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화산십가에 나타난 15세가 안동고을(글/이원걸)

15세기 후반 영남 사림파의 2세대 뇌계 유호인

이는 15세기 후반 영남사림파의 선두 주자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 뇌계 유호인(1445-1494)의 작품이다. 그의 행적은 {뇌계집}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갈천(葛川) 임훈(林薰 : 1500-1584)의 문집인 {갈천집}에 뇌계의 [행장]이 남아 있는데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이 자료와 주변 자료를 통해 간략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

유호인(兪好仁)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극기(克己), 호는 뇌계(　+雷溪)이다. 그는 1445년에 함양 고을에서 고상한 인품으로 칭송을 받아 온 부친 유음(兪蔭)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에게 기초 학문을 익혔으며, 당시 이곳 함양 군수로 부임해 온 김종직에게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김종직은 이곳 함양에서 어진 목민관의 소임을 다해 각종 민폐를 해결하고, 지방 유학의 진작과 유교 문화의 정착 및 제자 양성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와 사제지간의 인연은 이후 지속된다. 유호인은 매계(梅溪) 조위(曺偉 : 1454-1503)와 함께 김종직의 초기 제자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다.

유호인은 1462년(세조7)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1472년(성종3)의 대과를 거쳐 보승문정자·봉상시 부봉사의 관직을 거쳐 1476년(성종7)에는 성종의 배려로 사가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홍문관 수찬·거창 현감·전적·공조원외직을 역임하고, 1486년(성종17)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고 1488년(성종19)에는 모친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자청하여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이 당시, 성종은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그를 보내면서 시조를 지어 읊으며 군신간의 깊은 정을 표현하였다. 그후 그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합천 군수로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지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장수의 창계서원과 함양의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근검과 농심의 미학 담긴 [화산십가]

이 작품은 뇌계가 안동 지방 고을민들의 생활상을 중국 빈(　)나라 농민들의 월령가인 {시경}, [빈풍] 7월편의 내용을 빌어 읊은 시로, 그가 의성현령으로 부임 당시 창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 해 농사에 대한 의식 및 농가 행사 등을 월별로 읊은 시이다. 뇌계는 이 작품에서 연중 행해지는 농경 생활 모습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흉년에 대비하여 평소 근검절약하며 생업에 종사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서두에서 [화산십가](花山十歌)의 창작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안동은 척박한 땅으로 백성들은 가난하지만 풍속이 농업과 양잠에 힘쓴다. 이들은 절약하고 검소하며 흉년에 대비하는 것 역시 주도면밀해 타고을의 본보기가 된다. 이에 [수지반중손입립개신고](誰知盤中飡粒粒皆辛苦 : 밥상에 오른 밥알 한 알 한 알 모두가 농부들의 피와 땀의 결실임을 누가 알리오?)의 열 자로 운을 삼아 백성들이 근심하고 애쓰는 모습을 서술하여 {시경}의 [빈풍] 7월편의 뜻에 비긴다.

이는 {영가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영가지}에 의하면, 안동은 논보다 밭이 많으며, 토질은 콩·조·뽕나무·삼을 재배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안동 지역 및 인심에 대한 뇌계의 견해를 종합하면, 안동은 토질이 비교적 척박하지만 고을 백성들이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모범적 고을이라는 것이다. 또한 {택리지}에서도 안동은 흰모래와 단단한 토질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한양의 토질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안동은 퇴계와 서애의 유풍에 따라 백성들이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서 외진 마을에서도 글읽는 소리가 들리며, 가난한 사람들도 도덕과 의리를 중히 여긴다고 하였다. 이렇듯 안동 고을 백성들에 대한 선인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제 [화산십가]에 나타난 고을 주민들의 연중 생활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1480년대 안동 고을로 타임머신 여행을 떠난다.

