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길 반듯하게 걸어온 민선안동읍장 이상년옹.(글/이미홍-객원기자)
사람이 가는 길에는 굽이굽이 여러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어떤 사람은 대로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좁고 한적한 길을 택한다. 한 발 한 발 내딛어 보며 평탄하고 안정된 길을 택하여 가는 이도 있고 무턱대고 앞만 보고 가다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이도 있다. 그리고 게 중에는 지난하고 험난한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도 있다. 사람도 가지가지, 길도 갈래갈래 하여(何如) 세상은 어울려서 돌아가는 지도 모른다.
안동의 민선읍장을 지낸 이상년(88) 옹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참 어려운 길을 잘도 걸어 왔구나, 그것도 없는 길을 새로 닦아가면서 걸어가는 사람이구나 하고 새삼 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서슬퍼런 시대, 긴박했던 안동시 승격 사연
“내가 안동민선읍장을 했던 때가 마흔 둘이었을 때야. 1963년도였는데, 몇 달 하다가 그만둬 버렸어. 그 이유를 말하자면 그때 우리가 처했던 시대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라는 말로 그는 그렇게 ‘시절이 하 수상하니~’ 로 시작되는 당시 이야기를 어제 일인 듯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 시절이었다.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온 나라가 시끄러웠고, 지성인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때 거리로 몰려나왔던 수많은 학생들 중에 마산상고에 다니던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시위 주동자로 조사를 받던 김주열 학생이 마산 앞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 전국이 들끓었다. 급기야 4.19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했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서슬 퍼런 군정이 실시되었다.
다음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 군정이 3년간 지속되었다. 그 군정 하에서 그가 안동민선읍장을 하고 있을 때, 안동이 시로 승격되는 심사가 있었다. 그때 시 승격 조건이 인구가 5만 이상이어야 하고, 시의 형태가 도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안동이 승격 조건에 해당이 되어 시 승격 신청을 했다. 그 당시 시로 승격된 곳이 안동시, 천안시, 속초시 세 곳이었는데, 천안과 속초는 천안시, 속초시로 그대로 명칭이 내려왔는데 안동시만 명칭이 ‘신 안동시’로 내려왔다. 대신 군 지역을 묶어 ‘안동군’으로 내려왔다. ‘신 안동시’라는 명칭을 받자마자 그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건 도저히 안동 시민들 생활 감정에 맞지 않는 거다. 평생을 안동시내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안동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별안간 ‘신 안동 시민’으로 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안동’이라는 고유한 내 이름을 두고 왜 딴 이름을 써야 하는가 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읍장으로서 내가 앞장서서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관철했지.”
당시 사람들 중에는 명칭이야 어떠하든 시로 승격만 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난 그는 생각이 달랐다. ‘안동’이라는 이름이 가진 정체성과 상징성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훗날 사람들이 ‘안동읍장이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앉아서 그 명칭을 그대로 받았냐’고 비판을 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석 달 여를 끈질기게 반대 여론을 고수하며 시민들과 함께 ‘안동시’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시민대표들을 위촉해서 읍장실에 모여 대책을 마련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12월 25일 밤에 각동 동장들을 소집했다. “당시 안동읍 관내에 36개동이 있었는데 동장들을 모아 놓고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주민들을 읍사무소 광장으로 모이도록 하기로 했어. 그 자리에서 ‘안동시’ 명칭에 관한 의견수렴도 하고 행동 결의도 할 거라고 말이야. 다들 그러기로 찬성을 하고 헤어졌지. 그리고 그날 사전에 문화원 총무국장을 시켜서 지프차에 스피커를 달아서 시내를 돌면서 10시에 안동시 명칭에 관해서 무슨 발표가 있을 거라고 방송을 하게 했어.”
다음 날 아침 읍사무소 광장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3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날 주민들의 뜻이 ‘안동시’ 라는 이름을 고수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안동읍장의 자격으로 ‘내가 앞장설 것이니까 따르라’고 주민들을 이끌고 대열의 선봉에 섰다.
