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주 속의 지례마을 리컹(理坑)(글/임세권-안동대 교수)

우위엔(婺源)은 옛 휘주(徽州)에 속했던 6현의 하나지만 지금은 쟝시성(江西省)에 속한 지역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휘주문화의 핵심은 우위엔에 있다고 할 정도로 휘주문화 속에서 그 위치가 튼튼하다. 그것은 이곳이 주희(朱熹)의 부친 주송(朱松)이 나서 자란 곳이고 그래서 주희의 고향으로 일컬어지거나 또는 휘주를 대표하는 산물인 흡연(歙硯)과 휘묵(徽墨)이 바로 이곳 우위엔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우위엔의 수려한 산천과 인문학적 환경 그리고 건축과 역사 모든 것이 휘주문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아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 휘주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황산시에 온 이후 줄곧 우위엔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3월에 잠시 우위엔의 샤오치(曉起)라는 곳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폭우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 알게 된 조선족 여행가 박정홍씨의 도움으로 다시 우위엔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세 개 마을을 돌아보고 그날 돌아오기로 하고 떠났으나 몇 개 마을을 돌아 우리가 계획했던 황산시 슈닝(休寧)을 거쳐 돌아오는 것이 시간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마지막 마을인 리컹(理坑)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리컹에서 하루를 자게 되었으며 리컹이야 말로 우위엔을 대표하는 전통 깊은 마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 우위엔과 슈닝을 잇는 도로에서 리컹 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길은 겨우 차 한대 지날 정도의 좁은 길로 바뀌었다. 옆에는 맑은 계류가 커다란 바위들을 휘돌아 흐르고 있었고 양쪽으로는 깎아지른 듯 높은 벼랑과 산봉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안동의 길안 대사리 어디쯤을 지나는 것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이런 깊은 산중에 어떤 마을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질 무렵, 갑자기 길이 밝아지고 눈앞이 탁 트이면서 넓은 벌판이 나타났다. 벌판의 뒤쪽에 소위 휘파건축으로 알려진 휘주의 전통 가옥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마을이 보였다. 이러한 풍경은 좁은 계곡을 지나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마을은 우리에게 아주 유쾌한 반전을 선물했다.




산중추로 이학연원의 마을
마을 입구에는 위에 지붕을 씌운 소위 랑챠오(廊橋)라고 부르는 다리가 있었고 다리 양쪽의 입구는 정자 구실을 하도록 해서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마을로 들어갈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자의 앞에는 “산중추로(山中鄒魯)” 뒤에는 “이학연원(理學淵源)”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산 속 깊이 있는 촌에 불과하지만 공맹(孔孟)같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났으며 성리학의 근본을 이 마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마을이 유학을 얼마나 숭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리 이름은 이원교(理源橋)라고 하는데 이학연원이라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 이 마을은 휘주 지역의 대표적인 고위관리들과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수백 년에 걸쳐 상서(尙書) 대리사정경(大理寺正卿) 사마(司馬) 지부(知府) 등 명 ․ 청대의 7품 이상 관원이 36명이 나왔으며, 진사합격생이 16명, 문인학사 92명이 배출되었다, 또 이들 문인학사들이 남긴 저작물이 333부(部) 582권(卷)이 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 5부 7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들어갔다고 하니 지금도 험악하기 짝이 없는 산간벽촌을 볼 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자연환경이나 마을에서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되었다는 데서 나는 이곳이 안동의 지례마을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리컹을 산중진사촌(山中進士村)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본래 이학연원에서 나온 리위엔(理源)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왜 리컹(理坑)으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마을 이름이 바뀐 후 마을의 운이 다해서 인재가 배출되지 않았다고도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이학 사상을 혁명정신으로 무덤 속(墓坑)으로 묻어버렸다고 하는데서 나왔다고 하기도 하는데 다 근거가 없다고 한다.


