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하늘(글/강기석 - 군위 송원초등학교 교감, 수필가)

겨울 오후의 늙은 햇살이 교무실을 기웃거립니다. 한적한 하늘에는 제트기가 지나간 흔적이 희끄무레하게 남아 있습니다. 들판 이곳 저곳을 떠돌던 바람이 추위에 움츠리고 있던 플라타너스 앙상한 가지를 한 차례 흔들고 지나갑니다.
나는 조금 전에 이모의 손에 이끌려 교문을 나가던 여학생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던 그 큰 눈과 처진 어깨가 가슴에 무겁게 와 얹힙니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구겨진 그 여학생의 얇은 외투가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전학 와서 한 학년도 채우지 못하고 또 전학을 가야하는 그 여학생의 알 수 없는 미래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여학생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여학생의 모습을 처음보고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무엇 하나 저렇게 즐겁게 해본 적이 없어서 부러웠습니다. 나는 무엇 하나 저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눈빛이, 손짓이 그리고 몸짓이 동화 속 공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누가 보아도 금방 알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미술실에 가서 그 여학생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팔레트 위에서 색을 만들고, 흰 캔트지 위에 색을 칠하고, 물에 붓을 씻고, 다시 색을 만들어 칠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여학생은 나를 보면 아는 체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와 그 여학생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 그리는 일이 즐겁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 여학생을 보았습니다. 이젤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모습으로 그 여학생을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두고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로 그 여학생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그 여학생의 가정환경에 대하여 말했을 때도 나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거동조차 불편한 조부모에게 맡겨진 학생이라는 사실을 못 들은 체 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그 여학생이 그림그리기 대회에 참가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그 날 아침 나는 그 여학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혹시 긴장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여학생은 분명 다른 학생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여학생을 찾았습니다. 현관에 서있는 그 여학생의 하얀 얼굴은 그날따라 유난히 반짝이고 윤기 나는 긴 머리는 여느 때보다 더욱 단정했습니다. 긴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즐거움과 행복감이 충만해보였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여학생은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학생만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 앞에 가로 놓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에 그 여학생의 냉엄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보고 말았습니다. 먼발치에서 이모와 오랜 시간 이야기하는 그 여학생의 안타까운 모습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안 가겠다고 버티지는 않았지만, 결코 가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 또한 나는 알 것 같았습니다.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한없이 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여학생의 행복해 보이던 모습들이 파편이 되어 운동장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그 여학생은 오늘밤 낯선 땅 낯선 방에서 새우잠을 잘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차마 잠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친구를 못 잊어 함께 부르던 노래를 불러볼지도 모릅니다.
다음날은 낯선 학교 낯선 교실에 가서 낮선 선생님 낮선 학생들과 함께 낮선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차가운 현실을 제쳐두고 그렇게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또 어떤 어리석은 어른이 미술실에 와서 참 행복한 여학생이라고 말해도 아무 대꾸하지 않고 그렇게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다시 하늘을 봅니다.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차가운 석양을 향해 날고 있습니다. 그 여학생을 위해 무슨 말인가 했어야 했다는 회한이 밀려옵니다. 나는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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