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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약포재실(글/윤천근-안동대 교수)

호명의 본리
호명의 본리는 마을 한쪽을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하여 안동과 예천으로 나뉘어진다. 개울의 동쪽은 안동의 오미이고, 개울의 서쪽은 예천의 호명이다. 개울이 제 형상을 갖추고 있었을 때에도 그 구분은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울은 복개되어 밖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안동과 예천은 복개된 마을길의 정 중앙에서 영역을 나눌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부자연스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연이야 땅 위에 금을 그어서 이쪽저쪽을 따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개울은 이쪽 안동 산야에 떨어진 빗물과 저쪽 예천 산야에 떨어진 빗물을 뒤섞어 하나로 실어 나른다.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의 마음이 아니다. 영역과 구분에 익숙한 인간의 시선만이 이것을 두고 고개를 갸웃하게 마련이다.
마을의 대부분은 예천군 호명면 본리에 속한다. 안동의 오미동은 그 일부를 나누어 가질 뿐이다. 청주정씨 재실, 약포 정탁의 재사는 호명면 본리의 한 끝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좌측의 산야는 오미동이다. 약포 정탁의 묘소는 안동 오미동의 작은 산자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은 똑같이 남향의 자세를 취하고 멀리 나지막한 산록의 위로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시선들은 평행으로 그 끝을 향하여 치닫는다. 여기가 바로 16세기를 살았던 조선의 인물, 약포 정탁의 혼이 오래 머물러 안식하는 곳이다.

약포 재사
약포재사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천 청주정씨 재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본리 14-2
이 건물은 약포 藥圃 정탁 鄭琢(1526-1605)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17세기에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약포는 조선 명종부터 선조 때까지의 문신으로 좌 우의정과 영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 충성을 다한 이름난 재상이다. 재실은 손자 정시형 鄭時亨(1585-1646)이 세웠다고 한다. 건물이 오래된 격식을 잘 유지하고 특히 안채의 대청 뒷벽에 완전한 형태의 쌍영창이 남아 있다.

약포재사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건물은 두 채로 나뉘어져 있다. 앞에 일자형의 행랑채를 두고 뒤에 디귿자 모양의 본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전체 건물은 담장 안에 들어앉아 있으므로, 앞의 대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행랑채의 양 끝으로부터 시작된 울타리는 서쪽 영역에서는 디귿자 건물의 서쪽 끝 벽을 담으로 하여 일선으로 채워지고, 동쪽 영역에서는 디귿자 건물의 동쪽 끝 벽 앞으로 돌아 나와 좁직한 내정을 만들며 뒤까지 돌아나가 서쪽 끝으로 삐져나온 다른 쪽 담과 만난다. 그러므로 이 집은 건물은 트인 미음자 형태를 갖추고, 전체 영역은 독립된 울타리에 의해 둘러싸이는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1선으로 앞에 나와 선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대문은 서쪽으로부터 제 3칸에 마련되어 있다. 대좌는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판을 3층으로 쌓아 마련하였다. 대문이 있는 칸은 3층의 넓은 계단으로 처리를 하였다. 건물은 대좌의 끝 선으로부터 상당히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처마가 나온 만큼의 길이를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인데, 그런 까닭에 건물 앞으로는 1미터는 넘는 넓이의 뜨락이 마련되었다.

