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희망을 부르는 가인. 라이브스타 권용욱씨(글/천남희-주부,사진/박영대-동아일보 기자)

텔레비전 막간을 채우며 노래하던 소년
1970년대 초 안동시 남후면 상하동 아틈실, 고된 들일을 마친 동네 어르신들이 저녁이면 한 집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한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뉴스 시간이 있었고 라디오 뉴스에 더 익숙해 있던 그네들은 전기세도 아낄 겸 다음 드라마 시작시간까지 텔레비전을 끄고 지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때 한 어린소년이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를 했고, 제법 유행가 흉내를 잘 내는 그 꼬마에게 공짜 텔레비전을 보는 미안함을 보태어 약간의 용돈에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꼬마는 노래 후에 받는 용돈이 칭찬이 즐거워 날마다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를 했고 그 자신감으로 시골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여기저기 나가며 노래를 좋아 하게 되었다.
라이브 가수 권용욱(39)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동화 같은 그 이야기를 듣자 70년대 우리나라에 흑백텔레비전이 막 보급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엔 텔레비전이 동네 이장집이나 경제적으로 조금 넉넉한 집에서나 한 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드라마며 레슬링을 보기위해 동네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 다니곤 했었다.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집은 둘째 형이 ‘대한전선’에 다녀서 시골마을에 한 대 있을까 말까했던 텔레비전 구입을 좀 일찍 한 것이다. 그의 노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연히 잡게 된 통기타, 운명이 된 가수생활
현재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옛 속담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좋아했을 뿐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래보다는 기계를 만지고 조립하는 것을 더 좋아해서 안동농림고등학교(현재 안동생명과학고) 기계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악대부로 들어가 트럼펫을 배우면서부터 그와 음악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 같다. 3학년 때 악대부 악장까지 지냈지만 그는 또다시 부산에 있는 경남정보대학 전자과에 입학했다. 입학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질긴 인연의 끈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싱어롱’이라는 서클에서 트럼펫 전공자를 모집한 것이다.
“트럼펫 전공자를 뽑기에 얼른 신청했어요. 그런데 악기를 개인이 직접 구입해야 한다고 그러기에 시골에서 내려와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죠. 그랬더니 통기타를 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알겠습니다하고 기타를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노래만 불렀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다방에서 DJ 일을 하기도하고 막 생겨나던 라이브 호프집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부산에서 통기타 하나로 시작한 가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부모님들이 음악을 좋아하셨고 큰 형이 고등학교 때 트럼본을 불고 작곡을 전공한 배경 때문인지 가족들이 별 반대는 안했지만 처음 라이브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는 많은 걱정을 하셨다. 그래서 라이브 카페에 두 분을 모셔 놓고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드려 안심을 시켰다 한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가수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생계에도 별문제가 없어지자 약간의 자만심도 생기고 자꾸만 안주하려고 하는 나태한 마음이 들더란다. 그러면서 약간의 욕심이 생겼다. 좀 더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96년 서울행을 결심하고 올라와 자리 잡은 곳이 하남시의 미사리 카페촌이다.
“그때만 해도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가 3-4개정도만 있었어요. 하남시에 살면서 음악 하는 분들과 합숙하며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지금 나가고 있는 벤허가 오픈 할 때부터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까지 사장님만 3번 바뀌었네요.”


대중음악에 타협치 않는 영혼의 가수 되고파
영혼으로 노래하는 가수, 강산에 안치환에 이은 5세대 포크가수, 故 김광석의 서정성과 일본 국민가수 나가부치의 열정을 가진 가수, 호소력 짙은 가창력과 창법으로 온몸으로 노래하는 가수, 등 그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다양하지만 정작 그는 진실 되게 거짓 없이 노래를 알고 부르는 가수로 기억되길 원한다. 
“대중음악의 추세에 타협하지 않으며 저만의 색깔을 간직한 순수한 가수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노래만 불렀지요. 그런데 요즘 미사리나 다른 라이브 카페에도 MR(녹음연주)에 맞춘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으로  유명 가수들이 들어와 우리 같은 무명가수 들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힘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요즈음엔 나를 좀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죠. 콘서트도 열고 라디오 방송에도 여기저기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 1집 <희망(HOPE)>을 낸 후 2004년 고단한 현실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내용이 담긴 2집 <날개>를, 지난해에 <사랑 그리고 이별>이라는 제목의 3집 앨범을 낸 후 대학로에서 충무로에서 콘서트를 열며 자신을 알리기 위한 날개 짓을 열심히 하고 있다. 가창력을 인정받아 지난 2002년에는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 ‘희망’을 <오버 더 레인보우>에 ‘그대위해’ 등의 삽입곡도 불렀다. 현재 그는 인천의 ‘소나무 향기’, 안양의 ‘아리조나’, 미사리 ‘벤허’ 등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경기, 부산, 인천, 안동 등 라디오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도 고정출연 하고 있다. 지난 12월 8일에는 안동의 영남방송 음악프로그램에도 출연 하였고 지금은 서울 케이블방송인 화진 방송에서 ‘권용욱...歌人’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녹화중이다. 늘 방송과 여러 가지 콘서트와 라이브 카페 출연 등으로 인해 그의 고향 나들이는 쉽지가 않은 듯 했다.




