야기꾼이다. 술이 허락되지 않은 부산에서의 첫날 밤 묘사는 기 막힌다. “야, 저 불빛 아래 소주향기 올라오는 것 좀 보래이” 하며 ‘금욕’의 밤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이 엄살로 읽히지 않고 절망으로 읽혀지자, 웃음이 더 크게 번지는 것 같았다. 선장과의 첫 대면에서도 술 구하는 부탁은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 절실함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기는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양은 작가 몇을 아예 못쓰게 만들어버릴 작정이다.” 인도양에 진입하여 그 풍광과 노을과 바다빛깔을 두고 작가들 모두 홍역을 앓은 것 같다. 그 홍역의 내용이나 신음과 전율의 체험은 직접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바란다.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의 저자들, 박남준, 유용주, 안상학, 한창훈의 바다 이야기는 긴장되는 해적당번의 순간처럼, 혹은 날치처럼 가볍게 우리를 바다로 안내할 것이다. 꼭, 책머리를 읽어서 지도도 거꾸로 읽기를 부탁드린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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