태백산에 내린 눈이               太白山中雪
아침 햇살 받아 반짝이어라     陸離粲朝曦
봄 바람이 황지에 불자           春風入黃池
얼음 풀려 냇물 졸졸 흐르네    活活流水　
내 할 일 늦출 수 없으니          我事不可緩
때 맞춰 농사일 해야지           西疇須及時
이엉 엮고 새끼 꼬자는 시를     于茅索　詠
사람마다 알려야 겠네              歷歷當告誰(1)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찾아 왔다. 겨우내 태백산 가득히 내려 얼었던 눈은 봄바람이 찾아오자, 이내 녹아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에서부터 눈 녹은 물이 얼음장 밑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얼었던 대지도 봄 햇살을 받아 서서히 풀리며 봄 농사가 시작된다. 시인은 농부들에게 농한기에도 부지런히 새끼를 꼬아 이엉을 만들고, 지붕을 고쳐 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서두에서부터 농민들에게 부지런히 일하기를 권고하였다. 이 무렵, 봄비도 때에 맞게 내렸다.

간 밤 안동에 내린 비                花山昨夜雨
온 대지를 적셨구나                  一　沾公私
숲 건너 뻐꾸기 울면서              隔林布穀聲
밭갈이 늦었다 재촉하네            ?催却耕耘遲
소 몰고 새벽 일찍 나서라고      牛車戴月出
이웃 영감님 알려 주시네          急報隣翁知
항산을 힘써야 하리니              努力務恒産
편안히 누워 잘 때 아닐세         此非安臥時(2)

지난밤에 내린 비가 안동 고을을 적셨다. 숲 속에서는 뻐꾸기가 울면서 농부를 일깨워 밭갈이를 재촉한다. 시골 정서를 잘 보여주는 시적 소재이다. 그리고 마을 농사에 있어서 자문격인 노농(老農)이 이른 새벽부터 봄비에 맞추어 밭을 갈라고 분주히 알린다. 주민들은 새벽을 일깨우는 뻐꾸기와 영감의 고함으로 인해 늦잠을 잘 수 없다. 시인은 말미에서 주민들이 각자 생업에 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안동은 부업으로 양잠이 성행했다.

백 잠박 누에를 치려고              蠶絲一百箔
뽕나무 숲에는 인기척 들리네   處處呼林端
누에가 벌써 석 잠잤으니      　已三眠
어린 뽕나무 가지 다 베었네      伐盡柔條殘
마두랑에서 고사 올리고            共賽馬頭娘
빈둥거리며 놀지 마세나            愼勿學遊盤
여인들은 물레질 힘써         　   車勉女工
겨울철 옷 장만해야 한다네        卒歲衣裳單(3)

주민들이 잠박의 누에 먹이를 공급하려고 저마다 뽕 밭에 나와 뽕잎을 따느라 여기저기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벌써 누에가 석 잠을 잤기에 어린 뽕나무는 줄기까지 베어서 잠박에 올려야 한다. 이렇게 분주한 시절에 부질없는 놀이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권고도 빼놓지 않았다. 여인들은 부지런히 물레질을 하여 가족들의 겨울옷을 장만해야 한다. 아마 당시 여인들은 낮에는 농일에 열중하고 밤에는 잠을 참아 가며 실을 자아 옷감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이 시에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수고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렇게 근면한 농부에게 한 뙤기의 땅도 소중하기 마련이다.

뙤기 땅도 금쪽 같으니            寸土如寸金
부의 등급은 중중일세            厥賦猶中中
노는 땅 내버려두지 말지니      愼莫棄閑地
땅을 놀리면 흉년 든다네         地閑逢歲凶
곡식 안 심은 땅을 찾아            隨宜闕苗處
알뜰히 곡식을 심어                 須盡塡植功
부지런히 힘써야 추수하리니    力勤乃有獲
게으른 농부 일랑 되지 마오     汝勿爲惰農(4)

농토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농경 사회에서 농토는 생업의 기반이기에 한 치의 땅도 묵히거나 손실이 없도록 하자는 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부(賦)의 등급으로 보아, 안동의 토질이 그렇게 비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더욱 알뜰히 농토를 관리하고 부지런히 파종하여 수확하자는 것이다. 말미에서는 게으른 농부가 되지 말기를 당부하면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가 되자고 강조했다. 이렇게 부지런한 농부는 일상 생활에서도 근검 절약하게 된다.

