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지-물밑으로 들어간 예안의 역사(글/이부경)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안동댐이 완공이 되고 담수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막 영글기 시작한 벼가 그득한 논도, 주렁주렁 사과를 매 단 과수원도, 박 넝쿨 얹혀진 초가도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짐을 꾸려 도회지로 이주단지로 떠나기 시작하였고, 우리 가족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고향을 뒤로 두고 안동으로 왔다.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예안'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부터 저린 것을 예안사람만은 알겠지.

수몰되기 전 예안은 안동군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컸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군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고 분교까지 거느렸다. 일제 이전, 안동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요 조선성리학의 집성지로서 이현보·이황·조목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추로지향'으로 불렸다. 실학자 이중환은 예안을 일컬어 "신이 가르쳐준 복된 지역"이라고 꼽기까지 하였는데, 우리는 물을 끌어들여 그렇게 복된 땅을 물 속에 묻어 버렸다. 그 복된 땅을 다시 볼 수는 없을까?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읽어 본 책이 바로 잃어버린 내 고향을 담고 있는 {선성지}였다.

 

{선성지}는 17세기 초 예안 사람 권시중(權是中; 선조 5년,1572 ∼ 인조 22년,1644)이 쓴 예안현의 읍지이다. 그는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의 24세손으로 효행과 학문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 난정을 만나자, 벼슬에 뜻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선곡연계록(善谷蓮桂錄)}과 {선성지}를 지었다. 이 가운데 앞의 것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

선곡과 선성은 각각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불리던 예안의 이름이다. '宣城'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가 반역한 견훤을 토벌할 당시 성주인 이능선(李能宣)이 왕건을 도왔다. 그러자 태조가 그 의리를 가상하게 여겨 그의 이름에서 '宣'을 따서 읍호를 '宣城'이라 칭하고 군으로 승격시켜 군민들로 하여금 대대로 선화를 이어가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능선과 고려 태조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와의 관계라면 그저 안동의 삼태사만 알 뿐 예안의 이능선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냈는데, 명색이 선성(예안)이 본관인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파노라마 사진으로 보는 듯한 예안현-선성지

{선성지}는 완성본이 아니라 초고본이다. 그래서 체제가 정비되지 못하고 항목의 중복이 심한 편이다. 그렇지만 권시중이 온 힘을 쏟아 부은 필생의 역작이라는 점은 글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자면, 예안현의 경계에 대해 쓰면서 권시중은 예안현의 동서남북 경계뿐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몇 리, 몇 보에 있다는 산천과 고을을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마치 당시 예안현의 전체 모습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보는 듯 하다.
예안에 대한 애정으로 선성지를 기록함에 있어서 권시중은 폭 넓은 자료를 인용하였으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조사하고 기록한 것을 후세 사람들에게서 검증 받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권시중의 역사 기록 자세는 다음 내용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중년 이래로 일 때문에 삼척부 및 흥해군에 머물면서 『역관록(歷官錄)』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동일한 시기였는데 또다시 『동방등과록』 및 『고사촬요』를 가져다가 조사해 보니 그 처음은 모두 같은 시대였다. 또한 영공 금언강(令公 琴彦康) 형에게 가서 토론하니 …"(『선성지』, 역관록서歷官錄敍)


"이상 옛 자취를 조사하고 살펴서 기록하였으나 자세하고도 현저한 것은 많지 않기에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서는 믿을 수는 없다. 드디어 조사한 것을 써서 아는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선성지』, 선성고래선진宣城古來先進)


 


{선성지}는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지리지]·{임인안}·{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명환록}·{용주사기}·{퇴계집}·{월천집}·{농암집}·{모재집(慕齊集)}·{풍기고적기}·{동방등과록}·{고사촬요} 등이며 당대 명사들의 글과 시를 다수 인용하여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또 {선성지}에는 예안지역의 명사였던 이현보·이황·조목·금난수·윤의정·임흘·금각 등의 글과 주세붕·류성룡의 글도 실려 있다. 그리고 예안 지역의 풍광을 읊은 시를 모아둔 17수, 지역 명사들의 시를 포함하여 45명에 의해 쓰여진 총 72수의 시가 실려 있다.


 


또한 권시중은 {선성지}에 개인 문집이나 여러 기록에 누락된 것도 수록하고 있는데, 그 예로 권시중 자신의 이야기인 [양로낭설발문(養老囊說跋文)]의 경우, 글을 지은 윤의정의 문집에는 내용도 다른 아주 짧은 발문이 실려 있음에 비하여 초고본 {선성지}에서는 아주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선성지}에 실린 조목의 [매지석고문(埋誌石告文)]·[문집고성문(文集告成文)]·[각천연대고문(刻天淵臺告文)]도 {월천집}에는 일부분이 생략된 채 실려 있을 뿐이다.


권시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도 여러 차례의 고증을 거쳐서 기록하였다. {선성지} 고적조에 {승람}·{용수사기}·{임인안}·{삼국사기}지리지 같은 문헌을 인용하고 나서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확인한 사실을 덧붙인 것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정확한 사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도 아주 조심성을 보이는데, 예안현의 최초 급제자로 알려진 이성(李筬)에 대한 기록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성(李筬)은 현달하지 아니하였을 때에 자신이 정병(正兵)이 되어 창을 잡고 대궐문을 지키면서도 항상 경전과 역사를 외워서 그곳으로 드나드는 벼슬아치들이 모두다 경이하게 여기면서도 불러서 그 근본을 물어보았다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재주가 뛰어남이 이와 같았다면 어찌 그가 정병이 되었을 리가 있겠는가. 짐짓 그런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아는 사람을 기다리겠노라. 후손들의 말에 묘는 현 서쪽 답곡에 있으나 그의 사손들도 들은 바가 없어서 이곳에 기록하지 못한다."({선성지}, 본거인물)


 
{선성지}의 사료적 가치로서 높이 평가할 부분은 역사 사실을 엄정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권시중은 {선성지}의 역관조(歷官條)에서 역대로 예안에 부임해 왔던 수령들 가운데 청렴했거나 고을을 잘 다스렸던 명관을 따로 정리하였다. 또 역대 수령 명단을 정리하면서 그 하단에 정치의 잘잘못을 평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사평(史評)에 해당하며 공자의 춘추필법을 견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포폄의 원칙을 견지한 그의 역사기술 한 장면을 보자.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기록을 펼쳐서 보며 차례로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아무개는 강직하고 분명하였으며, 또 아무개는 부끄러운 일을 했으며, 아무개는 평생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라고 하여 그들의 벼슬길이 비록 달랐다 하더라도 선과 악은 구별됨이 있었으니,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선성지』, 역관록서)


 


{선성지}를 대하다가 깨달은 진리는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가슴에만 묻고 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안을 생각할 때마다 4반세기를 지나도록 가슴앓이만 했을 뿐, 진정으로 내 고향 예안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즉, 조사하고 정리하는 노력도 없이 고향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 이제 정말 예안을 사랑해 보리라.[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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