대문은 문지방은 만들어져 있지 않고, 좌우와 위 측에 각재를 이용하여 디귿자 형의 틀을 만들고 상당히 넓은 판재를 다섯씩 수선방향으로 덧붙여서 두 쪽의 안으로 여닫는 문을 붙였다. 대문의 틀을 이루는 위쪽 각재의 위로는 지붕 밑 횡보에 이르기까지 비어 있고, 좌우의 문틀과 기둥 사이에 있는 50센티가 좀 넘는 틈은 횡으로 짧은 판재를 박아서 처리하였다.
대문의 서쪽으로 위치하는 두 칸의 외벽은 똑같이 흙으로 발라져 있다. 폭은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아래쪽 나눔 횡목의 위치는 높고 낮게 되어 있어, 두 벽면의 동일한 처리방식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움을 피하였다. 두 벽면의 중앙 부위는 두 개의 각재를 수선 방향으로 박아 3단으로 나누었다. 그 중 대문 쪽에서 가까운 칸의 중앙 면에는 아래쪽으로 작은 창을 박았다.
대문 동쪽 3칸의 벽면은 대문 쪽에서 가까운 두 칸의 처리방식과 나머지 한칸의 처리방식이 다르다. 이 벽면은 세 칸이 다 세부분으로 횡단되지만, 아래쪽 1단을 주초영역으로 본다면 실제로는 2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문 쪽 두 칸은 아랫단을 판재로 막아 처리하였다. 나머지 한 칸은 완전히 흙벽이다.

행랑채는 동쪽 끝 칸에 디딜방아를 두었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도 사용이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동쪽 제2칸은 광이고 제3칸은 위에 다락이 만들어져 있는 마구간이다. 제4칸은 대문이고 제 5칸은 방, 제6칸은 광이다.

디귿자 형태 건물의 북쪽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이 건물은 4단 석축을 쌓아 대좌를 만든 위에 세웠다. 뜨락은 넓다. 석축 안에는 계단이 없고, 양 끝으로 동 서 연결채의 뜨락 쪽을 계단처럼 처리하여 북쪽 본채의 뜨락으로 오르게 만들었다. 본채의 중앙 3칸은 마루이다, 뒤쪽 벽면은 2단으로 횡분하여 아래쪽 중앙에 두 쪽 나무판문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채의 양쪽 끝으로는 방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안에서 보았을 때 북쪽 건물의 지붕은 전체 5칸을 일선으로 하여 뻗혀 있다. 추녀들림은 없다. 양쪽 끝 칸의 추녀 밑으로는 동 서 연결채의 지붕이 파고든다. 동 서 연결채는 북쪽 건물보다는 지붕 하나 정도가 얕다. 동 서 연결채의 지붕은 북쪽 본채건물의 지붕 밑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없어지지만, 그 목구조는 북쪽 건물의 뒤편까지 뻗어나가 북쪽 건물채 양쪽 끝칸의 뒤 지붕과 벽면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뒤에서 보았을 때 북쪽 건물 양쪽 끝 칸의 뒷벽은 완전히 옆쪽 연결채의 목구조를 드러낸다. 이 목구조의 대들보 영역까지는 북쪽 본채의 지붕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대들보영역을 넘어서서 그 바깥쪽으로 흘러내리는 처마구조는 그대로 동 서 연결채의 지붕 경사면이다. 이렇게 북쪽의 디귿자 건물은 한 건물로 비벼지듯이 뒤섞인다.

뒤쪽 건물의 뒤곁 낙숫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초겨울인데도 이끼가 한창이다. 낙숫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분화구를 일선으로 줄지어 놓았다.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원형, 또는 타원형의 무늬를 그려내듯 푸르거나 갈색의 이끼들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안에서 보았을 때 동쪽 연결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아래쪽 두 칸은 완전한 동쪽 연결채라 할 수 있으나 위쪽 한 칸은 북쪽 건물 속으로 파고 들어가 북쪽 건물의 동쪽 끝 칸을 이루고 있으므로, 사실은 두 칸 건물이라 할 수도 있다. 이 건물은 아래쪽 한 칸 부분에는 이단 석축을 쌓아 대좌를 마련했고, 그 위쪽으로는 두 걸음 쯤 되는 지점까지는 1단 석축, 그 위로는 북쪽 건물의 뜨락으로까지 오르는 3단 계단을 석축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쌓아올려 기단을 마련한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아래쪽 제1칸은 통상의 경우보다 키가 높은 건물이 되었고, 위쪽 제2칸은 통상의 경우보다 춤이 낮은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의 용마루 선은 북쪽 건물의 용마루에서 타고 내리는 끝 선과 일선으로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 이 건물의 제 1칸은 창고이고, 제2칸은 방인데, 벽면에는 작은 창과 통상의 경우보다 좀 작은 1쪽 방문이 달려 있다.