안동시장 안 해도 좋으니 ‘신 안동’이라 마소
당시 안동 읍내에는 걱정나무라고 불리는 회나무가 있었다. 걱정나무 옆으로 법원이고 검찰이고 그 앞에는 경찰서고 군청이고, 또 그 옆으로는 세무서고, 전매서까지 대부분의 관공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회나무 아래에 바위가 있었는데, 관공서에 불려온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 와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우며 걱정들을 한다고 해서 걱정나무라고 불렸다. 나무 해 땐다고 군청 산림과에 불려왔다, 경찰서에 불려왔다, 밀조주 담가 먹다가 세무서에 불려왔다, 엽연초 피우다 전매서에 불려왔다, 사연들도 가지각색인 이들이 소환을 받고 불려 와서는 벌금도 내고 체형까지 받고 하던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던 나무였다.
거리 행진을 하며 그 걱정나무 앞으로 나갔을 때, 경찰들7~80여명이 집총을 하고서 방어막을 치고 있었다. 경찰서장이 읍장인 그를 끌어당겨 서장실로 데려가 설득을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신이 시장이 될 터인데 왜 쓸데없는 일을 크게 만들어 고집을 피우시오?’ 하며 말렸다.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그 당시 경북도지사 부부도 찾아오고, 미 문화원장을 역임했던 이도 말리고 여기저기서 회유의 손길들이 많았다. 그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시장 안 해도 좋다.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라도 우리 아들이 안동에 살 텐데 두고두고 안동 사람들이 ‘이상년이가 안동이라는 이름을 내버리고 신 안동이라는 이름을 덥석 받았다’ 고 욕을 하는 건 못 참는다.”
그가 경찰서장에게 붙들려 실랑이를 벌리는 사이 밖에서는 주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를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더러 다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가 경찰서장실에 앉아 있는 사이, 그의 부탁을 받고 마이크를 들고 안내방송을 했던 문화원 사무국장이 선동죄로 잡혀 들어갔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내가 시킨 거다. 잘못이 있으면 내가 벌을 받겠다. 오늘 중으로 그 사람 풀어주지 않으면 문제가 더 커질 거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다음날 ‘안동시’, ‘안동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내려왔다. 1963년, 그렇게 안동은 석 달 여의 소란을 뒤로 하고 ‘안동시’로 승격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서운 시절이었어.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나한테는 별다른 압력이나 징계조치 같은 게 없었어.”
그만큼 그때 그 일만큼은 안동 사람들의 민심이 이상년 그에게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시 승격이 결정되고 그는 스스로 읍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시장 자리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만약 군정에서 시장을 임명하지 않고 선거를 했다면 그는 아마도 시장 선거에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임명제로 바뀐 지방단체장의 선거가 자치제로 치러지기까지는 80년대까지 무려 20여년의 세월이 걸렸으므로 그의 시장 선거 출마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요즘은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국민들의 정치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지만, 그때는 그렇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들이 동원되고 그랬어. 이제는 지방자치제도 잘 되고 있고 우리나라도 민주주의가 많이 정착했다고 봐. 단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정쟁만 일삼는 게 문제야. 국민들이 바보가 아니거든.”
1919년 만세둥이, 안동 곳곳에 그의 자취 남아
이상년 옹의 고향은 의성 비안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태어난 만세둥이다. 일찍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스물이 갓 넘은 젊은 나이로 사업을 하고 있던 차에 6.25가 일어나서 피난을 왔다가 정착한 곳이 안동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일 때였다. 안동에 정착해서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사업들을 추진하며 안동에 기반을 쌓아나갔고 안동 발전의 초석이 되어 60년을 안동사람으로 살아왔다.
읍장이 되기 전에 그는 안동 읍의원을 지냈다. 선거에 나와 그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읍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동아일보에 전국 최연소 의원으로 소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또 초대안동문화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모두 그의 나이 마흔 전후의 일이었다.