새끼 꼬고 짜 망태기 만들면   　茅織作筐
질그릇 동이처럼 사용된다네       可以敵　盆
모두 밭 일 나가거들랑                擧家出南畝
메고 지고 다니다 잊지 마오         擔荷常不　
헌 짚신이랑 삭정이도         　　   兼　拙
모아서 밥 지을 땔감하세나          收以炊盤飡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말지니       物不可虛抛
자손들에게 당부해 두소서           說與諸子孫(5)

시폭 전면에 알뜰 살림이 강조되고 있다. 새끼를 꼬아 만든 망태기는 매우 실용적이다. 질그릇 동이처럼 쉽게 파손되지 않으며, 가볍고 용도 또한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를 소중히 간수하여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할 것이며, 버리는 짚신이나 삭정이를 주워 여기에 담아 오면, 훌륭한 불쏘시개가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러한 근검의 철학을 자손들도 답습하기를 강조한다. 일상의 근검 정신은 평소 흉년에 대비한 검약 생활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밭의 소출 얼마간 덜어               我田出若干
십년 양식 미리 헤아려               量分一年食
깊이 간직하고 아껴 써서            深藏且省費
배고픔 견디는 습관을 기르오    成性忍飢迫
겨울엔 나물도 먹거리 되니        冬時蔬爲粮
힘써 농사해야 배불리 먹으리      력農方乃粒
의도가 깊고도 장구하니              作意最深遠
당나라 풍속처럼 놀지 마오          瞿瞿擬唐俗(6)

시인은 매우 합리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평소 일년 작황에 따라 곡식을 일정하게 비축하여 십 년간의 양식을 준비해 두자는 것이다. 이를 깊이 감춰 두고 극심한 흉년이나 재해를 당했을 때를 대비하자는 발상이다. 그리고 중반부에 이르러 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산천에서 자생하거나 재배하는 농작물로 겨울 먹거리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 역시 현명한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묵나물, 무말랭이, 배추 시래기, 곶감 등은 이러한 겨울 먹거리의 일종이다. 당시 겨울철 먹거리로 도톨밤은 인기 있는 구황 식품이었다.

저 청량산 바라 보건대            瞻彼淸凉山
산에 도토리나무 무성하네       山中多橡木
올해도 작년처럼                     今年似去年
토실토실 열매 줍는 다오         離離實可拾
모두 지고 이고 돌아와서는      擧家負戴歸
곱게 빻아 독에 담아 두면     　屑甕中積
흉년 와도 주리지 않으리니      凶年豈殺余
조밥 대신 먹을 만 하다오        猶可代粟粒(7)

계절적으로 가을이다. 시인은 청량산을 지목하였다. 전 가족이 도토리를 줍기 위해 등산을 하였다. 이는 요즈음처럼 여가 선용이나 체력 증진을 위해 오르는 산행이 아니다. 겨울 한 철을 나기 위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도토리를 줍는 일은 곧 비상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다. 도토리를 주워 집에 와서는 이를 곱게 분말로 만든 뒤 단지에 보관해 두면, 겨우내 훌륭한 식량 대용품이 되어 까실까실한 조밥 대신 먹을 만하다고 하였다. 안동 고을은 어느덧 동지·섣달이 지나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였다.

매년 정월 대보름 밤이면         年年上元夜
변함없이 달맞이 한다오           候月眞不差
전처럼 모여 바라보는데           依前群望處
동네 노인네도 오셨다네           老翁一時皆
서로 보며 풍흉을 점치는데       相視占豊凶
농사 이야기로 시끌법적일세     農談喧里街
그저 세금이나 제 때 바치고      但願供租稅
배나 채우면 다행이라네           次及養殘骸(8)

정월 대보름날의 세시 풍속이 엿보인다. 당시, 풍속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 달의 명암 정도를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온 고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달을 구경하고 있다. 마을의 원로격인 노인들은 숱한 세월 동안 겪어 온 경험에 비추어 올해의 농사와 기상 변화 등에 대해 예견하였을 것이다. 당시 농업이 전적으로 자연 환경에 조건에 의존해야 했던 만큼 농민들은 자연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미에 소박한 농부의 정서가 담겨 있다. 농부는 올 해 농사에도 그다지 큰 희망을 걸지 않았다. 다만 부세나 제 때에 납부하고 부모와 처자식이 배고픔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평작만 되어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흉년이 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내내 떨쳐 버릴 수 없다.