서쪽 연결채는 서쪽 담과 연결되어 울타리의 일부를 이룬다. 이 건물은 동쪽 연결채와 대칭이 되는 구조이다. 정면3칸, 측면1칸이지만, 동쪽 연결채와 똑같이 사실은 2칸 규모이다. 아래쪽 1칸은 둘로 횡분되어 아래에는 부엌, 위에는 다락방을 두었다. 위쪽 제2칸은 앞에 쪽마루를 둔 작은 방이다. 여기서는 쪽마루의 넓이만큼 뜨락이 줄어들며, 끝에 좁은 계단영역이 비워져 있을 뿐이다.
재사건물은 작고 아담하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재사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살림채 정도의 규모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약포 정탁의 묘소
양포 정탁의 묘소를 가려면 재사의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산기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재사영역을 벋어나 동쪽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안동지역이다. 산은 낮고 따스해 보인다. 소나무 산으로 특별히 가꾸어지는 모양으로, 잡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이며, 조금씩 이리 저리 비틀린 모습이다. 비슷한 높이의 소나무 둥치가 이리 저리 휘어 불규칙적인 곡선을 그리면서 무수히 들어차 있는 모습은 재미있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래로 뻗어 내린 낮은 산록의 꼭대기에 약포 정탁의 묘역은 있다. 산이 낮고, 고만고만한 등성이들이 주르륵 연결된 모습인데 그 등성이들 중 하나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후산은 없다. 묘역은 넓고, 봉분도 크다. 그냥 바가지 모양으로 평지 위에 봉분이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다.

봉분 앞에는 석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봉분은 통상의 경우보다 크다는 느낌이고, 석물은 통상의 경우보다 작다는 느낌이다. 비석의 머리는 보기 힘든 독특한 문양을 하고 있다. 이것을 무슨 모양이라고 할까? 귀면을 그려두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물결 속에 떠있는 연꽃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말하기 어렵다. 그런 그림이 사변을 돌아가며 똑같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정경부인 반潘씨 부祔
좌의정 서원부원군 치사致仕 정간공貞簡公 약포藥圃 정선생지묘”
비석의 잔 글씨는 거의 판독하기 어렵다. 글씨가 자잘하며, 얕게 새겨져 있고, 이끼가 사방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정간공 약포 정탁은 누구인가?
“중종21년 병술년 1526년 출생, 선조38년 을사년 1605년 타계. 향년 80세. 자는 자정子精.”
정탁의 간단한 이력이다. 약포 정탁은 16세기를 살았던 사람이며,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었던 사람이다. 그의 묘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포함한다.

“유명조선국 충근정량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忠勤貞亮扈聖功臣大匡輔國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시 서원부원군 증시충간공 정공 묘표 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西原府院君曾諡忠簡公鄭公墓表.