안동이 시로 승격되고,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안동이 다방면에서 새롭게 태동하는 그 중심에 젊고 혈기 왕성했던 그가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을 했다. 읍장을 그만둔 후에 그는 안동 라이온스클럽 창단에 힘을 쏟았다. 안동라이온스클럽 창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것을 기점으로 그는 영주를 비롯해서 봉화, 풍기, 영양, 청송, 진보, 영덕까지 라이온스클럽을 창단하는 데 앞장을 서서 경북 북부지역의 라이온스 클럽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의사들을 라이온스 클럽에 적극적으로 가입을 시켰다. 무의촌 진료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외과, 내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등 과별로 가입을 시켜서 군, 읍면 지역을 다니며 무의촌진료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 기세로 라이온스클럽중앙회 부총재까지 역임했다. 안동상공회의소장, 안동공고재단이사장도 역임했고, 국제인권옹호위원회 안동지부장도 지냈다. 무슨 일이건 시작하면 무서운 추진력으로 끝을 보고야 마는 그가 걸어온 길들이었다.
온 평생 바친 삶의 터전, 이젠 다음세대 몫
그는 일찍부터 사람은 넓은 곳에 나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애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집안에 일하던 아주머니를 딸려 서울에 집을 얻어 전학을 시켰다. 이듬해에는 하나 남은 딸애마저 서울로 보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도 자식한테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부모한테 자식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서울서 공부를 하던 아들이 건강이 나빠져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을 대학 진학을 포기시키고 요양을 위해서 안동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부모 욕심에 자식을 골병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향에서 몇 년간 요양을 하면서 아들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공부할 적기를 놓쳐버린 셈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대신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목장이었다. 그는 아들을 생각하며 목장을 일구었다. 그 아들이 지금 아버지가 개간을 시작했던 터에서 삼천 평 목장을 운영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둘째인 딸은 서울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신랑 될 사람을 만나서 함께 유학을 가서 지금은 남편과 함께 호주에서 대학교수로 있다. 처음에 그는 유학을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식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해 전인가 TV에서 호주 야외공연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딸과 사위가 호주에서 성공한 교민으로 소개가 되었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한테 희망을 꿈꿀 수는 있지만 자식들의 고삐를 잡고 그 길을 대신 걸어갈 수는 없다. 어떤 길을 어떻게 살아내는가는 자식들 각자의 몫인 것이다.
지난 날 노심초사하며 남매를 키우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길어지자, 사랑방에서 취재를 온다 하더니만 참말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풀어놓게 되었다며,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사랑과 초당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집안에 손님이 오면 거기에 모셔서 접빈도 하고 시사 토론도 하고 그러는 데가 사랑방이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초당이라는 데는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던 머슴꾼이 있었어. 일 년 세공을 주고 사람을 들여서 일을 시키자면 방을 하나 줘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 머슴방이 있는 아래채에는 소여물을 끓이는 솥을 하나 걸어 놓고 군불을 뜨끈뜨끈하게 때기 때문에 동네 일꾼들이나 농군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라. 그래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짚공예도 만들고 새끼도 꼬고, 고담 소설들도 읽고 그러다 보면 닭이 울기도 하고 그랬지. 그러다 보면 주인집에서 새참도 내주고, 인정이 있던 시절이었지.” 그때 일꾼들 사이에 끼어서 밤을 새가며 들었던 고담소설들 몇 자락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 타고난 이야기꾼의 기질이 엿보인다. 한때 읍 광장에서 주민들을 선동했던(?) 말솜씨이니.
공과 사 가릴 것 없이 뚝심하나로 헤쳐온 삶
그가 목장을 하기 위해 이곳 삼계에 들어온 지 30여년이 되었다. 처음 아무 것도 없는 야산 중턱에 목장 터를 잡고 살기 위해 들어올 때 식구들은 다들 반대했다. 주진교가 놓이기 전이었으니 안동서 와룡까지도 아스팔트가 깔리기 전이었다. 하물며 와룡서 삼계까지는 울퉁불퉁 비포장은 물론이고 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올까 말까였던 데다가 길에서 1,200미터나 떨어진 목장은 변변한 길도 없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으니 그 길을 오르내리는 식구들의 고충까지 그 불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먹고 살 게 없는 것도 아닌데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는 아내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이번에는 죽기 살기로 목장개발에 매달렸다. 물론 큰 길에서 목장까지 없던 길도 만들어냈다. 지금은 자비 반, 관의 도움 반으로 목장까지 포장이 되어 있다.