마을은 앞에 작은 개울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흐르고 개울의 서북쪽으로 마을이 앉아 있다. 개울을 건너면 높지 않은 산이 막혀 있으며 개울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 역할을 하는 이원교 밖으로는 비교적 널찍한 들이 있어 마을의 경제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개울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하나는 천심교(天心橋)이고 하나는 백자교(百子橋)이다. 백자교를 만들 당시 이 마을은 1000호 정도의 규모를 가진 큰 마을이었고 그 해에 100명의 아들이 출생했다고 한다. 백자교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것인데 이후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생겼고 지금도 갓 시집온 새댁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넌다고 한다. 천심교는 천지양심(天地良心)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을에는 호남성에서 왔다는 미술전공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이 산골까지 찾아와 스케치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 비로소 이 마을이 중국에서 얼마나 유명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골목길에서 보는 공동체정신
마을 안길은 여느 휘주 마을과 마찬가지로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고 그 좁은 골목 양쪽으로 명 ․ 청대의 옛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휘주의 옛집들은 도무지 정면에서 전체를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골목은 개 한마리가 가로로 서있으면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집의 높이는 웬만한 3층집만 해서 대문 바로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아야 대문 위의 집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집의 모양을 찾아서 목적지를 갈 수도 없고 일일이 물어보자니 복잡한 길 설명을 하는 할아버지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래서 구한 안내인이 이 마을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교사를 퇴직한 후 외부인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전문가가 되어버린 위위린(余玉林) 선생이다. 그는 금년 만 59세로 나와는 동갑인데 작은 키에 짧은 머리 그리고 주름 없는 얼굴로 나이보다는 비교적 젊어 보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안내하다보니 이제는 마을의 역사와 인물, 옛집이나 지명에 얽힌 일화 등에 대해서 사전처럼 되었다고 했다. 최근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인터넷에 소개하여 이제는 전국적인 유명인이 되었다고 그와 가까운 인척간이라는 우리가 묵은 민박집 주인이 말한다. 위선생이 온 것은 이미 저녁때가 다 되어서인데 저녁시간이지만 일단 위선생과 함께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을은 중심부에 약간 넓은 광장 같은 것이 있고 거기에 큰 우물이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야채도 씻고 또 모여 앉아 한담을 즐기기도 한다. 골목이 좁다보니 길이 꺾어지는 곳이나 교차하는 곳에 건물의 모서리가 길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이 곳은 모서리를 깎아 모를 죽여서 사람들이 부딪쳐도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쟝완(江灣) 같은 우위엔의 다른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나지 않게 서로 화합하며 살자는 의미도 함께 있다고 했다. 문관들이 많이 살던 골목의 입구는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문관들이 탄 가마가 부딪치지 않고 들어올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사회구조를 코드화 시킨 골목길
마을의 골목을 다니다 보니 좁은 골목의 중간 부분만 양쪽의 집을 약간씩 들여 지어서 길을 넓게 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길 한쪽에 돈 많은 부자 상인이 살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아주 가난한 농민이 살고 있었는데 돈 많은 집 아들이 가난한 집의 처마가 자기 집 바로 앞을 막은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고 나서 그 나라가 얼마나 오래갔는가? 라는 의미의 시를 써주자 아들이 깊이 뉘우치고 오히려 자기 집의 벽을 안으로 들여쌓았다고 한다. 그를 본 가난한 집에서도 부자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감동하여 자신의 집도 함께 뒤로 물려 쌓아 골목이 지금처럼 넓어졌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이렇게 이곳 사람들의 서로 어울려 함께 사는 지혜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품계를 알려주는 정보도 숨어 있다. 아문항(衙門巷)이라는 골목의 입구에 있는 계단은 일곱 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골목에 사는 관리들이 모두 7품 이상임을 말해준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 있는 골목에는 네 계단을 내려와서 길이 꺾이고 다시 열세 계단을 내려가서 조금 떨어져 세 계단을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 곳이 있다. 이는 이 통로에 네 명의 진사와 열 세 명의 관리 그리고 단번에 세 관등을 건너 뛰어 출세한 관리가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 중심의 광장 입구에 있는 큰 대문 앞에는 자갈이 불규칙하게 깔려 있다. 옛날에는 마을의 대소사를 이곳에 모여 의논했으며 마을에서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이곳에서 재판을 하고 벌을 주었는데 죄 지은 사람을 자갈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고 한다. 따라서 자갈을 불규칙하게 깔은 것은 무릎 꿇은 죄인이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골목길에서는 우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특별히 넓고 깊었다. 우물 안 벽 중간을 턱을 지게 만들어서 아이들이 장난하다 빠지면 손으로 잡고 나올 수 있도록 하였고 우물 주변에 네 개의 돌로 된 수조가 있는데 여기에는 황제가 내려준 물고기를 길렀다고 전한다.