오호라! 선조의 당상관이며, 식견이 풍부하고 노성한 지혜를 갖추었고, 도타운 은혜를 입고서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쳤으며, 이름을 크게 이루었고, 일을 맡아서는 일어나고 넘어지는 것을 시대의 추이에 따라 행하지 않음이 없었고, 그 덕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하게 구현하였다고 칭송되는 사람으로는 서원경공 만한 사람이 없다. 공은 다섯 개 조정을 섬겼으며 수명은 팔순에 이르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러나 향리를 지킨 지 6년 되는 해에 타계하였다. 타계한지 30년에 지역 사람들이 제향을 올릴 논의를 하며 상서롭게도 시호를 받을 의론을 나누게 되었다. 공의 가문의 후손 시형時亨은 소종백小宗伯 이공李公의 글로써 익성翊聖을 찾아와 제사에 바치는 돌에 새겨달라 하였다. 그 일을 할만한 능력이 없음을 두려워 하여 여러번 사양했으나 끝내 물리칠 수 없어서 객기를 부려 다음과 같이 지었다. 이름을 바꾼 것(시호를 받은 것)은 특별한 은전을 입은 것이고, 줄지어 서서 제사를 올리는 것은 성대한 일이다. 공이 타계한지 20년부터 거행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오래되면 흐릿해지고, 흐릿해지면 사라지는 것인데, 오래될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것은 그 은택이 고갈되지 않는 까닭이다. 삼가 그 표문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의 이름은 탁琢,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니, 서원西原은 그 관향이다. 먼 조상으로 계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별장別將 극경克卿이 있고, 그 후예로는 대장군 기覬와 문극공文克公 오䫨가 있는데 고려조에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3세를 내려와서 원로元老에 이르면 장수長水 현감이며 증직 이조판서이다. 교僑는 생원이며, 증직 좌찬성이다. 이충以忠은 증직 영의정이며 청성부원군이니, 공으로 말미암아 3대가 추은을 입었다. 배위는 한씨韓氏 부인인데 정경부인을 받았다. 의정공의 은덕이 넉넉하게 드리워서 가정 병술년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고아가 되었다. 외롭고 곤궁하였으나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뜻은 더욱 견고하여졌다. 경전을 펼쳐보고 문장을 꿰어내어 임자년에 태학에 올랐고 무오년에 갈옷을 벗게 되었다. 처음에는 교서관에 배치되어 실제로 빠져들만한 벼슬자리를 얻기를 바랬다. 전적으로부터 정언으로 제수되어서는 권세 있고 아첨하는 관리들을 탄핵하여 조정의 기풍을 정화시켰다. 호조좌랑과 예조좌랑을 거치고 헌납, 지평, 장령, 사간, 집의를 지냈다. 추천되어 옥당에 들어가고 수찬, 교리, 응교가 되었다. 천관天官을 따르는 일을 하였고, 추천으로 의정부 검상, 사인이 되었다. 갑술년에 동부승지로 뽑혔으며 도승지로 승차하였다. 정축년에 대사성으로 있다가 예조참의로 바뀌었고,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묘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고, 경진년에는 이조참판으로 올랐다. 임오년에 한성판윤을 넘어서서 여러 계단을 섭렵하며 특별히 가려 뽑혀서 예조, 병조, 형조를 두루거치면서 모두 판서에 제수되었고 세 번이나 총재冢宰가 되었으며 8번이나 어사로 임명되었다. 경인년에는 찬성이 되었고, 을미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삼아 서추西樞로 되었다. 기해년에는 말미를 얻어 성묘를 하였고, 다음해에는 다시 상부로 들어가 좌의정이 되었다. 공은 향리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병의 증상을 알리는 소장을 지어 올리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4년 후에는 관직에서 영원히 물러나기를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께서는 거듭 공의 의사에 따르지 않으면서 태사太史를 보내 따뜻한 윤음을 내려 포상하고 도타운 은혜를 내리는 것이 지극하였다. 그 해 겨울에 호성扈聖의 훈작을 내리고 부원군에 봉하였으며, 본도에 명하여 받들 수 있는 것을 지급하고 조정엔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세상을 하직한 것은 을사년 9월 19일이니, 예천 향리의 집에서 타계하였다. 임금은 공이 타계한 날부터 조회를 폐하고 장례물품을 갖추게 하여 가까운 데서 모시는 관리를 보내 역마를 달려 조문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간절하여 특별하게 여러 가지를 갖추게 하였다. 다음해가 되어 군 경계 남쪽의 위곡位谷 산록에 장례를 치뤘다. 부인 반씨潘氏도 부장하였다. 공은 출생하였을 때 용모가 출중하고 천품이 뛰어났으며, 어려서 퇴도退陶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다. 스승으로부터 공부의 방향을 들어 알고 진지眞知를 깨치고 실천하는데 힘을 쏟았다. 여러 전적들에 통달하였고, 즐겁고 화목한 삶을 실천하였으며,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지켜냈다. 당시에는 사론이 분열되어서 경쟁적으로 문호를 일으켰으나 공은 홀로 고결하게 위엄을 갖추었다. 거듭하여 특별한 대접을 받아 명성이 점차적으로 높아졌으나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여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사사로운 이해를 위해 임금께 아뢰는 경우는 없었고 공정하게 인물을 천거해 등용시키곤 하였다.”