그가 삼계마을에 들어와서 목장을 일구고 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진교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거절을 했지만 오랫동안 숙원사업을 준비해온 지역 주민들은 막무가내였다. 이상년이라는 사람이 거쳐 온 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없이 또 총대를 멨다. 조직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서명을 받고, 진정도 하고, 건설교통부 장관을 만나러 가고, 그렇게 일은 진행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주진교가 놓여졌다. 아마도 그가 없었어도 언젠가는 그 다리는 놓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다리를 조금 더 앞당겨 놓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처음 들어올 때 그렇게 큰 성공을 기대하고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목장을 시작할 무렵 88올림픽 유치가 결정되었다. 그 즈음 정부에서는 88올림픽 때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테고 자연 우유 소비가 늘어날 거라는 예상을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젖소 축산농가가 드물었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젖소 축산농가 지원사업을 계획했다. 도에서 축산과장을 하고 있던 이가 그에게 젖소 목장을 해 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크게 성공시켜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지,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지 하는 생각에 잠을 못 자. 잠을 안 자며 생각을 하고 궁리를 해서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성공할 때까지 앞만 보고 가는 거야. 내 안에 그런 기질이 있는 거 같애. 도 축산과장이 젖소목장을 권유하면서 나한테 그랬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상년 당신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그는 정부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목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일을 크게 벌이고야 마는 그였다. 결국 그는 목장을 일구는 데 성공을 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목장을 삼천 평 규모의 대목장으로 일으켜 세웠고 4~5만평에 이르는 초지를 조성해 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목장 사업에서 손을 떼고 아들에게 목장을 맡겼다. 목장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들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 목장을 더욱더 튼실하게 키우고 지켜나가는 것은 이제 아들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젖소 사육 농가가 늘어 수익성이 줄어들면서 젖소 사육에서 한우 사육으로 방향을 전환한 아들은 목장을 운영해 나가는 한편으로 그동안 조성해 놓은 넓은 초지를 농지로 개척해서 약초를 비롯해서 무, 배추 같은 고랭지 채소 농사도 짓고 있다. 이 목장에서 와룡에 있는 중학교까지 마친 손자와 손녀는 안동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어 지금은 안동시내에 집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고방진 자기건사로 후회 없는 삶 마무리할 터
그는 후배들에게 일찍부터 운전면허를 따도록 독려를 했다. 앞으로는 운전이 필수라고 몇 달치 강습비를 대납해 가면서까지 등록을 시켜 면허를 따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음주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요즘 그는 차마비(교통비)를 많이 지출한다. 출타가 있는 날이면 택시를 호출해서 행차를 한다. 만나면 자연 술이 들어가는 날이 많기도 하거니와 늙어가면서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소위 체면유지 차원에서이기도 하다. 허세가 아니라 사람은 남 앞에 허술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런 연유로 그의 오른쪽 호주머니에는 단골 택시기사 명함이 항상 들어있다. 이런저런 모임으로 안동까지 출타를 하기도 하고, 예안향교 원로위원회장을 맡고 있어 향교 행사나 원로위원들 모임에 나가는 걸로 소일을 하다 보니 일주일에 두어 번은 나가는 꼴이니 교통비 지출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전에 예안면장으로 있던 이가 그에게 안동 용상동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고 인사를 왔을 때, 용상동 인구가 예안면 전체 인구보다 많으니 자네가 용상군수라고 축하해줬지만, 그는 구석진 산 속 골짜기의 목장 생활이 좋다. 일에 매달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목장 일에서 손을 뗀 이후로 일에는 관여를 안 한다. 운동 삼아 아침저녁으로 목장에서부터 다시 1,500미터를 올라가서 초지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내려오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15년 전에 부인을 먼저 보내고, 간혹 적적한 저녁에는 술 한 잔을 걸치기도 하고, 스포츠마니아라 운동경기가 있는 날이면 텔레비전 앞에 지키고 앉아있기도 한다. 지대가 높아서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는 목장에서, 생존 희망 연령이 구십이라는 여든여덟 살의 이상년 옹은 오늘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처럼 정정하게 살고 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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