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백승초시인의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글/한경희 - 안동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백승초 시인의 유고집 「이제 바람이 와서」(사람과문화, 2006.)를 소개한다. 간암으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는 글밭 동인으로 활동한 우리지역의 시인이다. 유고집에 묶인 그의 시와 산문은 시인이 꿈꾸던 자유나 낭만과 함께 그것과 거리 먼 현실생활을 뾰족하게 드러낸다. 가족, 특히 아내와의 말다툼이나 일상을 털어내면서 그래도 시인은 희망을 줄곧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나 보다.
시인에게는 예술가적 기질이 남달라서 현실생활과의 불협화음이 꽤 있었으나 항상 가족 편에 서서 일을 풀어갔던 것 같다. 그런 까닭으로 정신적인 자유에서 항상 결핍을 앓아야 했을 것이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권위만큼 부담이 되는데 시인으로서의 영혼까지 얹혀졌으니 백승초 시인에게 존재의 무게란 대단했지 싶다.
유고집에는 그의 시를 발표/미발표로 구분해서 나누어 놓았다. 아마도 미발표 작품들을 따로 소개하는 것은 유고집이 하는 나름의 역할로 보인다. 먼저, 그의 발표시 중에서 <고독이란 짜식이> 라는 시를 읽어본다.
어느날 문득/내장이 텅 비워지는/그 허전함에/나의 중년은 뒷마당에 버려진 쟁기날이다//
간은 외출하고/쓸개는 어디 장기출장이라도 갔을까/내장 죄다 떼어 바치는 장사꾼 십오 년/내 일상의 매듭은/거기 긴 그림자로 누워/속절없이 황폐한 쑥대밭이다//(중략)
어느 날 문득/내 텅 빈 내장 속에/고독이란 짜식이 웅크리고 앉아/마일드 썬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고독이란 짜식이>
다른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인데 세월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작품의 중심을 흐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가난한 삶에 쫒기면서 바빴고 자식 낳아 키우다보니 훌쩍 중년에 도착한 시인에게 세월은 너무나 아쉬운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디 백승초 시인만 이러랴. 세상의 부모로 살아가는 존재는 한결같이 이 아쉬운 시간과 만나야 하는 것을. 그것을 알 때쯤이면 세월이란 단어를 즐겨 쓰는 중년에 이르고 마는 것을. 시인이 표현한대로 “뒷마당에 버려진 쟁기날” 그것도 무디고 녹슨 쟁기날이 되어가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미발표 시 중에서 <무제3>을 보면 대화체로 매우 긴 장시이다. <무제?는 1-13까지 연작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작품 간의 특별한 주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제목과 주제에 매이지 않고 쓴 것 같다. 시의 형식을 빌었지만 시인과 판사의 대화로 이루어진 희곡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읽다보니 새로운 사실이 있다. 시인은 처음 가족(아내)들만 아는 시집을 내기도 했으므로, 유고집은 두 번째 작품집이 되는 셈이다. 첫 시집의 존재에 대한 행방을 판사가 물으니, 시인이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대답한다. 이유야 모르지만 이 글 내용 중에 “유치하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런 마음이 있어서 아마도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간혹 나는/세월이 아쉬워서/세월에 부대끼며/세월에 정도 주고/서릿발처럼 그 세월에 한도 서렸다/(중략) 간혹 나는/세월이 죄가 되어서/가슴 아플 때가 있다. <무제8>
시인은 스스로를 “염세주의자”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통증은 가족이나 친구와의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앓는 지병 같은 것이라고 해야 적당할까. 위의 시 ?무제8?은 세월을 오래 앓은 시인의 고백이 담긴 작품이다. 세월에 허덕이며, 세월에 아파하며, 세월을 아쉬워하며 살아온 시인 개인의 역사를 통째로 쏟아놓았다. 과연 시인이 스스로 인정한대로 염세적인 냄새가 물씬하다.
티끌하나 남김없이/나 이제 돌아가고 싶다/이른 새벽 함초롬히/이슬 머금고 피어있는/나팔꽃이 아무리 순박해도/나 이제 이슬처럼 돌아가고 싶다/고단한 아내와 철없는 내 아이들/그 인연의 끈은 거칠고 풍진에도/삭지 않으니, 나는 몰라라/미명에 잠 못드는 밤/내 죽음은 어디까지 왔을까. <무제1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무력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승초 시인의 시에서는 죽음준비가 제대로 진행 중이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쓴 시에서 시인은 초조하기보다는 죽음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가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남다른 시인이지만 떠나야 할 때를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죽음을 처연하게 바라보고 스스로 죽음을 읽어내려고 애쓰는 시인은 서서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자세로 시인은 투병일기와 유서도 썼다. 비감이 서려 있지만 야단법석은 아니다. 작별의 인사를 지루하게 나누지 않아서 죽음을 준비하는 언어에는 긴장이 감돈다.
백승초 시인의 당시 마음을 산문을 통해서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어머니, 아내, 친구, 두 딸과 아들, 동기간 정이 매우 돈독했던 시인의 마음은 무겁지만 헤아림이 깊었다. 통닭을 먹어도 어머니가 목에 걸리고(어머님과 통닭), 아픈 친구에게 돈을 부치면서 친구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고(이형 李兄), 서울 고모 집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에게 부치는 자상한 아버지 편지(민혜에게) 등에는 시인의 마음자락이 묻어있어 시인이 표현한대로, “가슴으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아내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던 시인은 간암 선고를 받고서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유서에 쓰고 있다. 가족 가운데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 살아온 아내에게는 언제나 부족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미해결 상태로 지속되었는데, “아내와의 화해 직전에 욕 한마디 잘 못해서 산통 다 깨졌다. 빌어먹을, 금년은 안 풀린다.”(그 해의 일기, 1997.1.3.)처럼.
가장으로서 철저한 책임의식을 지닌 시인은 “나는 내가 아니다. 우리 식구 모두의 소유다.”(그해의 일기1997.1.8.)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이 의식은 시인의 자유와 감성을 옥죄는 일이 되었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울적해도,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장사하는 일이 힘들어도, 결국 가족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개인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인이 가장 아쉬워하면서도 결코 어쩔 수 없었던 생활전선은 그렇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너무 안락한 것도 난관에 속한다.”(1997.1.10.)는 생활철학으로 자신의 한 생을 지켜내고 있었다. 안락을 피해, 고락을 이겨낸 시인의 유고집 읽기에는 우리의 절절한 가슴이 필요하다. 아니 읽으면 절절해지는 가슴을 만날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