묘표는 이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정탁의 시대는 선조임금의 시기이다. 그는 유성룡과 함께 임진란의 파고를 타고 넘었던 관인이었다. 호명의 이 나지막한 산야는 그의 영혼이 조용히 만년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 곳이다.

재사, 그리고 조선문화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고 유교는 가족과 조상을 중시하는 학문이다. 조선왕조는 그 전 영역을 통하여 이러한 가족문화를 일반적 문화로 특수화 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적인 유교적 가족문화를 완성시켜낸다. 그것이 완성되는 것은 17세기에 가서의 일이다. 16세기는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시기이다.

안동은 조선의 유교문화를 완성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16세기의 안동에 사문의 종장이었던 퇴계 이황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황 이후 조선은 유학이 시대의 문화를 생산하는 시대로 들어간다. 그런 유학문화의 결정판이 바로 가문, 종가, 재사이다.
오늘날 안동은 많은 재사문화를 유전 받고 있다. 재사는 묘를 지키고 수호하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재사는 4대 봉사 이후에도 오래 조상을 모시고 받드는 문화와도 연결된다. 가문의 중시조가 되는 조상들은 4대가 지나서도 계속하여 모셔지며, 계속하여 그 묘소를 수호하게 된다. 그런 경우 묘사를 돌보기 위한 기지가 필요하게 되고, 그것이 재사를 짓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안동 일원의 여러 재사들을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건물구조의 측면에서도 특징적인 면을 갖는다. 이를테면, 남흥재사, 숭실재, 능동재사, 태장재사 등은 가장 큰 민간 건축물에 속한다. 남흥재사나 숭실재사를 통하여 볼 때, 재사는 사찰건물의 연장선상에 놓여 진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적인 문화 속에서는 죽은 조상의 안녕을 비는 역할은 사찰이 수행하는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불교의 문화가 유교의 문화로 바뀌어 지면서, 그 기능은 사찰로부터 거두어져서 가문이 담당하게 되고, 가문은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재사라는 건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가문문화는 생활영역에서는 종택이라는 건물을 유형화하고, 묘지영역에는 재사라는 건물을 유형화하여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종택 속에는 조상에 속한 사당 건물이 들어가지만, 그것만으로는 조상영역을 다 담아낼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조상들은 집으로부터 떠난 산록 속에 유택을 만들어 모셔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시는 것은 가까이 하는 것이다. 사당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혼백을 모시는 방법이고, 유택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육신을 모시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집 안에 사당을 두고서도 또 따로 묘역 가까이에 가문의 구성원들이 전부 모여 죽은 조상을 모실 수 있는 재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안동의 여러 재사들은 그런 목적에 입각하여 16세기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동은 그 재사들을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존시켜주고 있다.
우리가 살펴본 재사들이 현존하는 모든 재사들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재사들은 대부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재사 연재는 그치려고 한다. 혹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데도 빠진 재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견식이 부족한 탓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그런 재사는 나중에 기회를 보아서 따로 탐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동>

2005년 8월에 발간한 99호 <남흥재사>부터 시작해 이번 113호 <약포재실>까지, 긴 여정 함께 해주신 윤천근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재사이야기>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