흉년 대비 첫째 방도는                      荒政第一策
보리 메밀 깨 무거리일세                   麥　兼麻　
미곡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莫輕擲
굶어 죽는 신세 면한 다오                  可免溝壑身
마을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니              寄言同社子
배 주릴 걱정일랑 하지 마오               且勿憂艱辛
산 속의 소나무들이                           山中十八公
제 옷 벗어 우릴 살린 다오                  鮮衣活吾人(9)

흉년 대비책이 다시 강조된다. 보리, 메밀, 깨 등은 다른 작물과 번갈아 가며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이를테면,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벼를 이어 심고, 하절기 작물을 수확한 뒤에 메밀 등을 파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연중 수확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구황 식품으로도 요긴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뜰히 농사지어 얻은 곡식을 차마 한 톨이라도 허비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다. 시인은 최악의 흉년 대비책도 제시하였다. 7구의 십팔공(十八公)은 소나무송(松)자를 파자(破字)한 표현이다. 즉, 최악의 경우, 소나무 껍질이라도 벗겨 먹으며 연명은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근검 절약한 덕에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귀뚜라미 집안에서 우니               　　在我堂
타작 끝내고 풍년 경사 났네                西成慶多　
이 하루 즐거움에 겨워                       欲作一日歡
함께 술 마시고 춤춘다네                    爲酒共歌舞
이 기쁨이 큰 호강과 같아                   此意似太康
여러 어르신께 알려 드리니                  持以規諸父
옛 사람 지은 시에 의하면                   古人曾有詩
곡식 알알이 모두 피땀이라오               粒粒皆辛苦(10)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타작 마당도 거두고 풍년을 맞아 온 고을이 흥겹다. 마을 축제가 벌어졌다. 저마다 기쁨에 넘쳐 음식을 나누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가뭄과 홍수의 시련을 겪고 난 뒤의 풍요는 농부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시인의 경계는 흥겨운 잔치 마당에서도 연속된다. 옛 시인의 시를 들어 곡식 낟알이 모두 농부의 피땀 어린 결정체라는 것이다. 결국 뇌계는 부지런하고 검약한 농부의 땀이 이러한 풍요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뇌계는 땀 흘리며 근로하는 농부에게서 고귀한 삶의 미학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21세기 벽두의 안동 고을로 돌아 와 보니

이제 여장을 챙겨 그로부터 520년을 경과한 21세기의 안동으로 돌아와야 할 시점이다. 여행객이 여행을 통해 무언가 얻고 돌아와야 여행한 보람이 있다. 1480년대의 안동 고을 주민들은 태백산에 눈이 녹자, 새끼를 꼬고 이엉을 엮어 지붕을 고치며 일년 동안 가족이 아늑하게 살아갈 보금자리를 단장하였다(1). 철에 맞게 내리는 봄비에 뻐꾸기의 밭갈이 채근 속에 우리 농민들은 밭을 갈기에 여념이 없었다(2). 그들은 부업으로 누에치기에 열중하는가 하면 여인들은 밤늦도록 졸음을 참아 가며 실을 자아 가족들의 옷감을 장만하였다(3). 이처럼 부지런한 농민들은 한 치의 땅도 묵히지 않고 알뜰히 파종하며 망태기에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을 수거하여 이를 재활용하였다(4·5). 살림꾼인 이들은 겨울을 나기 위한 월동 식품 비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배추와 무우 시래기 건조 및 도토리 줍기 등으로 분주하였다(6·7). 그런 가운데 동지·섣달을 거쳐 정월 대보름을 맞아 달맞이 행사를 하며 온 고을민들이 풍년을 기원하였다(8). 그리고 흉년에 대비해 구황식물을 재배하고 알뜰살뜰 살림을 꾸리면서, 결국 풍년의 기쁨을 만끽하였다(9·10).