골목을 다니다 보면 길은 땅위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골목위에는 길 양쪽에 있는 집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공중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다리는 벽과 지붕을 덮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봉건시대의 여자들은 집 밖을 함부로 나다닐 수 없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이웃에 다니는 것을 위해 이처럼 공중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로는 구태여 여자들의 문제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폭이 불과 2~3미터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을 이용한 매우 효과적인 이웃 간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영광의 흔적만 남은 관리의 집들
골목안의 집들은 관리의 집도 있고 상인의 집도 있다. 그러나 상인 출신의 관리도 있어서 그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휘주에는 선상후유(先商後儒)라고 해서 먼저 상업으로 돈을 벌어서 그 후에 자제를 교육시켜 고위 관리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마을이 큰 만큼 찾아볼 집은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중 몇 개만을 골라 소개한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의 맞은편에는 사마제(司馬第)라는 집이 있다. 이 집은 청나라 순치년간(順治年間)에 사마 벼슬을 지낸 여유구(余維樞)의 저택이다. 민박집 옥상에 올라서면 "사마제"라는 집 이름의 편액이 마주 보이고 그 아래로는 진흙으로 더럽혀진 석조(石雕)가 보인다. 이 조각은 손자병법의 내용을 새긴 것인데 문화대혁명(이후 문혁) 당시 파손을 면하기 위해 집 주인이 진흙을 발라 가렸던 흔적이라고 했다. 대문은 황궁이 있는 북쪽으로 냈다. 이 집에는 거실에 해당되는 정청(正廳)의 바닥 중간에 큰 정방형 석판이 깔려 있다. 이는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팔선탁(八仙桌)을 놓을 수 있는 자리로 단원석(團圓石)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 남자들은 높은 벼슬을 하든지 아니면 큰 장사를 하든지 대체로 일 년 중 청명절과 섣달 그믐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날은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이기 때문에 팔선탁을 정청 가운데 내놓고 모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데 그 상을 놓는 자리를 큰 석판을 깔아 따로 마련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것을 “단원(團圓)”이라고 하므로 이 돌을 단원석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마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숭정황제의 명으로 지어진 우송사(友松祠)가 있다. 이 건물은 “관저(官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집의 대문은 네 기둥을 가진 패방(牌坊)의 형태를 하였고 위에는 “聖旨”라는 두 글자를 새긴 돌이 끼워져 있었는데 문혁 당시 떼어냈으며 지금은 집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관저는 “가목당(駕睦堂)”이라고 했고 명 숭정년간 광주지부(廣州知府)를 지낸 여자이(余自怡)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립한 것이다. 후에 우송사로 이름을 고쳤다. 전체 집안의 기둥이 50개로 그 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문은 삼중의 처마를 가졌고 문 위에 검은 벽돌의 오봉(五鳳) 장식이 있었다고 하나 역시 문화대혁명 때 모두 파괴되었다.