“사투리는 안 남았지만 고향사랑만은 남았죠”
“안동은 자주 가지만 고향 가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는 거의 매일 전화로 얘기하니까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은 많이 변했겠죠. 안동은 늘 제 가슴에 맑은 아침햇살과 깨끗한 공기로 남아 있어요.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 가슴 같은 푸근한 곳이죠. 풍산 장을 보러 산을 넘어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요. 방송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지만 서안동 나들목을 빠져 나갈 때의 푸근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사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7~8년 전이다. 커다란 눈과 서글서글한 이목구비에 그 어떤 곳에서도 ‘안동’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방송용 말투를 사용해서 안동 사투리나 억양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열정적으로 노래 잘하는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로만 알고 지냈다. 그런 그가 안동인임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쯤으로 미사리 벤허 사장이 안동사람으로 바뀌고부터이다. 지금이야 동문회도 나가고 방송이나 모임을 통해 안동사람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 역시도 그때까지 고향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저 노래로만 팬들과 만나고 얘기 했을 뿐…….


라이브 카페에서 1시간동안 그는 쉼 없이 거의 노래만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멘트 시간이 아까워요. 그 시간에 노래를 한곡이라도 더 부르고 싶어 그냥 노래만 하는 겁니다. 관객들이 모두 저만 바라보고 있는데 노래 말고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저보고 말을 할 줄 모르는 가수라고도 하죠. 사실 노래는 시키면 잘 하는데 말은 시키면 힘들어요.”
벤허 라이브 카페에서 종종 보았던 그는 정말 노래만 했다. 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은 깊고 신명나는 소리로, 때로는 가슴 미어지는 듯한 애절한 목소리로, 더러는 감미로운 하모니카로. 관객들을 흡입하듯 1시간동안 10여곡을 줄기차게 부르곤 했다. 마치 그날이 그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몇 년을 지켜봐도 늘 그 열심으로  그 자리에 서서 노래만 불렀다.


“오늘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관객들도 진실 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요. 힘들지만 관객들이 저를 보고 있을 때 저는 그 기(氣)를  모두 받습니다. 노래를 하면서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저를 보고 있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 정말 가수로서의 참된 행복을 느끼죠. 그 힘으로 오늘도 무대에 오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힘이 들지만 삶은 모든 것이 연습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매일 같은 노래를 불러도 뭔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며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렇게 제 색깔을 나름대로 만들어 나가는 거죠. 음악을 놓아 버리면, 노래를 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아요.”


말을 잘 못한다더니 참 잘한다고 농을 했더니 고향 사람을 만나 마음이 편해서 그렇단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무척 개구쟁이였다. 숨을 곳이 지천이라 단골놀이였던 술래잡기와 겨울 도랑이 얼었을 때 탔던 외발 썰매는 지금 생각해도 신나는 놀이였다. 친구들과 밤에 윷놀이를 한 후 무생채와 김치를 몰래 가져와 먹었던 비빔밥 맛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고등학교 때 6킬로미터 떨어진 과수원에 비료포대 들고 가서 서리해온 자두 맛을 그리워하며 과수원 주인이 읽으면 큰일 난다며 머쓱해 하기도 했다. 그가 중학교 다닐 무렵에 프로야구가 막 시작되었는데 동네 친구들과 소먹이를 위해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 참 열심히도 야구를 했었다. 마을 뒷산에 무덤이 많았는데 그 평지가 그들에겐 좋은 놀이터였던 것이다. 공으로 하는 운동을 모두 좋아 하는데 아마 그때의 놀이 영향이 아닌가 싶다.


현재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살고 있다.  전원주택이라 봄이면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 손수 겉절이를 만들어 먹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된장찌개와 함께 먹는 겉절이야 말로 고향음식이 아니겠냐며 반문한다. 그의 인터넷 카페에서 요리가 취미로 되어있기에 특별한 요리솜씨를 기대하고 했던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먹거리만은 안동과 함께 하며 향수를 달래고 있는 듯하다.




HOPE IN HOPE 언제나 희망을 노래하렵니다.
지난 12월 7일에는 그의 팬클럽 HOPE IN HOPE 송년회가 천호동에서 있었다. 팬클럽은2002년에 시작해 현재 1,2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가 추구하는 순수하고 생명력 있는 음악이 좋아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그런지, 회원들도 그저 수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그 역시도 그의 팬클럽회원을 가족이라 표현하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가족들과 여행가서 공연을 해 보려고 추진 중입니다. 정말 우리 팬들은 가족적인 분위기입니다. 모임에도 가족이 함께 참석할 때가 많아요. 또 콘서트를 많이 해 팬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요. 제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싶은데 라이브 카페 무대에서는 그게 잘 안되거든요”
그가 텔레비전이나 언론매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이다 보니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 보다는 관객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때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본인 스스로 열심히 해 왔다는 자부심만 있을 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며 오히려 관객들이나 팬들의 사랑으로 행복하다며 웃는다.
“가지고 있는 종교는 없지만 노래 전도사나 노래 치료사가 되고 싶어요. 힘들고 어려울 때 제 노래를 듣고 위로를 받는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실제로 죽음을 생각했던 이가 제 노래를 들고 희망을 찾아 팬클럽 회원이 되신 분도 있었거든요. 행복이라는 것이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풀면 그 만큼 내게 채워지는 행복의 양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영혼이 티 없이 맑아 때 묻지 않은 소년 같다는 팬클럽 운영자의 말처럼, 명성이나 인기보다는 노래 그 자체를 사랑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권용욱씨. 통기타 하나로 외로운 길을 고집스레 걸어온 그 발자취의 순수함이 계속되어 포크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진정한 안동의 소리꾼이길 그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기대 해 본다.


"나는 소리꾼이다.
무대 위에서 죽을 듯이 노래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또 다시 무대 위에
오르면 굿판처럼 신명이 난다.
노래하며 죽고 싶다. 단 한사람이라도
내 노래에 담긴 마음을 읽어 준다면
나는 진정 행복한 소리꾼이다."
- 3집 수록 곡 <인생> 뮤직비디오에서 -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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