이 작품은 농촌에서 행해지는 일년 농사 절기에 따라 농민들이 근로하는 모습을 현장감 있게 표현하였다. 다만, (10)의 작품이 (7) 다음에 와야 순차적으로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배열한 것은 운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뇌계는 이 작품에서 이 부분이 가장 강조하는 사안이기에 이를 의도적으로 후반부에 배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 지방관의 [훈민·권농]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 당시 안동 고을의 근검하며 근로하는 농민들의 형상을 시로 형상화한 점에서 뇌계의 사실적인 안목이 돋보인다. 뇌계는 관념화된 충과 효의 논리를 이 작품에 비치지 않았다. 땀 흘리며 일하는 농민들의 소박한 정서와 미를 시폭에 층실히 그려내었다. 땀 흘리며 성실히 일하는 자의 모습은 퍽 아름답다. 뇌계에 의해 15세기 후반 안동 농민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이 시에 포착되었는 바, 이는 농민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작년 늦가을에 모임이 있어서 안동문화답사촌에 들린 적이 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느 분이 [우리는 음식과 먹거리 부분에 있어서, 단군 개국이래 최고의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세대]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분은 이내 말을 바꾸는 것이었다. [아니, 요순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린다]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극한 풍요 속에 궁핍과 절실을 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궁핍이니, 군색이니 하는 단어 자체의 수용에 매우 인색해 한다. 우리는 가끔 20세기초에서 중엽을 배경으로 하는 TV 드라마의 여러 가지 소품을 지켜보면서, 아주 먼 시대의 고전물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이는 지금부터 채 백년이 안 되는 시기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들이 묵묵히 살아 오셨던 생활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무감각해 있다.

뇌계가 바라 본 안동 고을 주민들의 절실한 구황식품이었던 도토리와 좁쌀은 요즈음 비만 방지와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의 건강 식품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애완용 조류 사육의 먹이 감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정부 공식 통계에 의하면, 남한에서 먹고 남은 음식물을 내버리는 것이 연간 8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작은 땅덩어리 한쪽에서는 여전히 굶주림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길거리 노숙자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을 보호하며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졌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하수구의 작은 생물들이 죽을까 봐 염려되어 설거지를 마친 허드렛물도 식혀서 내다 버렸다고 한다. 이는 비록 작은 배려이지만, 미물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이렇듯 자연은 그들의 생활 현장이며, 안식처이기에 집 하나를 건축할 때도 여러 가지 국면을 심사숙고해서 시행하였다. 특히, 누대나 정자는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건축하였기에, 누정은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도 여전히 그 품격을 지키고 있다. 이는 안동 지역에 산재한 누대나 정자를 답사해 보면,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도시나 새로운 터전을 건설하면서 상업성이나 편의성만을 앞세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니, 미래의 전망 등에 대해 배려하기에는 매우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내 새 터전을 만들려고 나무를 베어 내 새 둥지의 새를 몰아내고는, 내가 아파트 안에 갇힌 새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에너지를 절약하며 자원 재활용을 일찍부터 실천하였다. 우리는 자원 빈곤 국가이면서 에너지 소비와 외채부담율은 세계 정상급이다. 그러면서 명분 없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구호는 남발한다. 그러다 보니, 각종 공해와 폐단이 자연 발생되기 마련이다. 이 땅은 분명 우리 아들, 손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야 할 소중한 터전이다. 무분별한 기성 세대의 처신이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15세기 후반의 안동 고을의 농민들은 땀 흘리며 성실히 일하는 자가 보상을 받는다는 소박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예기치 못한 자연 재해로 인해 그 보상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굳게 신념 하였다. 검약과 절제, 그리고 땀 흘리며 일하는 자의 성실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결코 병들지 않는 법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