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가이드(글/김종규-안동병원 진단검사의학과장)

안동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두 가지가 하회마을 앞 강변 백사장에서 고성방가하면서 술 마시는 것과 영호루 위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놀아보는 것인데 얼마 전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다.


술친구를 위한 일일 주말가이드
1년에 한번정도 안동을 찾는 친구가 있다. 주목적은 나랑 술 마시러 오는 거다. 지난해도 초가을에 왔고 올해에도 비슷한 시기에 왔다. 물론 지난해 왔던 술 좋아하는 후배도 같이 왔다. 전공분야가 같고, 같은 해 시험을 쳐서 같이 자격증을 받은 후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입사해 7년을 같이 일한 사이다. 서울의 모 국립대학을 나온 그 친구는 서울에서 근무하고 대구의 모 국립대학을 나온 나는 대구에서 근무를 했다. 퇴사하기 직전에는 내가 서울로 가서 그 친구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혹자는 그 친구가 같이 술 마실 사람이 필요해 날 불러올리지 않았나하는 의혹을 품기도 했다.


서울에서 같이 근무하기 전, 직장 내에서는 서로 말을 높이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네가 결재한 서류를 내가 손 좀 봐도 되겠냐?? 라고 묻기에 ?괜찮다. 당연히 그래야지.?했는데 이게 함정이었다. 가보니 그 친구는 결재 올라오면 뜯어고치는데 선수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몇 차례나 서류를 다시 올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돈을 잘 모으는 것은 별개인 모양이다. 이 친구도 돈 모으는 데는 영 아니다. 그 나이에 재산이래야 아파트 하나가 다인데 그 아파트도 하필이면 서울에서도 가격이 가장 오르지 않는 지역의 아파트다. 내가 서울로 전근 가던 해 그동안 거금 천만 원을 모아두었으니 필요하면 빌려 쓰라고 목에 힘을 준 일이 있었다. 이번에 그 돈 잘 굴리고 있냐고 물었더니 다 쓰고 빚이 천만 원이란다. 연말정산 표를 볼 때마다 자기 생각보다 연봉이 훨씬 많게 적혀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그만큼 받고 있지 않는 것 같다나 어쨌다나.


이번에 오기 전 “내가 갈 때마다 네가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이번엔 품빠이하자.” 그러더니 결국 가장 큰돈인 민박집 숙식비를 자기가 계산해 버린다. 같이 온 후배도 역시 그 친구랑 같은 대학을 나왔는데 같은 지역의 아파트에 살고 별로 돈이 붙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늘 같이 붙어 다니니 돈 모으는 쪽으로 머리를 쓸 일이 없는 모양이다.
혹자는 의사가 돈을 못 벌면 제대로 인술을 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며 우리나라에 그런 의사가 많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인술을 펴는 것 같지는 않고, 나가는 돈이 많아 그런 것 같다. (미안하구나, 친구야)


일정은 느긋하게 그러나 나름대로 꼼꼼하게
올해는 구차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종택 한곳을 정해 아예 들어앉아 마시자고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지례예술촌은 너무 멀어서 곤란하겠다 싶어 농암종택에 연락했더니 방이 없단다. 다음으로 하회마을 민박집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용한 민박집에 예약을 했다. 여기서‘조용한'은 상호를 의미한다. 이 집에 묵을 때에는 반드시 사랑채 마루 옆의 방 두 개 중 한 개를 예약해야 한다.


친구가 오면 임청각을 필수코스로 하되 두 가지 코스를 제시하여 선택하게 할 생각이었다. 한 코스는 점심식사 - 임청각 - 닭실마을 혹은 주실마을 - 저녁식사 - 하회마을 강변에서 음주 및 고성방가. 이렇게 제시하고 한 코스는 아예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내는 코스로 임청각 - 영호루에서 낮술 - 시내 전통 대폿집 - 저녁식사 - 하회마을 앞 강변에서 고성방가. 친구는 처음엔 둘째 코스에 관심을 보이더니 아무래도 술만 먹고 가기는 좀 뭣했는지 닭실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결국 같이 온 후배인 고선생이 도산서원을 보지 못했으므로 점심식사 - 임청각 - 도산서원 - 닭실마을(현재 청암정 수리 중) - 하회마을 민박집에서 찜닭 - 강변에서 새벽 한시까지 음주 및 고성방가 - 다음날 11시 출발 - 병산서원 - 시내로 이동해서 아점 - 영호루에서 낮술 - 해산. 이런 코스를 밟게 되었다.




부용대 아래서 부른 진주난봉가
세 사람 모두 모으는 데는 소질이 없지만 아낄 수 있는 방법에는 일가견이 있다. 막걸리를 마시기로 하였지만 민박집에서는 비쌀 터이니 반주만 하고 밤에 마실 술은 미리 사서 차에 싣고 가기로 했다.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막걸리를 사러 들어가니 이동막걸리만 있는데 가격이 좀 비쌌다. 이 친구가 편의점은 비싸다며 그래도 이왕 들어온 것 그냥 나가기도 뭣하니 두 병만 사자고 한다. 막걸리 두 병을 사고 담배야 편의점도 같은 가격이고 하니 세 갑을 샀다. 그리고 다시 슈퍼로 가서 안동막걸리 다섯 병과 안주거리를 더 샀다.
민박집에서 큰 PET 병에 든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 그만 마시려고 하니 친구의 비상한 머리가 돌아간다. 김치 안주를 얻어가려면 그 집 막걸리는 들고 나가야 하고 그러려면 한 병 더 시켜야 한다나. 그래서 들고 나갈 용도로 한 병을 더 시켰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우리 사정을 아는지 아예 김치를 새지 않게 플라스틱 통에 담아준다.