빗물을 받아 집안에 들어온 물을 저장하고 배수하는 기능을 가진 천정(天井)의 일부 장대석은 일견 5미터가 넘는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큰 돌을 여산(廬山)에서 수운과 육운을 거쳐 옮겨 왔다니 당시 이 건물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갔으며 여자이의 권세가 얼마나 컸겠는가 짐작이 간다. 그래도 여자이는 청렴한 관리로 황제를 감동시켜 이 집을 짓게 했다고 하니 집을 보면서 당시의 청렴이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청렴과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정청에서 앞의 벽을 보니 울긋불긋한 그림이 보였다. 혹시 이 건물이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는가 하고 물어보니 그 그림은 문혁 때 그려진 모택동의 그림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모택동의 얼굴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군복 약간이 남았을 뿐이고 그 아래는 인민들을 상징하는 해바라기 꽃이 아직도 모습을 잃지 않고 남아 있었다. 원 그림은 모택동의 주변으로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이고 그 밑에 인민들이 해바라기가 되어 태양인 모택동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라고 했다. 지금 태양 모택동은 얼굴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인민을 상징한 해바라기는 아직도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니 참 흥미 있는 현대 중국의 상징물로 남아 있었다.


이 외에 높은 관직을 지낸 집으로는 명나라 천계년간(天啓年間) 남경(南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여무형(余懋衡)의 집인 “천관상경제(天官上卿第)”와 그의 사촌형인 명나라 만력년간(萬曆年間) 남경의 호부우시랑(戶部右侍郞)과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여무학(余懋學)이 살던 상서제(尙書第)가 있다. 이 두 사람 역시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이름을 높인 사람들이며 그들의 집은 높은 관직에 비해 소박하다는 것이 건축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미인이 살던 상인의 집 소저루
이 마을에는 이러한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의 집 외에 상인의 집으로 눈길을 끄는 곳이 있다. 바로 소저루(小姐樓)라고 불리는 집이다. 이집은 입구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매우 어둡게 되어 있는데 이는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관리들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천정이 있는 자리가 좁은 바닥에 자갈을 깔아 배수가 되도록 만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정은 타원형의 길고 둥글납작한 돌들을 사선으로 “人”자 형으로 겹쳐 세워 만들었는데 이는 수많은 “人”자를 겹쳐 쌓은 듯 보였다. 이 집은 상인의 집으로 “인상인(人上人)” 즉 사람 위에 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도 또 사람이 있다는 계급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당시 상인들이 관리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층의 난간 외면에는 중국 설화에 나오는 여덟 신선들이 사용한 도구들을 조각하여 신선을 직접 조각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목재들은 이미 모두 검은 색으로 변색되어 화려한 옛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정교함이나 조각의 다양함은 그것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그려보기 어렵지 않았다. 2층 난간 옆에는 독일에서 수입된 유리로 창을 달았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가난한 집의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부모는 딸이 그 청년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결혼을 앞둔 처녀는 채색한 공을 2층 난간에서 밑으로 던져서 그 공을 받은 남자와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처녀는 공을 자기가 사랑하는 청년이 받을 수 있도록 던졌고 청년은 그 공을 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부모는 할 수 없이 결혼을 시키고 데릴사위로 맞아 집을 물려주었다. 사위는 항주로 가서 크게 출세해서 아름다운 집을 짓게 되었는데 집은 중국에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소주(蘇州)의 원림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위선생과 함께 마을을 돌면서 느낀 것이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마을에 박힌 돌 하나와 골목의 계단이나 집의 모서리 모양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사소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붙여 찾아온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집이 과거에 유명한 관리가 살았던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번 장사꾼이 살았던지 있는 그대로 전해오는 그대로 모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어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내가 정말 이 마을을 찾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험한 산골짜기의 이 작은 마을을 찾은 것에 보람을 느끼고 뒤에라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안동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답답함이 가득 찬다.
이제 컨텐츠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컨텐츠가 뭔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많은 컨텐츠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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