제법 큰 병에 든 이동막걸리 두 병은 비상용으로 아껴두고 민박집에서 받은 막걸리 한 병과 안동막걸리 다섯 병을 들고 강변에 나가 자리를 펴고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은하수가 흐르고 옆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분위기 최고의 술자리다. 남자만 셋이라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뭐 물 좋고 정자 좋은 명당이 그리 흔한가.
몇 순배가 돌고 나의 진주난봉가를 시작으로 고성방가가 시작되었다. 대학시절에 부르던 노래 중 아는 노래란 노래는 모두 끄집어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엔 조금 추웠지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추위도 잊었다. 세 사람 모두 노래방에서는 거의 부르지 않는, 아니 부를 수 없는 음치들이다. 그래도 부용대의 메아리를 반주 삼아 부르는 노래의 맛은 노래방 노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술이 떨어지도록 취하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비상용 술을 차에 남겨두기를 잘했다. 나머지 두 병은 따뜻한 방에 들어가 마시기로 했다. 그래야 온기와 함께 취기가 오르고 잠도 잘 올 것이므로. 방에서 이동막걸리 두병을 마시고 새벽 세시쯤에야 술자리를 마쳤다.


 


“에~ 고가 데키마스까?”
민박집에 들어갈 때 우리 앞에 중년부부가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저녁식사 후 산책을 하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따라 들어갔는데 일본인 부부다. 남자손님이 주인 할머니와 아주머니께 ?오도리가 나이 데스한다.? 물론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뭔 말인지 못 알아듣고.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얼마 후 있을 일본연수 때문에 그동안 손놓았던 일본어 책을 다시 꺼내들고 몇 마디라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오도리가 뭐지?’ 특유의 잔머리를 굴린다. 고스톱 칠 때 ‘고도리’는 새 다섯 마리란 뜻이니 ‘도리’는 새다. 그럼 ‘오’는 존칭어에 붙이는 말이거나 크다는 의미로 쓰이니 이 사람들 새나 큰 새 보러 나갔던 모양이다. 혹 황새를 보러 나간 것은 아닐까?
“할머니, 이 마을에 큰 새가 있나요?”
할머니는 이 양반이 뭔 소리 하냐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설명을 해준다. 일본인 부부가 오늘저녁 탈춤공연이 있다니까 보겠다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분이 탈춤은 오후 3시에 한번하고 저녁 8시엔 없다고 했다. 처음 저녁 8시에 있다고 말해준 할머니는 여름에 휴가철을 맞아 관광객이 많을 때는 저녁에도 탈춤공연을 했었는데 이젠 없어진 모양이라고 꼬리를 내린다.
아항, 오도리가 탈춤이나 춤 뭐 그런 뜻인 모양이네. 이 상황을 그 일본인 부부에게 설명을 해주려니 일본어가 짧아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머리 속 상상으로 연습해 두었던 상황을 적용하기로 했다.
“에~ 고가 데키마스까? (영어 할 수 있으세요?)”
남자손님이 약간 한다고 대답했고, 나는 콩글리쉬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 손님 자신들도 관광안내원에게서 듣고 왔다고 한다.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본어 실습 한번 했다. 아주 유용한 표현이니 잊지 말아야지 “에~ 고가 데키마스까?”


 


일정 마무리는 막걸리, 시와 함께 영호루에서
다음날, 병산서원을 거쳐 옥동에 와서 아점으로 해장국을 먹고 나니 친구가 돌아가는 기차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남았다. 이윽고 나의 또 다른 소망 한 가지를 이룰 시간이었다. 안동막걸리 두 통과 멸치 안주를 사서 영호루로 갔다.
친구는 문화재에서 술 마시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여름에는 간혹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도 이 시간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당연히 제지하는 공익요원도 없다고 안심을 시켰다. (친구에게 병산서원 만대루에 누우면 공익요원이 와서 제지한다고 했더니 영호루에도 공익요원이 있지 않을까 걱정한 모양이다.)
난 운전을 해야 하니 한잔만 마시고, 남은 술은 두 사람이 다 마셨다. 영호루 벽에는 유명인사가 영호루에서 지은 시들이 사면을 돌아가며 붙어있다.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주세붕, 김종직, 김안국 등 알만한 사람들의 시들도 있다.


  飛龍在天弄明珠 (비룡재천농명주)    
  遙落永嘉湖上樓 (요락영가호상루)    
  夜賞不須勤秉燭 (야상불수근병촉)    
  神光萬丈射汀洲 (신광만장사정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어, 명주를 (가지고) 희롱하다
멀리 영가고을 호수 누각에 떨어뜨렸네.
밤에 경치를 감상할 때 구태여 촛불 (손에) 잡을 것 없네
만길 신광이 온 물가 모래섬에 비취는 것을.


삼봉 정도전의 시를 읽고 영호루 아래 고요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우리 술꾼들의 주말일정을 접었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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